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낙관론자에게 건네는 덕담: 아트부산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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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지난 5월 9일부터 12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아트부산 2024’가 열렸습니다. 올해로 벌써 열세 번째 행사인데요. 이제 명실공히 국내 상반기 최대 규모의 국제 아트 페어로 자리 잡았습니다. 아트 페어에 별 관심 없어도 아트바젤 홍콩, 프리즈 서울, 키아프 등 이곳저곳 다닐 수밖에 없던 필자는 올해 처음으로 아트부산에 도전했어요. 그 와중에 아트부산이 추구하는 예술, 문화, 휴식, 미식을 고루 체험하려는 강박증으로 1박 2일이 아니라 2박 3일 출장을 떠났습니다. 계획을 열심히 짤수록 고통스러운 성격이라 이번에는 아트부산이 만든 가이드북 하나만 믿고 무작정 길을 나섰는데요. 과연 2박 3일 아트부산 탐험은 무사히 마쳤을까요? 우당탕탕 아트부산 출장기를 아티클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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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현 씨는 아트 페어 안 가요?”

“돈이 없는데 가서 뭐해요…?”

지금까지 아트 페어에 냉소적인 논리는 참으로 간단했다. 아트 페어는 말 그대로 그림을 사러 가는 장터인데, 돈 없는 가난뱅이가 침 흘리며 아트 페어에 가봤자 속만 쓰리지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 선입견이 사라진 계기는 ‘아트바젤 홍콩’이었다. 하도 기사가 많이 나오고 지인도 많이 가길래 ‘그러면 나도 한번 가볼까?’ 생각이 들어 훌쩍 떠난 아트바젤 홍콩은 한 마디로 신세계였다. 수많은 부스에 들어찬 예술품이 한 점 한 점 빛나는 모습은 마치 백화점 명품 매장의 화려한 윈도를 보는 듯했고, 중간중간 거대한 규모로 설치한 작업은 뮤지엄 피스를 연상시켰다. 각종 셀러브리티가 휙휙 지나가는 장면은 브랜드 행사장에서 마주하는 모습과는 또 달랐다. 마치 내 삶이 순간 붕 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적인 느낌은 금세 증발했다. 국제적인 아트 페어에 비해서 한국의 아트 페어는 너무 초라했다. 그리고 팬데믹이 터지면서 모든 오프라인 경험이 막혔다. 엔데믹이 도래했지만 상황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2022년 ‘프리즈 서울’이 런칭했을 때에는 내가 기대하던 느낌이 아니라서 크게 실망하기도 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첫 번째 프리즈 서울은 운영 면에서 무척이나 엉망이었다. 함께 열렸던 키아프는 발이 너무 아파서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작년에 열린 프리즈 서울은 단기간에 놀라울 정도로 단점을 고쳤지만, 많은 사람이 바글거리는 행사장을 헤치며 부스마다 걸린 수많은 작품을 진지하게 바라보기엔 이미 내 몸이 낡고 있다고 느꼈다. 아트바젤 홍콩은 맛이 갔다는 소문이 들렸고, 스위스 바젤이나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아트바젤과 프리즈 본진을 향해 비행기를 타는 일은 각종 금전적인 이슈 이전에, 장거리 여행에 대한 계획을 자세하게 짜면 짤수록 실제 여행 욕구가 곤두박질치는 극 P의 입장에서는 자학 행위에 가까웠다.

지난 4월, 큰 결심 끝에 이탈리아에 다녀왔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와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 미술전’의 오프닝이 굉장히 붙어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 장장 15일을 투자했다. 돈도 돈이지만, 넘쳐나는 인풋, 정리되지 않는 아웃풋, 그리고 혼절할 정도로 증발한 체력의 삼각형에 갇혀 방황하다 보니, 귀국 후 2주간 제정신을 못 차렸다. 지상 최대의 디자인 축제와 미술 축제를 경험한 덕에 눈은 엄청나게 높아졌고, 체력은 극적으로 추락하고, 뇌에는 광기가 어린 상태로 기어이 출장을 떠난 곳이 바로 ‘아트부산 2024’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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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13회를 맞이하는 아트부산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한국의 마이애미’를 표방하며 예술, 문화, 휴양, 미식을 함께 즐기는 색다른 아트페어를 지향한다는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혀에서 독침이 나갈 뻔했다. 요 몇 년 부산에 당일 출장을 갈 일이 많았는데, 기분이 정말 그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0여 년 전 친구들과 함께 부산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던 때를 희미하게 떠올려보면, 무언가 낭만도 있었다. 몇 달간 스케줄링하느라 고통받은 정신과 해외 체류로 만신창이가 된 저질 체력을 핑계 삼아, 이번에는 직접 확인한 사실만 믿는 성정을 죽이고, 남의 말도 어디 한번 조신하게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아트부산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자고 결심했다. 게다가 이번이 첫 방문이니까.

