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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가장 현실적인 환상을 보여주는 법

Writer: 김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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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김채리 작가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직조, 회화, 판화, 디지털 사진 콜라주, 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는 작가입니다. 길가에서 조우하는 기상천외한 버내큘러 디자인, 자기 전 부유하는 상상, 일상의 기억 등에서 여러 아이디어를 얻는답니다. 요즘은 디지털 콜라주를 실크와 시폰 등 실물에 프린팅하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그는 슬럼프가 작가에겐 오히려 황금기라고 생각해요. 눈은 높아졌지만, 손이 따라오지 않아서 생기는 만큼 잘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다음 단계로 훌쩍 넘어가는 치트키나 마찬가지거든요. 사람들이 가끔 틀에 갇혔다고 말할 때마다, 그 틀은 자신이 만든 환상이며 “나는 내 틀이 좋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김채리 작가. 시각적인 매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공감하는 그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살펴보세요.
8. Nectar, 2023

‹Nectar›, 2023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김채리입니다. 드로잉을 기반으로 직조, 회화, 판화 및 디지털 사진 콜라주,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실험하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수집과 기록을 즐기고, 떠돌아다니며 잠시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눈에 띄는 현상을 관찰합니다. 다양한 장르의 친구들과 함께 부업으로 모두가 행복하고 함께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파티를 기획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미술 시간 첫 수업이 연필소묘였어요. 그때 ‹트랜스포머›를 본 직후라 메간 폭스Megan Fox를 그렸는데요. 미술 선생님이 “너는 미술 해야겠다” 하시면서 방과 후에 입시 미술학원으로 데리고 가셨어요. 그때 미술을 시작하면서 출구가 없어진 것 같아요. 미대에 진학한 이후로도 그냥 작업실이 제일 편했거든요. 먹고 자고 작업하는 게 재밌었어요. 제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로 자리 잡았고요.

12. 깊은 시선 La mirada profunda, 2020

‹깊은 시선›, 2020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작업실은 지하철 6호선 효창공원앞역 근처의 용산전자상가 구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옆방에는 타투이스트 언니가 있는데요. 언니와 저 모두 작업 때문에 해외를 왔다 갔다 하는 터라, 다양한 친구들이 게스트로 작업실을 쓰러 와요. 내년 2월부터 5월까지 포르투갈의 레지던시 입주가 예정되어 있는데요. 빈 작업실에는 기하학적 만다라를 그리는 친구가 머물기로 했어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사람들을 만날 때 가장 큰 영감을 얻어요. 만남은 결국 내 세계와 그 사람의 세계를 공유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책과 영화, 음악, 서로의 가치관과 생각을 나눌 때, 새로운 영감이 자주 떠올라요. 특히 늦은 새벽, 작업실에서 친구들과 술 마시며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눌 때가 진짜 노다지입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면 보통 기억이 안 나서 중간중간 꼭 메모를 해두는 편이죠.

14. _Nectar_, 무대륙, 2024

«Nectar», 무대륙, 2024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저는 길에서 조우하는 맥락 없는 영어 간판, 뜬금없이 유대교 심볼을 걸어놓은 가라오케, 유흥주점의 옥외 에어 간판 속 여성 도우미 사진 등 기상천외하고 자생적인 버내큘러 디자인에 주목해요. 우리 삶에서 무의식적으로 마주치는 상징들, 자기 전 부유하는 생각들 혹은 꿈, 일상의 기억을 다양한 방법으로 드로잉하며 공책이나 드로잉 북에 수집해 두어요. 디지털 콜라주 같은 작업은 주로 인터넷에서 전쟁, 빈곤, 기아, 폭력을 반복적으로 노출하는 전 세계 뉴스를 스크랩하고, 심각한 주제의 기사 우측 하단에 뜨는 아이러니한 팝업 광고도 함께 캡처해요. 이후 포토샵에서 여러 가지 효과를 입히고, 화면 위에 이리저리 구성하는 방법으로 작업합니다.

10. Because of you, _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_, 레인보우큐브, 2024

‹Because of you›, «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 레인보우큐브, 2024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디지털 콜라주를 실크와 시폰에 디지털 프린팅해서 실물 패브릭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이 위에 새틴 천과 자투리 십자수들을 이어 붙일 예정이에요. 이 외에도 예전부터 온라인으로 종종 소통하던 런던 기반의 큐레이터 마틴 마요르가Martin Mayorga가 만드는 «80-percent Magazine» 창간호에 들어갈 디지털 콜라주를 작업했습니다. 매거진의 첫 번째 주제는 ‘도플갱어Doppelgänger’였는데요. 저는 AI 이미지 생성기에 두 가지 상반된 이념적 프롬프트(명령어: Capitalism Utopia, North Korea)를 입력하고, 출력된 이미지를 이용한 디지털 콜라주를 제출했습니다. 이번 디지털 콜라주도 언젠가 실물로 구현하고 싶어요. 요새 북한이 자꾸 오물 풍선을 살포하던데, 이를 활용하는 작업도 재밌을 것 같아요.

18. Dopplegang

‹Doppelgänger›

18-1. 80PM-Dopplegang-Chaeri Kim_페이지_37

‹Doppelgänger›, «80-percent Magazine», 2024

최근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디지털 사진을 콜라주한 작업을 실제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매체에 출력하는 기법을 좋아해요. 첫 시도는 지난 2022년 성수동에 있는 미러드 스피어 갤러리Mirrored Sphere Gallery에서 선보인 ‹Black Rose Dragon›이었어요. 스테인리스 스틸 판에 디지털 프린팅으로 실사출력하고 페인트 시너로 드로잉해 벗겨내는 방식으로 작업했었죠, 이번에는 패브릭 소재에 프린팅하면 어떤 질감의 작업이 완성될지 연구해 보고 싶었습니다.

