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리 디자이너는 그래픽 스튜디오 슈퍼샐러드스터프SUPERSALADSTUFF를 운영해요. 주로 미술, 음악, 공연, 출판 분야에서 활동하며 클라이언트 작업과 개인 작업을 병행하는데요. 작은 흥미라도 생기면 궁금한 게 굉장히 많아져서 여러 가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관심이 사방에 뻗어 있어요. 그야말로 호기심 천국인데요. 이렇게 파고들다 보면 사소하고 당연해 보이던 것들이 제 나름의 분류와 정리를 거쳐 작업 속 선택을 이끌어낸답니다. 지속적이고 깊은 호기심과 배우는 자세, 자신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고, 자유롭고 재밌고 새로운 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게 꿈인, 이 창작자가 작업하는 법이 궁금하시다면! 아티클에서 조우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Graeae: A Stationed Idea)›, 2020, ‘100 Films 100 Posters’
자기소개를 부탁드릴게요.
안녕하세요. 스튜디오 ‘슈퍼샐러드스터프SUPERSALADSTUFF’에서 디자인과 출판 작업을 하는 정해리입니다. 산책과 농담을 좋아합니다.
지금의 창작자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어렸을 때나 학창 시절에는 미술이나 피아노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만큼 수학과 과학에도 흥미가 있어서 대학교에서는 화학공학을 전공했어요. 졸업 후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지 떠올리며 학교에 다시 들어가서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공부했습니다. 그 후 회사에서는 디자인 업무, 개인적으로는 기획 출판물을 만드는 등 좋아하는 활동을 해나가다 현재 미술, 음악, 출판 분야 사람들과 협업하는 디자이너로 살고 있어요. 서로 다른 전공을 모두 마친 행보에 관해 “어떻게 그런 어려운 결정을 하셨나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다지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답니다.
『KNOT ver.3』, 2019
작업 공간에 대해서 편하게 소개해 주시겠어요?
서울 을지로의 공유 작업실을 쓰기도 하고, 대학원 시절에는 학교 작업실을 사용했는데요. 지금은 주로 집에서 일하고 있어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대체로 음악을 디자인 툴보다 먼저 켜는 편이에요. 작업 공간에 방문한 지인들 왈 서점이나 소품 가게 같다고 아주 좋아해요. 아마 여기저기서 사 온 책, 오브제, 직접 만든 세라믹, 서류, 장난감, 다양한 형태의 종이, 전자기기, 음반 등 뭔가 너무 많아서 그런가 봐요. 공간이 컸다면 이것도 많은 게 아니지 아닐까 싶어, 많다는 것의 기준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테트리스를 잘 하는 편이라 정리는 다 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것과 좋아하는 것이 모두 근처에 있어서 지금까지 불편한 점은 특별히 없는데요. 최근 새로운 공간을 찾는 중이에요.
『Selected Papers 선택된 논문들, 종이들, 문서들』, 2021
영감을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글쎄요. 영감이 애쓴다고 얻어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 평소 우연히 조우하는 장면, 소리, 산책 중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을 적은 메모,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가 뭉치며 어떤 아이디어로 변한다고 생각해요.
‹PRESSED TOOLS 눌린 도구들›, 2023
말로 설명하기 어렵겠지만, 작업하실 때 어떤 창작 과정을 거치시나요?
커미션 작업과 개인 작업을 할 때의 과정이 다릅니다. 의뢰처나 의뢰인을 위해 디자인할 때는 리서치는 물론이고, 메일로 소통하거나 대화하면서 질문을 많이 해요. 일종의 정보 수집을 통해 프로젝트의 의미를 파악하는 거죠. 그런 과정에서 어떤 방향성을 자연스레 발견하고 때때로 발굴할 수도 있답니다. 반대로 개인 작업은 파편적으로 흩어진 온갖 생각과 정보를 그러모아 프로젝트로 구현해요. 이건 정말 말로 표현하기 어렵네요. 하여튼, 공통점은 뭐든 중간에 무표정한 상태로 방바닥(침대가 있지만!) 에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틀어놓은 채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봐요. 아니면 바쁜데도 갑자기 산책하러 나가기도 해요. 왜 그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생각하는 거겠죠? 그런 다음 책상으로 돌아와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계획을 짜고, 프로젝트 성격에 따라 손 스케치, 온오프라인 리서치, 데모 음원 듣기, 건네받은 원고를 읽으며 생각을 갈무리하고 구현합니다. 스스로 설득하는 과정을 거친 후로는 빠르게 작업을 진행해요.