그런데 프레스 자격으로 취재를 가면 교통비와 호텔 1박을 제공한다는 말을 듣자, 급발진이 시작됐다. ‘아트부산이 말한 대로 도시와 아트 페어를 모두 즐기려면 절대적으로 더 오래 머물러야 하는 거 아냐?’ 이때 아트부산에서 만든 가이드북이 내 광기를 잠재웠다. 아트부산을 중심으로 여러 문화 행사와 맛집, 갈 곳을 추천하니 이것만 믿고 가보자는 용기가 생긴 것이다. 드디어 아무런 사전 조사도 하지 않고 호텔 1박을 따로 예약하고 총 2박 3일 동안 쓸 개인 여비만 챙겨서 부산으로 떠나는 데 성공했다. 이제 아트부산을 취재하러 가는 건지, 이를 핑계로 무계획 부산 여행을 떠나는 건지 스스로 헷갈릴 지경이었지만, 정확한 리뷰를 위해 내 시간을 쏟아붓는다는 명분은 상상외로 강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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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타지(특히 서울) 사람이 보통 1박 2일 일정으로 즐기는 아트부산에 2박 3일을 꽉 채워 투자하며 얻은 교훈은 의외로 단순했다. ‘아트부산은 다 생각이 있었구나?’ 부산 현지에 대해 아는 게 없고 생활 눈치도 0에 수렴하는 입장에서 아트부산이 큐레이션한 가이드북 하나만 믿고 동선에 맞게 짠 계획은 실로 놀라웠다. 단순히 벡스코에서 열리는 거대한 미술 장터가 아니라, 부산에서 열리는 미술 행사로 아트부산을 바라보는 시선이 광의적으로 바뀌는 경험을 했다. 예술을 좋아하는 서울 사람이 부산에서 열리는 아트 페어에 들러 취향껏 시간을 보내 보니, 옛 조상님 말씀이 퍼뜩 떠오른다. ‘뭐든지 직접 당해봐야(?) 안다’는 진리 말이다.

가이드에 기반을 두고 내가 2박 3일 동안 부산에서 경험한 것은 다음과 같다.

프리뷰를 포함한 이틀 간의 아트부산 행사, 부산의 노포 두 곳, 장소성이 돋보이는 카페 한 곳, 미쉐린 맛집 한 곳, 야간 개장한 갤러리 한 곳, 그리고 밤과 아침의 해운대 해변 풍경과 경쾌한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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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빠꼼한 사람이라면 1박 2일에 모두 가능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야레야레,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하루 혹은 하루 반에 걸쳐 집중적으로 보는 것과 이틀에 걸쳐 천천히 나눠 보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지금 못 보면 끝장이라는 다급함이 없어지고 여유롭게 관람하는 태도가 생겼다. 좋은 작품, 비싼 작품,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빠르게 훑어보겠다는 야심이 없어지니, 평소 보지 못하던 게 눈에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경험을 마주한 일은 정말 큰 수확이었다.

노포도 비슷하다. 아트부산이 열리는 벡스코는 센텀시티에 위치해 있다. 센텀시티는 상업, 문화, 산업 시설이 밀집한 부산의 혁신 지구다. 이 말인즉슨 노포라는 개념의 로컬 맛집이 주변에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뜻이다. 노포는 도시의 옛 중심지, 즉 원도심에 밀집하는 경향을 띤다. 그곳 바깥에 있다 하더라도 센텀시티가 속해있는 부산의 새로운 중심지인 해운대구에 있을 확률은 극히 낮다. 결국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이용해 이동해야 하는데, 아트부산을 보러 부산에 온 입장에서 노포 가려고 앞뒤 시간을 잘라먹는 건 꽤나 비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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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성이 돋보이는 카페는 또 어떻고! 특히 (나처럼) 역사적인 장소를 리모델링한 곳을 특정한다면 시간과 거리에 얽매이게 된다. 갤러리 야간 개장은 아트부산 오픈 날에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에 일정 조정이 필요하고, 밤과 아침의 해운대를 여유롭게 즐기는 경험에는 날랜 몸과 마음, 그리고 J적인 특질이 필수다. 결국, 시간과 일정을 제대로 못 챙기는 나에게 있어 하루라는 시간을 더 갖는 것은 아트부산 방문이 부산 아트 여행으로 바뀌는 기적(?)을 성취하는 든든한 바탕이 됐다.

