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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Portfolio

날카롭지만 무디고, 무디지만 날카로운

Writer: 한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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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의 흥미로운 작업을 파고듭니다

한상아 작가는 광목천에 먹으로 작업합니다. 서양화에 쓰이는 인위적인 재료보다 자연에 가까운 동양화 재료의 매력에 홀려 동양화의 길로 들어섰는데요. 뾰족한 붓끝에서 둥글게 번지며 날카롭지만 무디고, 무디지만 날카롭게 표현되는 먹과 연애하듯, 씨름하듯 작업하고 있답니다. 그는 한 사람의 작가로서, 여성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삶의 여러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얻은 인간의 본능, 본성, 감정, 감각에 대한 영감을 차곡차곡 모아 작업으로 풀어내요. 마음속 이미지를 광목천에 시각화하고, 이를 잘라내어 부피감을 부여할 때 작업 스스로 서 있는 감각이 생기는 마법 같은 순간을 사랑하죠. 그는 요즘 모성, 모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어요. 두 아이의 출산과 육아를 겪은 시기와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가 겹치다 보니 어머니와 작가로서의 삶을 병행하면서 고민이 많아진 건데요. 진정한 여성적 혁신은 모성, 여성적 창조 간의 연결고리가 잘 융화할 때 이루어진다는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이야기에 공감하며 이를 작업에 풀어내는 방식을 모색 중이랍니다. 두려움 없이 작업하고, 또 작업할 수 있는 미래를 꿈꾸는 한상아 작가의 이야기를 아티클에서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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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gment 4›, 2024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광목천에 먹으로 작업하는 한상아입니다. 작가, 여성, 그리고 개인으로서 삶의 여러 변화를 겪는 과정에서 얻은 감성적인 기억을 파편적, 비유적, 상징적 조형 언어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말하고자 하는 바에 따라 입체적 평면 작업과 평면적 입체 작업으로 나눠서 풀어내고 있습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이를 모으는 걸 굉장히 좋아했어요. 그런데 서양화에 쓰는 재료는 표현 면에서 무척 재미있는 데 비해 특유의 인위적인 향이 불편하더라고요. 그러다 동양화에 필요한 재료가 풍기는 향, 벼루의 돌, 붓의 나무 등 자연적인 질감에 현혹되듯 자연스럽게 동양화과를 가게 됐어요. 대학생 때는 과 안팎에서 다양한 수업을 들으며 먹의 특별함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었고요. 그때부터 먹에 관해 공부하고 연구하면서 먹으로만 작업을 이어왔는데요.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하면서 동시에 터프한 재료라서 여전히 어렵고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게 매력 같아요. 그렇게 먹과 연애하듯 씨름하듯 작업하고 지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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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파동 1(unfamiliar wave 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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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탑(空塔) 15›, 2023

작업 공간이 궁금해요.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후로는 줄곧 집에서 작업을 해왔어요. ‘집=작업실’은 아이들을 보살피면서 문 하나를 두고 작업할 수 있다는 게 큰 장점이었는데요. 아이들이 커가면서 장점이었던 문이 열리고 침범당할까 봐 불안하고 걱정되는 마음이 커가는 와중에 작년 금천예술공장에 입주해 작업하게 되었어요. 처음으로 집을 벗어난 공간에서 작업하니 물리적, 감정적 해방감이 컸던 시기였죠. 집과 작업실 간에 거리가 생기니 삶의 균형이 좀 더 잘 맞는 느낌이 들었어요. 올해에는 이런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개인 작업실을 구했답니다. 굉장히 평범하지만, 저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공간이에요. 제 작업실만의 특별한 구석은 없는 편이에요. 사용하는 재료가 먹과 벼루, 접시, 붓 등 심플하기도 하고, 테이블 작업이 많지 않아서 바닥에 카펫을 깔고 그 위에서 그림을 그리거든요. 카펫 위에 방석을 두고 앉아서 바느질 작업을 진행하고요. 그래서인지 가끔 방문하는 분들이 다른 곳보다 휑하다고 얘기하곤 해요.