실리카겔 ‘NO PAIN’ 뮤직비디오 그래픽, 2022
최근 작업이 궁금합니다. 몇 가지 작품을 예로 들어 소개해 주시겠어요?
가장 최근에는 실리카겔의 ‘Syn.THE.Size III’ 공연 아이덴티티와 키 비주얼을 디자인했어요. 이전 이벤트 이미지를 반영해야 하는 상황이라 무채색이던 시리즈 I, II와는 달리 캐주얼하고 다양한 색상을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티스트의 기존 아이덴티티는 지켜야 했죠. 이런 식으로 다소 엇갈린 부분이 만나는 지점에 관해 생각했던 것 같아요. 2022년 심벌을 디자인했을 때 심벌 깃발 이미지를 제안서에 추가했었는데요. 공연장 밖에 다양한 색상의 심벌 깃발이 실제로 펄럭이는 장면을 목도하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디자인했던 아이덴티티가 시간이 흘러도 잘 활용되는 상황이 뿌듯했습니다.
실리카겔 심벌, 2022 (공연 ‘Syn.THE.Size III, 2024 에 설치된 깃발)
2023년 12월 석사학위 청구전에서 선보인 ‹THE END 끝 FIN 終 ENDE›는 상영 시간을 명시할 수 없는 영화입니다. 시작이 곧 끝, 끝이 곧 시작인데요. 디자이너나 감독에 따라 동일한 이야기의 모습이 달라져요. 시간을 축약하거나 늘리고 순서를 바꾸는 구조를 취할 수 있거든요. 디자인 자체가 발생시키는 분위기도 있겠고요. 게다가 이야기의 시간은 누군가가 읽거나 보는 행위를 통해서만 흐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스톡 푸티지stock footage 180가지, 영화 장르에서 특징적인 타이틀 디자인 문법을 차용한 글자 레이어, 프리젠테이션 툴이 제공하는 애니메이션 방식을 무작위로 조합해 각기 다른 타임라인에서 필연적으로 어긋나거나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장면을 무한 재생하는데요. 사실 이 영화는 웹으로 제작돼 저조차도 타임라인을 강제로 움직일 수 없어요. 흘러가 버립니다. 음악에 관한 이스터 에그도 있는데요. 일단, 저는 재미있기 때문에 발견해도 좋고 발견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THE END 끝 FIN 終 ENDE›, 2023, «잠재적 서사를 상상하기: 그래픽디자인으로 이야기하는 법», 사진: 양이언
같은 전시에서 공개한 『불현듯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A letter arrived out of the blue』라는 책이 있습니다. 올해 11월경 정식 출간할 예정이에요. 이 책은 단 한 편의 시를 위한 약 300쪽 분량의 시집입니다. 그 한 편의 시가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최대한 품게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출간 후 직접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불현듯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A letter arrived out of the blue』, 2023
최근 작업을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강조라기보다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상상한달까요. 선택과 선택하지 않은 것에 관해서요. 그래서 개인 작업은 그 가능성을 더 펼쳐 보이고 일부러 뭔가를 뒤집거나 스스로 잘 하지 않던 방식을 취합니다. 커미션 작업은 프로젝트 맥락 안에서 다시 또 그렇게 해보는 것 같고요. 물론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요. 하하.
작업을 진행하며 만족스러운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궁금합니다.
대체로 만족하고 일부분 아쉽습니다. 디자인은 여러 제약 아래에서 이루어지는데,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서요. 매번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의 것을 만들고 싶긴 하지만요.
평소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대해서 여쭤봐도 될까요?
오전에 일어나긴 하는데, 기상 시간은 불규칙한 편입니다. 일어나서 커피를 내리고 메일을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해요. 일이 많을 때는 일과 산책이 주요한 일상이고, 쉴 때는 전시장이나 서점, 레코드점에 들르기, 친구들과 보드게임 하기, 침대에서 각종 영상 보기, 마트 구경하기 등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실리카겔 TRPG ‹Desert Eagle: Cross Space Congress›, 2021, 사진: 홍태식
요즘 가장 큰 관심거리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산책로 찾기. 원래는 가까운 곳만 산책했는데, 최근에는 버스를 타고 아무 데나 내려서 그 근방을 산책하는 게 재밌더라구요. 새로운 동네 곳곳을 구경하는 일이 흥미롭습니다.