5월 9일 프리뷰를 시작으로 12일까지 총 나흘 동안 진행한 이번 아트부산 2024에는 20개국에서 갤러리 129곳이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부스의 배치였다. 작년부터 행사장의 면적을 늘린 덕분에 부스에 돌아가는 너비가 상당했다. 대형 갤러리는 부스 외부와 내부 가벽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독특한 공간적인 경험을 창출했고, 소형 갤러리도 아이디어만 뾰족하면 작업을 보여주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자금과 공간이 풍부한 대형 부스는 대부분 구성이 훌륭했고, 소형 부스 또한 전통적인 화이트큐브 방식의 플랫함에서 벗어나 오밀조밀하게 꾸미거나 개념적으로 구성하며 눈길을 사로잡은 비교군들이 곳곳에서 출몰했다. 응당 부스 풍경은 해당 갤러리의 능력과 노력에 비례하는 결과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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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환상적인 것은 F&B 시설을 배치하며 자연스럽게 정리한 동선이었다. 심각한 길치이기 때문에 복잡한 곳에 가면 행사장 맵을 하나하나 체크하느라 혼돈에 빠지기 일쑤인데, 이번 아트부산은 가장 중심부에 자리 잡은 세 부분을 F&B 업장에 내어주고 사람들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공공장소를 마련해 마치 세 개의 광장이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다. 이에 따른 장점은 너무나도 확실하다. 아트 페어 같은 고밀도 행사에서 가장 힘든 점은 소모하는 체력을 보충할 수 있는 먹을거리가 터무니없이 적다는 사실이다. 긴 줄을 서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앉아서 먹을 곳이 협소해서 넓은 전시장 곳곳에 놓인 작은 쉼터를 열심히 찾아야만 한다. 이에 대한 불편함과 분노는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프리즈 서울 첫 회에 대한 기억이 안 좋았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더불어 F&B 업장은 가고 싶은 갤러리를 찾을 때 유용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이쪽 길에서 저쪽 길로 꺾어서 간다는 생각보다 F&B 업장까지 간 후 밑으로 내려가면 된다는 계산이 설 때, ‘큰길 우선’이라는 네이버 지도 기능이 떠오른다. 명확하게 길을 찾고 싶거나 혹은 아무리 해도 길을 찾기 힘들어 좌절하는 사람에게 효과적인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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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 시설의 입점 기준 또한 칭찬하고 싶은데, 로컬 디저트 가게에 가고 싶은 타지인의 니즈에 맞춰 부산에 있는 (게다가 가이드에서도 추천한) 업장을 전시장에서 만나니 거의 눈물의 상봉 수준으로 반가웠다. 밖에서 따로 찾아간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VIP와 프레스, 컬렉터스 패스를 구매한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는 컬렉터스 라운지의 경우, 일반티켓을 가진 사람에겐 배타적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익스클루시브 포인트를 가진다. 예컨대, 부산에만 있는 모모스 커피가 컬렉터스 라운지에 들어왔는데, 당시 바로 며칠 전에 오픈한 마린시티점의 시그너처 메뉴를 맛볼 수 있었다. 커피 한 잔 마시기 위해 모모스 커피 마린시티점에 들리는 것도 힘들지만, 막 오픈한 핫플이라서 사람이 득실대는 모습을 인스타그램에서 미리 접한 터라 아예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굉장히 영리한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부산에 위치한 미쉐린 레스토랑과 협업한 디저트 세트 등을 개발한 것도 컬렉터스 라운지를 이용하는 주된 사람들이 아트 페어에서 가장 중요한 구매 계층이란 사실을 염두에 두면 세일즈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면 됐지, 부정적인 효과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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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부산에 이틀 전부를 쓸 수 있다는 나름의 장점을 활용해 프리뷰에는 대형 부스 위주로 훑어보고, 다음날에는 예전이라면 집중하기 힘들었던 소형 부스를 천천히 둘러봤다. 대형 부스를 가장 먼저 방문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컬렉션과 공간 구성이 제일 좋기 때문에 관람의 즐거움이 탁월하고, 프리뷰 때 팔린 작품은 다음날 치워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므로 주요 작품을 제대로 보려면 첫날에 집중해야 한다. 유명 아트 페어에서 프리뷰 기간에 입장할 수 있는 패스를 비싼 가격에 파는 이유이기도 하다. 첫날에 주요 대형 부스를 살핀 덕분에, 두 번째 날 소형 부스끼리 콘셉트를 다르게 구성해 갤러리의 아이덴티티와 작품 홍보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스펙트럼을 확인하는 과정이 무척 즐거웠다. 예를 들어, 작품 확인하기도 바쁘던 부스에서 각자 어떻게 작품과 작업을 표시하는 크레딧을 준비했는지 보는 재미가 상당했다. 거의 미술 전시 수준으로 친절하게 작품 설명을 써 붙인 곳(예를 들어, 갤러리 밈MEME)에는 무심결에 호감이 갈 수밖에 없었다.