작가님은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평범한 일상에서 차곡차곡 영감을 쌓아가는 편이에요. 특별한 이벤트가 주는 자극과 영감이 작업으로 이어질 때도 있지만, 그런 상황 또한 이전부터 켜켜이 쌓아온 경우가 많더라고요. 특히 제 작업은 인간의 본능, 본성, 감정,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하루하루 평범한 날에서 영감을 받는 편입니다. 영감 또한 뾰족하게 꽂히기보단 먹이 스미듯 은은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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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탑(小空塔)›, 2022, «뾰족한 용기», 파운드리서울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책이나 어떤 글에서 유독 와닿는 단어와 문장, 전시에서 느낀 어떤 잔상, 출퇴근길에 본 이미지 등 인상적인 조각을 물리적으로, 마음으로 수집해요. 여러 종류의 광목천을 쓰고 밑 작업 또한 이미지와 표현 방법에 맞춰 바꾸기 때문에 수집한 이미지를 한번 정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게 정리한 결과물을 이야기보따리 풀어내듯 광목천에 옮겨 그려요. 이미지는 곧 차곡차곡 오려지는 과정을 거치는데요. 어떤 건 입체적 평면 작업, 어떤 건 평면적 입체 작업이 되는데, 그리기 이전에 계획적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먹번짐 등 작업을 진행하며 즉흥적으로 결정하기도 해요. 마음속 이미지를 시각화하고, 이에 부피감을 부여하며 스스로 서 있는 감각이 생기는 과정이 너무 재미있어서 제가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동력으로 작용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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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온기», 2022, 파운드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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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용기›, 2022, «뾰족한 용기», OCI미술관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요즘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신체론에 빠져있는데요. ‘자신의 경계 안에서 타자성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는 역동적인 실천 장소’로서 모성을 해석한다고 이해했어요. 제 작업에서도 모성, 신체, 모체를 자주 다루는데, 자기와 외부 환경을 잇고 소통하는 영역으로서 신체의 가능성에 주목해 보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인간의 삶과 균형을 기반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모성, 모체를 인식하고, 이를 작업으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밀라노 푸마갈리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작업을 소개하고 싶어요. ‹공탑(空塔)› 연작의 일부인데요. 요즘 꽃과 인체를 결합한 존재를 작업에 많이 등장시키고 있어요. 모성의 따뜻함과 자애로움, 동시에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공포스러운 모성의 복합성과 양가성을 담아낸 모체를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black figurine 2›는 섹슈얼한 모습도 있지만 아이를 낳는 자세라는 점에서 제가 겪은 두 번의 출산 경험을 의미하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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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공탑(空塔) 16›, ‹공탑(空塔) 17›, 2024

(우) ‹black figurine 2›, 2024

(상) ‹공탑(空塔) 16, 17›, 2024

(하) ‹black figurine 2›, 2024

작업을 통해 작가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제 작업은 우리를 불안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요. 누구나 꿈꾸지만 결국 불가능한 삶의 균형을 잡아보려는 노력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공탑(空塔)› 연작을 만들고 있고요. 더불어 ‘진정한 여성적 혁신은 모성, 여성적 창조, 그리고 그들 간의 연결 고리가 잘 융화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다’라는 크리스테바의 이야기가 매우 인상적이라, 작업에서 이를 조금이라도 잘 풀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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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탑(空塔) 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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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탑(空塔) 21›, 2024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하는 부분과 불만족하는 부분이 궁금합니다.