SAMOEDO ‹SAMOEDO› 카세트 테이프, 2022
삶을 대하는 태도가 작업에는 어떻게 묻어나나요?
태도가 작업에서 묻어나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 무엇이든 작은 흥미라도 생기면 궁금한 게 굉장히 많아져서 질문도 많이 하고 여러 통로를 통해 찾아봐요. 어쩌면 불합리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질색하는 면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여러 가지를 스스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관심이 사방에 뻗어있어요. 이건 왜 좋은지, 이건 왜 싫은지, 이건 왜 아름다운지, 이건 왜 불편한지 등등 모두 궁금하기 때문에 추적합니다. 그러면 사소하고 당연해 보이던 것들이 제 나름의 분류와 정리를 거쳐 작업 속 선택을 이끌어내요. 하나의 포스터에서 여러 사람이 지분을 갖거나 포스터의 필수 정보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고, 주석을 본문으로 만들어 버리고, 문구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크릴 패널을 미술 작품으로 바꿔 버리고, 마트에서 누군가 사려다가 결국 사지 않기로 한 후 어딘가에 숨겨둔 물건을 유심히 지켜보고 만든 작업 등이 제 태도와 연결되는 듯싶어요.
MMCA 창동레지던시 «노래하는 몸짓 Where gestures sing» 포스터 및 리플렛, 2024
슬럼프가 올 때는 어떻게 극복하세요?
정신적, 체력적인 컨디션을 체크한 후 긴 밤 산책을 하거나 피아노를 치며 머리보다 몸을 움직입니다. 여건이 된다면 좀 더 먼 곳으로 이동해 저를 잠시 다른 환경에 두려고 해요. 그런 다음, 그냥 계속합니다.
박혜인 개인전 «Diluvial» 도록, 2022
최근 들어 찾아온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작업 공간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합니다. 저는 뭐가 너무 많은 사람이기도 하고, 해가 지날수록 물건은 늘어만 가니, 외부에 좀 더 넓은 공간이 있다면 좋을 텐데 싶어요. 슈퍼샐러드스터프에서 함께 일할 동료에 대해서도 꽤 오래 생각했는데, 이를 위해서도 필요하고요. 해당 문제를 잘 해결하면, 그 (미래) 공간에 방문하는 사람에게 커피도 내려 드리고 같이 시답잖은 이야기도 나누며 재미난 일을 벌일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창작자의 태도와 철학을 알려주시겠어요?
지속적이고 깊은 호기심과 배우는 자세. 그리고 자신의 관점으로 보기.
‹WRA (World Rewind Association) RTS clock›, 2021
사람들에게 어떤 창작자로 기억되고 싶나요?
사람들이 기억할 제 모습을 스스로 정해두고 싶지는 않아요. 그저 기억된다면 기쁠 것 같습니다.
현재 품고 있는 이상적인 미래는 어떤 모습인가요?
자유롭고, 재밌게, 계속해서, 새로운 작업을 해 나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모아둔 것을 열람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기도 해요. 가끔 떠올리는, 평범하다면 평범하지만, 좋은 장면이 있는데요, 공간의 큰 창을 열어두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소파나 의자에 앉아서 각자 하고 싶은 걸 하다가, 대화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영화나 음악이나 문학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웃긴 농담을 하는 그런 장면이요. 아! 고양이 친구도 함께.
정해리(@super_salad)는 일상의 사소한 부분을 수집하고 재정렬하며 어떤 기준이 만들어내는 틈새를 들여다보는 데 관심이 있다. 현재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슈퍼샐러드스터프SUPERSALADSTUFF를 운영하며, 주로 미술, 음악, 공연, 출판 분야에서 활동한다. 동명의 출판사를 통해 『Books in Animation』, 『Selected Papers』, 『Project Blue Book』 등 기획 출판물을 비정기적으로 발행하고, 전시에 참가하기도 한다. 최근 팀 isvn의 일원으로 «포에버리즘: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일민미술관, 2024)에 참여했다. supersaladstuff.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