눈에 확 띄지 않아서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뻔한 보석 같은 곳을 조우하는 행운도 뒤따랐다. 서울 삼청동 부근에 자리 잡은 갤러리 도올은 故 권훈칠 작가의 작고 20주년을 맞이해 그의 유작들을 모아 개인전 형태로 전시하고 있었다. 작품이 보여주는 깊이와 힘에 비해 너무나도 낯선 이름이라 이것저것 물어보니 생전에 개인전을 단 한 번도 하지 않고 은둔자적인 태도로 그림에만 집중하다 갑자기 사망해 ‘잊힌 천재’라고 불리던 인물이었다. 그를 추모하는 입장에서 부스를 마련한 갤러리와 그림이 지닌 내러티브는 머리가 시릴 정도로 각인되었고, 이는 많은 사람이 오가는 아트 페어이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워킹위드프렌드는 장 줄리앙, 이원우, 목정욱, 토담 등 평소 협업하는 작가들을 소개하는 부스를 만들면서 서울 한남동에 운영하는 전시 공간의 특징을 감각적으로 변형하며 부스 디자인 측면에서 굉장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했다. 갤러리신라는 부스 입구를 하얀 테이프로 칭칭 막아놓고 ‘아트페어 기간 중 갤러리신라 부스는 닫혀 있습니다’라는 문장을 벽에 남겼다. 로버트 배리Robert Barry라는 이름과 함께 ‘1936~2024’라는 연도가 쓰여있어서 처음에는 부스에 참여한 작가가 급사해 추모의 뜻으로 닫아놓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어떻게든 팔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개념미술의 일종이었다. 마음이 촉박했다면 그냥 사고라고 치부했을 현장을 만끽하며 해당 갤러리와 작업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할 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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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아트부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코너 중 하나는 바로 ‘커넥트Connect’다. 홍익대학교 주연화 교수가 디렉터를 맡아, 총 9개 부스에 중심 테마를 설정하고 기획전과 개인전을 섞은 형식으로 끌어갔는데, 국제적인 아트 페어에서 상업성을 희석하고 예술적인 분위기를 고조하는 장치를 효과적으로 이식했다. 특히 기억에 남았던 부스는 한국과 영국의 신인 작가들을 매치한 아트부산의 시그너처 부스인 ‘아트 악센트Art Accent’와 존 지오르노John Giorno의 작업 ‹다이얼 어 포엠Dial-A-Poem›을 설치한 부스였다. 아트 악센트에서 가로로 거대하게 확장하는 캔버스 작업과 이미지를 입힌 전동 블라인드가 그 앞을 막아서며 상호 조응하는 모습은 이번 아트부산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다. ‹다이얼 어 포엠›은 부스 중앙에 옛날 버튼식 검정 유선 전화기를 놓고, 무작위로 번호를 누르면 35명의 예술가, 시인, 음악가 중 한 명이 시를 낭송한 음성을 수화기로 들을 수 있는 작품인데, 인터랙션 측면에서 단연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경험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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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를 쓰기 직전 김지수 선배가 연재하는 인터뷰 시리즈 ‘인터스텔라’에서 흥미로운 인터뷰를 읽었다. 돈과 심리 분야의 글로벌 일타 강사라 불리는 모건 하우절Morgan Housel이 베스트셀러 『돈의 심리학』 이후 3년 만에 출간한 『불변의 법칙』에 대해 설명하는데, 몇 가지 대목이 유독 눈길을 끌었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정확한 통계와 정보가 아니라 불확실성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걸 원한다고. 그래서 측정할 수 있는 통계보다 측정할 수 없는 스토리가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큰 숫자를 이해하면 바깥에서 먼 곳을 볼 수 있어요. 무엇이든 크게 만들려면 시간이 걸려요. 단기간에 일어나는 마법은 없어요. 결국 관건은 작은 변화가 아니라 축적의 시간입니다.” 완벽한 예견 대신 적당한 예측 아래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 해결을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아트부산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에 아트 페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게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서울도 아닌 부산에서 2012년부터 국제적인 아트 페어를 목표로 달려온 주인공이 아트부산이다. 심지어 그 고난의 팬데믹 때에도 문을 닫지 않아 국제적인 화제를 모으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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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절은 불확실성을 대하는 최선의 자세에 대해 합리적 낙관론자가 되라고 조언한다. “제가 말하는 합리적 낙관론자란 자신이 지향하는 장기적 목표에 대한 확신을 갖고 낙관적 시간을 유지하되 그 목표에 이르는 길에서 만날 역경과 실패에 관해서는 현실적 시각을 갖는 사람입니다.” 주변에서 이게 제대로 되겠냐고 만류하고 비릿한 웃음을 날릴 때 부산을 대표하는 아트 페어라는 목표 하나로 끊임없이 달려온 아트부산을 보자니 합리적 낙관론으로 가득 찬 집단이 아닐까 싶다. 매번 행사를 치르며 단점을 보완하고, 동시에 새로운 갤러리를 끌어들이고 새로운 요소를 실험하면서, 작년에는 자매 페어인 ‘디파인 서울’까지 런칭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이 리뷰는 올해로 벌써 열세 번째, 합리적으로 낙관하기를 멈추지 않은 집단에 건네는 애정 어린 덕담일 수도 있겠다. 내년에도 잘 부탁한다는, 기대한다는, 또 가보고 싶다는, 그리고 결코 멈추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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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이번 2박 3일 동안의 아트부산 출장은 부산 아트위크의 일환으로 만든 가이드북에 절대적으로 기대어 진행했다. 그에 대한 간단한 인증샷과 설명을 남기니, 부산 여행에 관심 있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신발원 (부산광역시 동구 대영로243번길 62)

