미술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익숙한 장르가 있습니다.(사실 관심이 없어도 너무 자주 들어서 알 수밖에 없지요.) 바로 ‘팝아트Pop Art’입니다. 마릴린 먼로 등 각종 셀러브리티의 초상을 소재 삼은 작품으로 시장에서 어마무시한 금액으로 거래되는 앤디 워홀, 이제 온 국민이 다 아는 그림 ‹행복한 눈물›의 작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 복원된 청계천이 시작하는 청계광장에 커다랗게 서 있는 다슬기 모양의 구조물 ‹스프링›을 만든 클래스 올덴버그가 대표적인 팝아티스트죠.
그런데 혹시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라는 이름은 들어보셨나요? 미술사에서 팝아트의 주요 선구자로 여겨지지만 거의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인물인데요. 1995년 한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후 한 번도 한국을 찾지 않은 그의 대규모 회고전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가 광화문 세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비애티튜드»의 특급 필자 박재용 님은 이 전시를 두고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란 표현으로 정리합니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라는 말인데요. 나날이 좋은 시절을 맞고 있는 지금의 서울이 아니라면 예전에는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재용 님이 97.5% 정도 추천하는 로젠퀴스트 전시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아티클에서 직접 확인해 보세요.
‘호우지시절(好雨知時節)’이란 말이 있다. 중국의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 첫 구절인데,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뜻이다. 지금 서울의 미술 현장은 이보다 더할 나위 없는 호기로운 상황으로 진입 중이다. 지난 2022년 UFO처럼 홀연히 나타나 상륙한 ‘프리즈 서울Frieze Seoul’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수년에 걸친 개관 준비를 마쳐가는 공공 미술관과 부대시설, 새롭게 설립하거나 기존의 구성을 쇄신한 사립 재단과 미술관 등을 보면, 마치 ‘시절을 알고 내리는 좋은 비’처럼 느껴진다. 홍콩 시민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지만, 중국 본토와 홍콩의 정치적 긴장은 여러모로 서울을 매력적인 예술 도시로 만들었다. 여러 나라에 진출한 글로벌 갤러리가 서울에도 하나둘 지점을 열기 시작했고, 서울과 한국을 향한 해외 미술계 인사들의 방문도 잦아졌다. 이 모든 것이 모여 좋은 시절을 이뤄가는 듯하다.
세화미술관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 전시 전경. 세화미술관 사진 제공. 사진: 이현석.
이에 뒤질세라, 예전이라면 이 땅에서 보기 힘들었던 작가의 작업과 전시를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마주하는 빈도가 높아지고 있다. 아시아 최초라든지,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을 꼭 달지 않더라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널리 알려진 이름값에 기대지 않고, 충실한 기획 아래 작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전시들이 열린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 세화미술관에서 선보이는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 또한 그런 취지에 걸맞은 대형 기획전 중 하나다. 20세기 중후반 미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팝아트의 주요 작가로 꼽히는 제임스 로젠퀴스트James Rosenquist(1933-2017)가 쌓아온 60여 년의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이번 대규모 회고전은 로젠퀴스트라는 작가를 한국에 진지하게 소개하는 거의 첫 번째 시도라고 할 만 하다.
세화미술관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 전시 전경. 세화미술관 사진 제공. 사진: 이현석.
로젠퀴스트는 1933년 미국 노스다코타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한 그는 1955년 21살의 나이에 뉴욕으로 이주했다. 로버트 라우센버그 등 당대 알짜배기 예술가들을 길러낸 ‘뉴욕예술학생연맹(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에서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은 덕분인데, 70년 전에도 뉴욕은 20대 초반의 학생에겐 결코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는 장학생으로 수업을 듣던 1957년, 미국 화가 및 장식가 연합(Brotherhood of Painters and Decorators of America)에 가입해 광고판 화가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로젠퀴스트는 업계에서 무척 솜씨가 좋았던 것 같다. 기능인 노조의 일원으로 뉴욕 타임스 스퀘어 주변의 거대한 광고판을 도맡아 작업하기 시작했고, 불과 2년이 지난 1959년에는 뉴욕의 주요 스폿에 광고판을 소유한 회사인 아트크래프트-스트라우스의 선임 광고판 화가를 맡게 됐다. 하지만 성공적인 상업 화가로서의 경력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매달려 거대한 광고판을 작업하는 일은 안전함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어느 날 작업 현장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가 건물 비계 위로 떨어져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고, 로젠퀴스트는 그 길로 직장을 그만두고 예술가로서의 경력 쌓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광고판 화가로서의 경험은 이후 그의 예술 세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흥미롭고도 아이러니한 점 하나. 뉴욕예술학생연맹에서 공부하던 시절, 그는 상업 예술보다 추상 예술을 배우는 데 집중했단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저는 추상 예술가에게만 가르침을 구했어요. 상업 예술을 가르치는 분들도 있었지만, 그쪽에는 신경 쓰지 않았죠. 제가 관심 있었던 것은,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된 거예요. 어떻게 하면 시스티나 성당을 그리는지 배우고 싶었답니다. 야심만만한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벽화를 가르치는 학교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 면에서 로젠퀴스트는 떡잎부터 남달랐다. 시스티나 성당 대신, 뉴욕 시내의 거대한 광고판을 자신의 그림으로 채웠으니 말이다.
