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에서 힙합이라는 장르의 영향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일까요? 불과 몇 년 사이에 주류 음악으로 자리 잡은 힙합을 바라보며 김도훈 작가는 묻습니다. “록이냐 힙합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십 대와 이십 대를 ‘록 키드’로 살아온 김도훈 작가는 힙합이 록을 대체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요? 더 자세한 생각은 아티클에서 한번 확인해보세요!
나는 힙합을 싫어했다. 이 문장을 쓰는 순간 나는 이미 누군가의 분노를 느끼고 있다. 한 장르를 싫다고 말해버리는 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영화평론가인 나는 결코 어떤 특정 장르가 싫다고 말하지 않는다. “저는 호러영화가 싫어요.” 이건 영화애호가로서는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평론가가 할 말은 아니다. 어쨌든 평론가란 세상의 모든 장르를 편견 없이 보아야 하는 직업이니까. 잠깐. 이 문장을 쓰면서 나는 갑자기 자신감을 얻었다. 나는 음악평론가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음악애호가다. 힙합을 싫어했다고 말하며 죄책감을 느낄 필요까지는 없다. 일단 안심이다.
내가 힙합을 좋아하지 않은 건 당연히 내 나이와 깊은 연관이 있다. 나는 1976년생이다. 1990년대에 십 대 후반과 이십 대를 보냈다는 이야기다. 음악 취향은 문학이나 영화보다 나이와 상관관계가 깊다. 사람들은 대개 십 대와 이십 대에 들었던 음악 취향을 영원히 가져가는 경향이 있다. 다들 한번 생각해보시라. 사십 대가 된 당신은 며칠 전부터 뉴진스NewJeans의 데뷔 EP를 반복적으로 스트리밍하고 있다. ‹Hype Boy›를 들으며 포인트 안무를 마음속으로 몰래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가 ‘무덤에 가져갈 음반 열 개를 선정하라’고 말한다면 당신의 리스트는 비교적 어린 시절 들었던 음반으로 채워질 것이 거의 틀림 없다. 적어도 아바ABBA를 빼고 뉴진스를 넣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건 다 내 이야기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십 대와 이십 대 시절 좀 심각한 ‘록 키드’였다는 사실이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80년~90년대까지 음악의 패권은 사실상 록이 잡고 있었다. 1980년대 초 나는 아하A-ha와 듀란듀란Duran Duran 같은 뉴웨이브 록밴드의 세례를 받으며 팝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1980년대 말이 되자 예민하고 건방지고 멋있는 척하는 모든 남자애가 으레 그러했듯 기타 속주와 푸들 머리와 가죽 바지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헤비메탈의 시대였다. 본 조비Bon Jovi는 섹시했다. 건스 앤 로지즈Guns N’ Roses는 새끈했다. 메가데스Megadeth는 장중했다. 무엇보다도 메탈리카Metallica는 신이었다. 나는 교복 셔츠 안에 메탈 밴드 티셔츠를 입고 소니 워크맨으로 헤비메탈을 들으며 비슷한 취향을 가진 친구들과 몰려 다녔다.
1990년대 중반이 되자 메탈의 시대는 끝나고 그런지의 시대가 열렸다. 나는 메탈 티셔츠를 벗고 커트 코베인Kurt Cobain과 에디 베더Eddie Vedder가 입던 체크 셔츠를 입었다. 그런지 시대는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시작으로 서서히 죽어갔다. 물론 새롭게 발견할 만한 록은 어디에나 있었다. 브릿팝의 시대가 열리자 나는 블러Blur와 펄프Pulp와 오아시스Oasis로 넘어갔다. 헤비메탈이든 그런지든 브릿팝이든 어쨌거나 그것은 록이었다. 사람들은 록 음악이 얼마나 상업적으로 변질했는지 언제나 한탄했다. 하지만 록은 어쨌거나 성난 아이의 마음속에서 벌어지는 세상과의 불화를 바깥으로 폭발시키는 장르라는 점에서 한결같이 젊은 음악이었다. 나는 새로운 젊은이가 태어나는 이상 록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어림없는 믿음이었다. 록의 시대는 갔다. 가버렸다. 영영 가버렸다. 이 글을 읽는 어떤 록 키드는 아직 록이 죽지 않았다고 영혼의 절규를 내뱉고 싶을 것이다. 역사는 잔인한 법이다. 2022년 지금 음원 차트를 뒤집어놓는 록밴드가 몇이나 있는지 한 번 떠올려보시라. 솔직히 나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록밴드가 콜드플레이Coldplay라는 사실이 조금 슬프다. 초창기 앨범을 여전히 사랑하는 내게 그들의 지난 몇몇 앨범은 추억에 대한 모독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BTS를 등에 업고 맥스 마틴Max Martin의 프로듀싱으로 내놓은 싱글 ‹My Universe›를 들으며 나는 마침내 록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아니, 록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성난 젊은이가 폭발하듯 세상에 대한 저항을 내뱉으며 수백만 장의 앨범을 팔던 시절은 갔다. 맙소사. 나는 록이라는 장르를 이야기하며 결국 ‘저항’이라는 고색창연한 단어를 내뱉고야 말았다. 맞다. 나는 꼰대다. 꼰대 중에서도 최악의 꼰대라고 할 수 있는 ‘록 꼰대’다. 어쩌겠는가. 사람은 자기가 어떤 꼰대인지 깨닫고 사는 게 그나마 바르게 사는 방법일 것이다.