결과적으로 작품을 완성하면 시각적으로 아름다운지 여부를 주목하게 돼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빠져서 시각 예술에서 우선되는 아름다움을 놓친 건 아닌지 걱정이 들거든요. 이번에도 그런 부분에서는 만족하면서도 동시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존재하죠. 어떤 형태를 벗어나 플렉서블한 천으로 좀 더 유동적인 형태를 만들지 못한 아쉬움도 있어요.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매우 단순하고 반복적으로, 어쩌면 단조롭게 일상을 보냅니다. 일주일 중 강의가 있는 하루를 제외하고 매일 아침 작업실에 출근해서 그날의 할 일을 적고 머릿속을 정리하며 일과를 시작해요. 오후 4시에 작업을 마치고 퇴근한 후로는 당일 작업이 마음에 들었든, 안 들었든 주 양육자로서 아이들을 돌보고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요. 체력이 허락하면 미뤄둔 문서일을 밤에 처리하기도 합니다. 친구, 친한 동료가 한정적인 편이라 아주 가끔 모임이나 전시 오프닝 참석 등의 외부 활동을 하고요. 요즘에는 건강을 위해 꾸준하게 운동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작년부터 거의 매일 운전하다 보니, 요즘은 운전하는 시간을 즐기고 있어요. 출발지와 목적지가 정해져 있고 분명한 길이 있다는 점, 그 길을 제가 알고 있다는 감각이 무척이나 좋더라고요. 잘 풀리지 않는 작업을 붙들고 있을 때의 스트레스를 드라이빙으로 해소할 수 있어서 출퇴근길이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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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탑(空塔) 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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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탑(空塔) 9›, 2022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출산과 육아를 겪은 시기와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가 겹치다 보니, 초창기 작업의 시야와 방향이 굉장히 내밀하고 한정적이었어요.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 자라며 활동반경이 넓어진 만큼 저 또한 더욱더 넓은 시야와 사고를 시도하고 있는데요. 그러다 보니 작업 방향에 대한 고민이 많아지네요. 앞서 말한 신체 담론에 최근 관심이 깊어지면서 어떻게 작업으로 풀어낼 수 있을지 연구와 실행을 병행하고 있어요.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서 어떻게 묻어나나요?

작업은 가장 나다운 모습과 꾸밈없는 상태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향적인 성격 때문에 가끔 ‘나를 너무 드러냈나?’라는 걱정과 불안감이 들면서 작업을 완성하고도 혼자 부끄러움을 느끼는 순간이 많은데요. 요즘은 그런 마음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어요. 무엇을 하든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게 삶의 태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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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Flame», 2024, Galleria Fumagalli © Lucrezia Roda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작업에 할애하고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늘 한정적이라, 슬럼프는 사치라는 생각으로 작업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태풍이 접근하면 얌전히 지나가길 바라는 염원으로 고운 이름을 지어줬던 걸 혹시 기억하시나요? 저도 어쩌면 슬럼프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애써 그렇게 생각하는 걸지도 몰라요.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다행히 지금은 밀라노에서 진행 중인 개인전에 출품하느라 공간에서 작업이 많이 나간 상태인데요. 제 작업 사이즈가 작지 않고 부피감도 꽤 있는 편이라, 늘 공간을 많이 차지해요. 당장 전시를 앞두지 않을 때는 쌓여가는 작업을 보며 고민이 자주 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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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ssenger 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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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動心)›,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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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s 1›, 2024

작가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간혹 강박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는데, 작업을 생활화하며 매일 작업하는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작가분도 마찬가지겠지만, 제 작업은 특히나 과정 전반에 걸쳐 몸을 많이 써야 해요. 그래서 작업에 익숙한 상태로 몸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천 작업이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분이 있던데, 꽤나 무거워요. 요가를 시작할 때 몸을 데우는 시간을 보내듯, 작업 전 몸을 데우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먹을 갈거나 천을 편편히 다리면서 작업을 시작하는 루틴을 지키려고 노력해요.

좋아하는 것을 지속하려는 다른 창작자에게 건네고 싶은 노하우나 팁을 공유해 주신다면요?

작업하면서 늘 느끼지만, 제가 매일 행하는 작업이라는 행위는 작업의 속도 및 물리적 진행과는 직결되지 않아요. 그런데도 작업을 하다 보면 어김없이 결국 ‘내가 제자리걸음을 친 게 아니었구나’ 깨닫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묵묵히 내 일에 집중하기. 이걸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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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탑(空塔) 3›, ‹공탑(空塔) 4›, 2022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나라는 시각 언어를 가진 사람. 예전에는 제가 만드는 작업을 많은 사람이 보고 또 좋아해 주길 바랐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그저 저만의 시각 언어를 가진 작가로 인정받는다면 무척이나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두려움 없이 작업하고, 또 작업할 수 있는 미래.

Artist

한상아는 광목천에 닿는 뾰족한 붓끝에서 먹이 둥글게 번지듯, 날카롭지만 무디고, 무디지만 날카로운 마음과 존재에 대하여 촉각적 평면 및 입체 작업으로 이야기하는 작가다. 파운드리 서울, OCI미술관, 송은아트큐브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서울대학교미술관, 송은아트스페이스,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경기도미술관 등에서 열린 다양한 그룹전에 참여했다. 현재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한 푸마갈리 갤러리(Galleria Fumagalli)에서 개인전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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