‹일식›, 1991, 캔버스에 유채, 아크릴릭, 알루미늄 시계 바늘, 시계 장치와 변형 캔버스 부착, 122 × 198 cm
번잡한 광화문 사거리에서 살짝 떨어진 흥국생명빌딩 3층에는 일부러 숨었나 싶을 정도로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세화미술관이 자리 잡고 있다.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로 들어가는 전시장 입구에서 보이는 공간 구성은 무척 흥미롭다. 마치 광고판처럼 옆으로 길게 뻗은 가벽에는 제품명이나 상표를 보여주는 것처럼 큼지막한 글씨로 ‘JAMES ROSENQUIST’를 써놓았고, 광고판을 놓기 위한 지지 구조마냥 각진 금속 파이프로 만든 구조물을 노출시킨다. 전시를 관통하는 이런 디자인은 한때 자본주의의 성화(聖畫)라 부를 만한 거대 광고판 그림을 그렸던 로젠퀴스트의 예술적 기원을 넌지시 알려주는 장치로 다가온다.
세화미술관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 전시 전경. 세화미술관 사진 제공. 사진: 이현석.
여기서 질문을 던져본다. 로젠퀴스트라는 이름이 익숙한가? 솔직히 말해 팝아트를 생각할 때 바로 떠오르는 작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나 앤디 워홀과는 달리, 로젠퀴스트는 여전히 대중적인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특히 한국에선 더욱더! 참고로 작가 웹사이트의 전시 이력을 살펴보면 한국에서의 마지막 개인전은 무려 30년 전에 한 갤러리에서 열렸다. 팝아트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고 이론을 전개한 영국의 미술 비평가 로렌스 알로웨이Lawrence Alloway가 워홀, 리히텐슈타인과 더불어 로젠퀴스트를 팝아트의 선구자로 꼽은 걸 생각하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광고판 화가로 일했던 그는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광고판만큼 거대한 캔버스에 펼치곤 했다. 이렇게 거대한 작품을 구매하거나 보관하거나 벽에 걸어놓을 수 있는 곳으로, (어쩌면 당연하게도) 개인이 사는 주거 공간은 적합하기 쉽지 않다. 로젠퀴스트의 작품을 가지고 있는 주요 컬렉터가 뉴욕현대미술관(MoMA)를 비롯한 대규모 미술 기관인 까닭 중 하나다. 예술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꿈꾸는 창작자라면 로젠퀴스트가 주는 교훈이 남다를지도 모르겠다.
세화미술관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 전시 전경. 세화미술관 사진 제공. 사진: 이현석.
팝아트의 선구자라는 미술계의 평에도 불구하고 로젠퀴스트의 작품이 리히텐슈타인이나 워홀에 비해 덜 알려진 데는 다른 이유도 존재한다. 좋게 말하면 그는 남들보다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작품 세계를 선보였다. 나쁘게 말하면, 쉽게 이해하고 한눈에 알아보기에는 다소 어려운 작품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는 ‘제임스 로젠퀴스트’라는 이름만 듣고서 ‘아하!’라는 반응이 나올 만한 대표적인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집중하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이미지, 워홀은 마릴린 먼로를 비롯한 셀러브리티의 초상 등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높인 반면, 로젠퀴스트는 시카고 시장(市長)의 초상을 그리거나 (‹데일리 초상화›,1968) 미술사 속 거장의 침대 혹은 스튜디오에 유성이 떨어지는 광경(‹브랑쿠시의 베개에 유성이 충돌하다›, 1997–1999) 등을 그렸다.
세화미술관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 전시 전경. 세화미술관 사진 제공. 사진: 이현석.
게다가 로젠퀴스트의 그림은 팝아트적 특징을 지닌 듯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생 시절에 회상한 것처럼) 추상 표현주의의 영향도 엿보인다.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기보다, 이를 파편화하고 재조합하는 것인데, 실제 그의 일지를 확인해 보면 이미지를 조각내고 재배치해 콜라주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기념비적 규모의 회화를 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상업적 이미지를 단순히 결합하는 단계에 머무른다면 다다와 초현실주의에서 시도한 콜라주와 일말의 차이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동일한 작업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작업이 추상표현주의와 더 가깝다고 여기기도 했고, 자기 스타일을 ‘신사실주의(New Realism)’이라 부르기도 했다.
