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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수채화, 좋아하세요?: «수채: 물을 그리다»

Writer: 이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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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혹시 수채화 좋아하시나요? 여러 사람을 눈물 콧물 바다로 만든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를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말해보면, 사랑꾼 양관식(박해준 분)이 ‘마사이족 신발’을 신었을 때, 이를 부러워하며 자신도 신어 보는 부상길(최대훈 분)의 모습을 부인과 딸이 분수 너머로 바라보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주인공 오애순의 젊은 시절과 딸 양금명 역을 함께 소화한 아이유의 내레이션이 흐르는데요. “세월은 눈앞을 수채화로 만들었다. 미움도 흐릿하게, 사람도 축축하게.” 이 말을 듣는 순간, 수채화의 매력을 이토록 정확하게 묘사하다니, 탄성이 나왔어요. 각박한 세상을 촉촉하게 물들이는 수채화의 감성이 궁금하시다면,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 들러보시는 건 어떠신가요. 지금 «MMCA 소장품 기획전 – 수채: 물을 그리다»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죠. “수채화…?”라며 의아해하실 분들을 위해 문화 전문 기자 이소영 님이 전시 리뷰를 작성했습니다. BE(ATTITUDE) 웹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손일봉, ‹계림›, 1961, 종이에 수채 물감, 34 × 24 cm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수채(水彩)를 현대미술의 장르 중 하나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초보자의 전유물이자 작가의 습작, 드로잉, 혹은 유화의 사전 단계인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서구 미술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도입되던 1920년대만 하더라도, 수채야말로 가장 최첨단의 미술 장르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미술평론가 김영동은 에세이 「국내 수채화의 도입 과정: 대구 화단의 경우」에서, 1923년 대구에서 서양화를 포함해 처음으로 연 전람회였던 «대구 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서양화 작품 모두를 수채화로 추측한다.

당시 대구에는 일본 유학파가 활동하면서 일본 화가와 교류했기에 가장 먼저 수채화가 발전했다. 아직 유화가 본격적으로 상륙하지 않았던 시기였고, 지필묵(紙筆墨)의 전통이 물로 그리는 수채와 크게 다르지 않은 덕분에 미술가 또한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으리라. 서양화의 원근법, 양감 구현, 구성을 참고하면 특별한 교육 과정을 이수하지 않아도 동양화와 비슷하게 익힐 수 있으니, 당시 첨단의 위상을 가진 미술 장르로 소개됐을 터. 이런 역사를 가진 수채가 지금은 가벼운 취급을 받는 것 같아 아쉬웠던 마당에, 수채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의 전시는 반갑고 귀한 기회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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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정재임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가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 개관 이래 처음으로 열리는 수채화 관련 단독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 깊다고 말한다. 그래서 회화, 조각, 설치, 사진, 미디어처럼 단독적인 지위를 점하지 못하고 드로잉의 일부로만 여겨지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수채의 역사와 독창성을 살피는 데 중점을 두었다고. 그가 생각하는 수채의 본질은 무엇일까? 바로 그림(畵), 순수(潔), 맑음(淸)이다.

“수채화는 드로잉이 아니라 엄연한 그림이에요. 붓에 의한 농담의 변화로 형상을 그리죠. 수채에서 중요한 빛은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무(無)의 자리에 위치합니다. 게다가 수채의 선은 섬세하고 단순하답니다. 욕심을 더할수록 지저분해지고, 덜 섞인 그대로 그으면 자연스럽게 섞여 환상적인 효과를 만들어 내요. 더불어 수채는 드러날 만큼 투명합니다. 겹쳐 칠하면 견고해지고, 보색의 배치를 통해 생동감을 발산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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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전경

유화와는 달리 한번 획을 그으면 수정할 수 없는 수채의 대쪽 같은 특성은 과거 문인화의 전통과도 맞닿아 있다. 문인화는 조선시대 수신의 도구로서 심신의 함양과 기술의 정진을 상징하지 않았던가. 그런 의미에서 수채가 전통 한국화로부터 이어온 맑음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는 국립현대미술관 김성희 관장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오랫동안 기본적인 재료와 기법으로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온 만큼, 작가 34명, 작품 97점에 이르는 이번 청주관 전시를 통해 수채가 재평가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전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1부의 주제는 ‘색의 발현’이다. 구본웅, 이인성, 이중섭, 장욱진 등 우리나라 서양화를 개척한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즐겁다. 이중섭은 동양화 기법을 이용해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붓질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고, 장욱진은 문인화와 민화에 등장하는 소재를 동화처럼 사랑스럽게 재구성했다. 초기 수채화는 마치 프랑스의 인상파처럼 야외에 직접 나가 풍경을 담아오는 사생(寫生)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우리나라 최초의 수채화 전시를 열었던 서동진이 대구의 발달한 시가지 풍경을 남긴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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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물놀이하는 아이들›, 1941, 종이에 펜, 수채 물감, 14 × 9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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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진, ‹역구내›, 1929, 종이에 수채 물감, 33.8 × 45.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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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출발하는 기관차›, 1957, 종이에 수채 물감, 76 × 109 cm