11. Black rose dragon – Very fragile affinity, _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_, 레인보우큐브, 2024

‹Black rose dragon – Very fragile affinity›, «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 레인보우큐브, 2024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이전부터 실물로 완성해 보고 싶었던 작업이었는데, 생각보다 스크린에서 보이는 색감이 실크 새틴과 트윌에 만족스럽게 출력되어 기뻤어요. 패브릭은 다른 매체에 비해 아직 손에 많이 익지 않아서, 기술적으로 좀 더 발전하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16. Witty Knitty Sloppy Kitty, _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_, 레인보우큐브, 2024

‹Witty Knitty Sloppy Kitty›, «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 레인보우큐브, 2024

9. Incy Wincy Spider, _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_, 레인보우큐브, 2024

‹Incy Wincy Spider›, «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 레인보우큐브, 2024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이번 ‘프리즈 서울’ 기간 동안 전시하려고 방한했다 알게 된 스위스 친구 덕분에 NFT에 입문했어요. 가상 현실은 실체가 잡히지 않아 여전히 개인적으로 어렵고 불신하는 부분도 있지만, 어차피 모든 게 가벼워진 세상에서 유연한 태도로 가볍게 접근하며 실험해 보려고 합니다. 디지털 형태의 판화로 접근하면 재밌는 것 같아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제 드로잉 연작 중 ‹트리니티 드로잉 시리즈Trinity drawing series›가 있어요. 트라우마, 욕망, 사랑, 혹은 가슴 아픈 개인적인 기억, 일상 속 지나가는 순간을 그래프용지에 그린 다이어리식 드로잉 작업입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트리니티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을 뜻해요.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부와 성자, 성령이라는 세 위격의 관계를 인간 영혼(anima)의 속성인 기억(mens), 인식(notitia), 사랑(amor)을 통해 이해하려고 했어요. “신을 이해한다면, 그분은 신이 아니다(Si enim comprehendis, non est deus)”란 말이 있듯이, 세상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사람들은 기억하고 인식하고 사랑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저는 무교인데 종교학에 관심이 많아요. 더불어, ‹매트릭스›에 나오는 인물, 트리니티의 팬입니다. “Welcome to the Real World.”

01. Trinity drawing series_ proto 00, 2022
03. Trinity drawing series 01, 2023

(좌) ‹Trinity drawing series–proto 00›, 2022

(우) ‹Trinity drawing series 01›, 2023

(상) ‹Trinity drawing series–proto 00›, 2022

(하) ‹Trinity drawing series 01›, 2023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슬럼프가 찾아오는 이유는 눈은 높아졌으나 손이 따라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고 느끼면서 침체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저는 이 시기가 사실 황금기라고 여겨요. 동굴에 들어가 ‘내가 해내고 싶은 것’보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터널 끝으로 나와서 내리쬐는 햇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거든요. 그래서 곧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치트키 상태라고 생각해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내년 3월 서울의 집 계약이 끝나고 2월부터 5월까지 포르투갈에 레지던시 계획이 잡혀 있어서 그 이후의 거처에 대해서 고민 중이에요. 서울을 기반 삼아 돌아다니고 싶기 때문에, 비록 서울에 거주하지 않더라도 작업실 계약을 연장해서 서울에 장소를 유지하는 아이디어를 고려하고 있어요.

11-2. Incy Wincy Spider, _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_, 레인보우큐브, 2024

‹Incy Wincy Spider›, «A Spider Trapped in a Butterfly Trapped in a Flower», 레인보우큐브, 2024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는 것 같아요. 이를 어떻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각 언어로 보여줄지 연구하는 건 기본이고요. 결국 시각예술을 하는 사람으로서 누군가 제 세계에 관심을 두고, 메시지를 듣게 하려면 일단 시각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여유를 가지고 호흡을 길게 가는 게 작업 활동을 지속하는 저만의 팁입니다. 흥미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가끔 권태기가 오면 다른 장르의 예술이나 책, 영화를 보러 가고 산책하러 나가는 등 취미를 바꾸는 시도도 좋더라구요.

6. Love, Light, Gravity, 2023

‹Love, Light, Gravity›, 2023

7. Love, Light, Gravity, 2023

‹Love, Light, Gravity›, 2023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가장 현실적인 환상을 보여주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제가 예술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는 표현하는 데 있어서 예술이 가장 자유로운 언어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가끔 틀에 갇혔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런데 정작 그 틀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 싶거든요. 저는 제 틀이 좋습니다. 트라우마와 여러 감정의 기억이 중첩됐지만, 그 속에는 믿음과 사랑, 기쁨의 운율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함께 보셨으면 좋겠어요.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검은 고양이(혹은 턱시도 고양이), 강아지, 거북이 그리고 화초를 키우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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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ctar», 무대륙, 2024

Artist

김채리(@chaerik1m)는 서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시각 예술가다. 그는 꿈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에서 발현하는 존재를 가시화한다. 불안과 위로, 고통과 행복 같은 원초적 감정은 화면 속에서 우발적으로 뒤섞여 등장한다. 불규칙에서 찾아낸 규칙의 형태는 목탄 드로잉에서부터 디지털 콜라주, 회화, 프린팅, 직조, 터프팅 등 여러 물리적 매체로 확장하고 변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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