더불어 로젠퀴스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할 때 그의 정치적 성향과 사회적 의식을 빼놓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워홀이나 리히텐슈타인은 좌파였을까, 우파였을까? 그럼, 로젠퀴스트는? 직능인 노조에 가입해 돈을 벌기 시작했고, 산업 재해로 동료가 목숨을 잃는 모습을 목격한 후 일을 그만두고 예술가로 전향한 그는 어떨까? 로젠퀴스트는 소비주의, 자본주의, 군산복합체 등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자주 내비쳤고, 이번 세화미술관 전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전시장 초입에 있는 ‹데일리 초상화›은 시카고 시장 리처드 J. 데일리를 길게 조각난 마일라Mylar(미국 듀폰에서 개발한 폴리에스테르 필름)에 그린 작품이다. 베트남 전쟁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반전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한 데일리의 얼굴은 바람이 일 때마다 쪼개진 채 흔들린다.
로젠퀴스트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은 ‹F-111›(1964–65)이다. 1965년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처음 선보일 때 논란을 부르며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출세작이자 대표작이다. 전쟁의 상징인 F-111 폭격기 이미지와 함께 케이크, 타이어, 전구 등 미국의 소비문화를 나타내는 일상적인 오브제를 뒤섞어 23개의 패널로 연이어 그려냈다. 가로 26m, 세로 3m에 달하는 이 거대한 작품은 관객을 빙 둘러싸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베트남 전쟁 시대의 군사력, 소비문화, 정치적 영향력의 교차점을 강렬한 이미지로 논평하는데, 현재 MoMA의 상설 전시 공간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F-111›은 전쟁의 비극뿐 아니라 전쟁이 미국의 경제 성장과 맺고 있는 불편한 관계를 보여준다. 화면 가득 펼쳐진 전투기의 이미지와 그 위에 중첩된 일상용품의 모습에서 전쟁과 일상이 뒤섞인 당시 미국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살필 수 있다. 발표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단순한 팝아티스트가 아니라 사회 비평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예술가라는 점을 각인시킨 작품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전쟁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모두에게 공평히(?) 비난을 받았는데, 전자에게는 전쟁과 소비를 결부한 점이, 후자에게는 전쟁을 충분히 비판하지 않은 게 불만이었다고.
뉴욕의 브룸가(街) 스튜디오의 ‹F-111› 작품 앞에서 찍은 제임스 로젠퀴스트, 1964 65년경.
혹시 이번 전시에 로젠퀴스트의 대형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든다면, 결론적으로 감상과 큰 상관이 없을 듯싶다. 로젠퀴스트의 기준에서 ‘작은’ 작품은 사실 일반적인 관객에게 이미 충분히 ‘크게’ 다가가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작품 대부분이 ‘작다’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띤다. 특히 작가의 작품 세계 전반을 아우르는 첫 번째 전시 공간과 ‘우주’를 다룬 작가의 경력 후반을 소개하는 두 번째 전시 공간 사이에 자리 잡은 복도에는 특별한 순간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3차원 공간으로 구현한 ‹네 명의 뉴클리어 여성›(1982, 2024년 재제작)을 통해, 예술은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관객이 직접 참여하고 경험하는 총체적인 환경이 될 수 있다고 믿은 로젠퀴스트가 적극적으로 작품에 도입한 ‘환경(environment)’의 개념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
세화미술관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 전시 전경. 세화미술관 사진 제공. 사진: 이현석.
우주로 향하는 팝아트
앞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전시 후반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작품들은 로젠퀴스트가 우주를 주제 삼아 자신의 예술 세계를 어떻게 확장했는지 잘 보여준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은 우주에 대해 관심을 가졌는데, 1971년 일어난 자동차 사고가 결정적인 계기였다. 차에 동승했던 아내와 아이가 몇 개월간 의식 불명에 빠지는 일을 겪은 후로 삶과 죽음, 시간의 흐름, 그리고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 같은 주제를 탐구한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시간 먼지-블랙홀›(1992)은 이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예다. 가로 10m에 이르는 거대한 작품에는 초기의 팝아트적 요소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위에 우주와 시간에 대한 깊은 사유가 더해졌다. 검은 배경 위에 흩뿌린 듯 다양하게 표현한 회색조 형태들은 마치 우주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탄생과 소멸을 연상케 한다. 우주와 존재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집중하는 예술가이자 인간으로 성장한 로젠퀴스트를 만날 수 있다.