새로운 록은 힙합이다. 적어도 시대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록 키드인 내가 힙합을 새로운 록으로 받아들이기에 꽤나 시간이 걸렸다는 말은 꼭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내가 처음 힙합이라는 음악을 듣게 된 건 Run DMC 같은 1980년대 힙합의 선구자 덕분은 아니었다. 사실상 흑인 커뮤니티를 벗어나 대중적으로 힙합을 받아들인 건 MC 해머Hammer나 (무려 백인 래퍼였던) 바닐라 아이스Vanilla Ice의 몇몇 히트곡 덕분이었다. 주류 음악에 대한 저항에서 탄생한 힙합은 한국에 하얗게 탈색한 팝으로 먼저 소개됐다. 힙합은 토끼 춤과 스크레칭으로 가득한 파티 음악이었다.
게다가 과거 우리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 왜 저항하는지 정치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인에게 흑인 커뮤니티란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에서 한인 상점을 파괴한 존재였다. 한국인에게 진지한 힙합이란 한국 상점 주인의 총격에 흑인 소녀가 사망한 사건을 다룬 아이스 큐브Ice Cube의 ‹Black Ice›(1991)였다. 힙합을 저항의 음악으로 만든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가 흑인 동네에서 비상 전화 911은 소용없다고 부르짖는 ‹911 Is A Joke›. 나는 이 노래를 듀란듀란이 커버한 버전으로 먼저 접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저 노래를 영국 백인 밴드가 커버한 건 조금 불편한 일이다. 어떤 노래는 다른 인종과 다른 성별이 노래하는 순간 맥락을 완벽하게 잃어버리곤 한다. 우리는 힙합의 맥락을 몰랐다. 그래서 여성의 엉덩이를 찬양하는 서 믹스 어 랏Sir Mix-a-Lot의 ‹Baby Got Back›이나, 여름에는 바비큐도 하고 연애도 하고 참 좋다고 노래하는 디제이 재지 제프DJ Jazzy Jeff & 프레시 프린스The Fresh Prince(지금은 윌 스미스Will Smith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의 ‹Summertime› 같은 노래를 힙합이라고 생각했다. 귤은 바다를 건너면 탱자가 되곤 한다.
그 이후 힙합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됐는지에 대해서 나는 음악 역사가가 아니므로 여기서 다 이야기할 처지가 못 된다. 힙합이 록을 대신하는 가장 젊은 음악이 됐다고 생각한 개인적인 순간을 꺼내 보는 편이 더 현명하다. 그건 2015년 영국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Glastonbury Festival’이 (지금은 예Ye로 개명한)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를 헤드라이너로 선정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은 록의 성전이다. 헤드라이너가 된다는 건 록의 신이 되었다는 의미다. 티렉스T-Rex,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뉴 오더New Order, 더 스미스the Smiths, 블러,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매닉 스트리트 프리처스Manic Street Preachers, 버브The Verve, 라디오헤드, 악틱 몽키즈Arctic Monkeys 그리고 카니예 웨스트라고?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아니지 잠깐.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는데 록 키드의 심장을 아직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내가 착각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때부터 나는 힙합의 역사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힙합이 록을 대신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순리였다. 21세기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는 시대다. 흑인 커뮤니티가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 계급주의를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한 건 힙합 뮤지션 덕분이었다. 래퍼는 자신이 태어난 게토의 일상적인 폭력과 이를 창발한 사회적 장벽과 부조리에 대해 직접 쓴 가사로 포효했다. 나는 그들의 삶에 무지했다. 대신 장발을 한 백인 로커들의 삶에 내 자아를 투영했다. 기타 속주가 부모님의 귀를 괴롭히는 것을 즐기면서 갱스터 랩의 절규를 듣기 괴로워했다. 그렇다고 내가 록 키드로서의 인생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힙합이 록을 대신한 시대를 따라가려고 나름대로 애를 쓰고 있다는 고백을 길게 하는 것이다. 록은 여전히 위대하다. 하지만 몇 년 전 역사상 최고의 명곡 리스트를 업데이트하면서 록 명곡을 힙합 명곡으로 대거 대체한 «롤링 스톤Rolling Stone»의 ‘백인 평론가’ 마음을 이제는 충분히 이해한다.
물론 당신은 여기서 새로운 반문을 내놓을 수도 있다.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를 빼면 2022년 지금 도대체 누가 ‘저항’이라는 힙합의 록 정신을 이어가고 있냐고. 카니예 웨스트가 전 부인의 새 남자친구를 욕하는 트랙이나 내놓고 있으며, 드레이크Drake가 말랑말랑한 사랑 노래를 수백만 장 팔아먹고 있는 시대에는 이찬혁의 말처럼 ‘어느새 힙합은 안 멋진’ 것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장르가 꼭 저항의 상징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건 부차적이다. 힙합도 록도 어차피 파티 음악이었다. 위대한 비스티 보이즈Beastie Boys가 노래했듯이 우리는 파티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 저항은 거시적인 동시에 미시적인 것이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쓰며 내가 좋아하는 여성 힙합 그룹 솔트 앤 페파Salt-N-Pepa의 ‹None of Your Business›를 들을 생각이었다. 지금 나는 뉴진스의 EP를 듣고 있다. 왜냐고? 그들의 멋진 노래 ‹Hype Boy›도 힙합이 없었다면 애초에 존재할 수 없었을 곡이라는 변명을 내놓기 위해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완벽한 마감의 사운드트랙이라고 확신한다.
Writer
김도훈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이다. 영화주간지 «씨네21», 남성지 «GEEK»과 «허프포스트코리아»에서 일했다.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를 썼다. @closer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