특히 수채를 이용해 후기 인상주의 표현을 시도한 이인성의 작품은 아직도 촉촉한 감동을 준다. 그는 1928년 개벽사가 주최한 «세계아동예술전람회»에 16세의 나이로 특상을 수상하며 대구 출신 ‘천재 화가’의 전설을 시작한 인물이다. 이후 매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채화를 출품해 입상했고,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주요 화단이던 일본수채화회 소속으로 «일본수채화전»(1935)에서 최고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번 전시작에서 묘사한 건물은 대구 최초의 성당이자 영남 지방 최초의 고딕식 성당으로 유명한 대구 계산동성당이다. 지금도 대구 중구에 가면 그림과 똑같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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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계산동 성당›, 1930년대, 종이에 수채 물감, 34.5 × 44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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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성, ‹원두막이 있는 풍경›, 1930~40년대 추정, 종이에 수채 물감, 28 × 36.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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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전경

2부의 주제는 ‘환상적 서사’로, 유화 중심의 장르로 이동하는 현대 미술 신에서 도전을 지속하던 강요배, 류인, 문신, 배동신, 이두식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표현주의, 상징주의, 초현실주의 같은 미술 사조와 비슷한 특징을 보이면서도 수채의 투명하고 번지는 형질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류인과 문신의 수채는 그들의 조각을 평면으로 옮긴 듯한 강렬한 색채와 라인이 매혹적이다. 강요배의 ‹꽃과 무기›(1977)는 대학생 때 그린 작품이라 더욱 흥미롭다. 무기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형상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옆으로 형형색색의 꽃들이 떨어져 내리는데, 마치 노란 저고리와 붉은 치마의 조합을 연상시킨다. 서양에서 유래한 수채로 전통적인 민중의 삶을 그려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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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요배, ‹꽃과 무기›, 1977, 종이에 수채 물감, 색연필, 118 × 77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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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하, ‹바다의 환희 I›, 1977, 종이에 색연필, 파스텔, 수채 물감, 45.5 × 3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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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호, ‹의식의 계단›, 1975, 종이에 수채 물감, 39.5 × 51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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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신, ‹누드›, 1983, 종이에 수채 물감, 연필, 54.5 × 74.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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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 ‹무제›, 1996, 종이에 수채 물감, 연필, 104 × 86.5 cm

전시를 마무리하는 3부의 주제는 ‘실험적 추상’이다. 1970년대 등장한 단색화 경향의 작품을 다루는데, 곽인식, 김기린, 김정자, 박서보 등 현대 한국 미술 거장의 이름이 이어진다. 이우환에게 영향을 준 작가로 알려진 곽인식은 수채와 한지 특유의 투명하게 비치는 성질을 이용해 겹친 꽃잎을 표현했고, 박서보는 검은 그림을 통해 물질과 물질의 만남을 표면에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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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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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수아, ‹작품›, 1971, 종이에 수채 물감, 유화 물감, 60 × 6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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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인식, ‹무제›, 1980, 캔버스, 종이에 수채 물감, 166 × 100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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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자, ‹수평 45›, 1984, 한지에 수채 물감, 64 × 87.5 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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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묘법 No.355-86›, 1986, 캔버스, 종이에 수채 물감, 194 × 300 cm

이번 전시의 또 다른 즐거움은 유럽에서 활동하는 윤종숙의 벽화 신작과 ‘보이는 수장고’에 설치한 전현선의 작품이다. 윤종숙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제작 지원으로 자신의 고향, 충남 아산의 풍경을 전시장 벽면에 표현했다. 밑그림 없이 순간적으로 그려낸 작품은 추상이자 구상으로 다가오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풍경이라 칭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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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숙, ‹아산›, 2025, 벽화, 가변 크기, 국립현대미술관 제작 지원

전현선의 ‹나란히 걷는 낮과 밤›(2017-2018)은 한 점당 세로 112cm, 가로 145.5cm에 달하는 캔버스 15점을 하나로 연결해서 보기만 해도 시원하다.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초록색 기운이 상쾌한 기분을 북돋는다. 인터넷에서 수집한 이미지를 추상 조형 요소와 더불어 그린 작품인데, 전반적으로 불투명한 기법을 사용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물감 효과를 결합시켰다. 독일의 명문 화랑 에스더쉬퍼Esther Schipper의 첫 한국인 전속 작가인 그는 올 6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세계 최고의 아트 페어, ‘아트 바젤Art Basel’에서 대형 작품을 전시하는 ‘언리미티드Unlimited’ 섹션에 참가해 K-아트의 힘을 뽐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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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선, ‹나란히 걷는 낮과 밤›, 2017-2018, 캔버스에 수채 물감, 112 × 145.5 cm * 15

«MMCA 소장품 기획전 – 수채: 물을 그리다» 전시는 오는 9월 7일까지 계속된다. 날짜도 넉넉하니 날씨 좋은 날을 택해 나들이 삼아 가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은 보이는 수장고와 함께 ‘개방 수장고’로 유명하다. 수채의 세계에 빠지면서 청주관의 명물인 개방 수장고, 3층에서 열리는 미술은행 상설 전시도 함께 관람한다면, 하루 순삭 미술 여행으로 충분해 보인다.

Artist

이소영(@soyoung_lee_art)은 문화 전문 기자다. 멤버십 매거진 «스타일 H» «더 갤러리아»에서 기자로 일했고, 최근에는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서울, 그 카페 좋더라』 『사진 미술에 중독되다』 『전통혼례』의 저자이며, 『노래하지 않는 피아노』 『와인과 사람』 『미국에서 서바이벌하기』 등을 기획·편집했다.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의 개관 콘텐츠를 총괄했고, CJ ENM과 함께 SM엔터테인먼트 소속 모든 아티스트의 시즌 그리팅 굿즈를 만들었다. 서울시가 발간한 『서울한류여행안내서 Person:able SEOUL』을 제작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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