‹시간 먼지 블랙홀›, 1992, Oil and acrylic on canvas, 213 × 1,067 cm
2017년 사망할 때까지 60여 년 동안 예술가로 활동한 로젠퀴스트는 경력 후기와 말년에 우주를 통해 인간의 존재, 시간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데 집중했다. 2008년 작 ‹시계 중앙의 공백-시간 기록자› 앞에 서면 시간의 상대성과 인간의 인식에 대한 고민이 느껴진다. 이제는 시간을 확인할 때 시계가 아니라 휴대전화를 보는 게 더 익숙하다는 걸 감안하면, 노년에 이른 로젠퀴스트가 그린 왜곡된 시계의 모습은 점점 더 가속화되는 시간 개념과 그 안에 갇힌 우리가 느끼는 공허함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우리 모두가 매일 느끼고 있을지 모르는, 시간에 대한 압박과 존재의 불확실성 말이다.
‹시계 중앙의 공백 시간 기록자›, 2008, 캔버스에 유채, 나무에 채색하여 접합, 213.4 × 137.2 × 22.9 cm
80세가 넘어서도 창작을 멈추지 않은 그의 2010년대 작품은 말년에 이른 예술가가 어떤 고민을 품고 인생을 돌아보았을지 관객을 상상의 영역으로 이끈다. 캔버스와 거울을 결합한 ‹본질적 존재›(2015)는 관람객의 모습―또는 작품을 그리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여 우리의 존재가 우주의 일부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다중우주 이론’을 회화로 해석한 ‹수학적 다중우주로 들어가는 입구›(2014)는 그가 말년에 탐구한 우주와 시간에 대한 사유를 잘 보여준다. ‹닥터 스트레인지›(2016) 같은 할리우드 영화가 도입해 멀티버스 개념이 유행하기 시작한 사실을 생각해 보면, 노작가의 탐구가 더욱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본질적 존재›, 2015, 캔버스에 유채, 회전 가능한 거울에 채색, 205.7 × 170.2 cm
All rights reserved. Courtesy of the Estate of James Rosenquist.
우주와 시간을 다룬 로젠퀴스트 말년의 작품들을 보며 전시장의 막바지에 이르면, 문득 이곳이 서울이 맞는지 잠시 잊게 된다. ‘혹시 이곳이 뉴욕이나 런던의 어느 전시장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2024년의 서울의 미술계가 맞이한 좋은 시절이 마음에 와닿는다. 예전이라면 일어나기 힘들었을 호사를 새삼 곱씹게 된달까. 세화미술관 입장에서 지금까지 시도치 않은 해외 작가의 대규모 회고전을 준비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테다. 그런 면에서 아쉬운 지점이 있다. 전시를 설명하는 월텍스트가 지나치게 겸손하다. 이 정도 전시를 준비한 용기라면 좀 더 자신감을 가져도 된다. 이는 시간을 쪼개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을 위해서도 필요한 부분이다. 주변에 전시를 추천하고픈 마음이 97.5% 정도는 되니 꺼내는 개인적인 푸념이기도 하다. 그동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숨어있던 거장의 전시가 제 발로 찾아오는 ‘호우지시절’의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그 아무도 정확히 모르니까 더욱더.
세화미술관 «제임스 로젠퀴스트: 유니버스» 전시 전경. 세화미술관 사진 제공. 사진: 이현석.
덧.
8월 31일 토요일 15시부터 1시간 동안 특별한 전시 연계 토크가 열립니다. 제임스 로젠퀴스트의 아내이자 현재 제임스 로젠퀴스트 재단 디렉터를 맡고 있는 미미 톰슨과 미술·디자인 이론가 겸 역사연구자로 활동하는 임근준의 대담인데요. 전시 티켓을 구입한 분은 무료로 참석할 수 있습니다. 현장 좌석 수가 제한돼 있어, 온라인으로 사전 접수 부탁드립니다. ‘특히’ 우리 박재용 님이 통역을 맡을 예정이오니 꼭 참고해 주시구요. 자세한 사항은 세화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세요! www.sehwamuseum.org
박재용(@publicly.jaeyong)은 기고가, 통·번역가, 큐레이터, 교육자이자 동료와 함께 동시대 예술 및 이론 서가 ‘서울리딩룸’을 운영한다.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의 멤버이며, ‘서촌코미디클럽’(@westvillagecomedyclub)을 진행한다. 2024년 8월 현재, ‘큐레이팅 스쿨 서울’(@curating.school.seoul) 개교를 준비 중이다. «비애티튜드»에 연재하는 ‘현대미술 설명서’에서 다루어 주었으면 하는 게 있다면 언제나 연락을 환영한다. seoulreadingroom.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