1951년 창업해 70여 년이 흐른 노포로 차이나타운의 터줏대감이다. 튀김만두와 고기만두가 맛있다고 해서 시켰는데, 내 입맛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부산 출신 큐레이터에게 물어보니 다른 곳을 추천해서 역시 노포라고 다 맛있는 건 아니구나, 현타가 왔다. 특히 매니저가 다른 직원을 대하는 태도가 참으로 별로라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코카콜라보다 비싼 우롱차는 매우 양이 적고 리필도 안 되니 절대 시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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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리순대 (부산광역시 연제구 월드컵대로 162)

겉보기에는 낡았는데 그만큼 찐맛집 느낌이 솔솔 나는 엄청난 노포. 늦은 시간에 갔는데도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동성 친구끼리 테이블을 차지한 모습에 여기는 술 먹으러 오는 맛집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절대로 같은 이름의 다른 집을 찾아가지 말 것. 내가 당했다. 혼자 온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사장님이 직접 순댓국에 물김치 국물을 넣고 양념 부추도 팍팍 쳐주셔서 당황했는데, 어라. 약간 애매하던 국물 맛이 완전히 바뀌면서 어디서도 맛보지 못한, 하지만 엄청 맛있는 음식으로 탈바꿈했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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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사부사노 부산근현대역사관점 (부산광역시 중구 대청로 112)

부산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건물 1층을 리모델링한 카페. 예전 한국은행 영업소를 개조했는데, 옛날에 쓰던 은행 금고 공간을 그대로 남겨놨다. 금고의 상징은 아무래도 금괴라, 금괴 모양으로 만들고 금박지로 포장한 케이크를 파는 게 흥미롭다. 전체적인 인테리어 수준이 높고, 기물들도 꽤나 좋은 편이라 아주 여유롭게 F&B를 즐길 수 있다. 우리 집 앞에 있으면 매일 들르고 싶은, 그런 평온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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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복국 해운대본점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중동1로43번길 23)

서울, 부산에 여러 지점이 있는 복국 명가 금수 복국. 그래도 본점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가봤다. 무엇보다 24시간 영업을 하므로 (나처럼) 해운대 근처에 숙박하는데 저녁 시간을 놓쳤거나 해운대 밤 풍경을 즐기다가 배고프면 언제든지 들릴 수 있는 점이 매력이다. 가끔 금수복국 압구정점을 가는데, 맛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 수 있다면 아마 절대 미각일 듯. 하지만 미쉐린 리스트에는 해운대본점만 올랐으니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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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NP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 292 그랜드 조선 부산 4층)

해운대에서 가장 최근 지은 호텔이라 욕 나오게 비싸지만, 위치가 너무나도 좋은 그랜드 조선 부산 4층에 위치한 갤러리. 지난 5월 2일부터 6월 9일까지 타이포그래퍼 안상수(날개)의 개인전 «홀려라»가 열렸다. 5월 9일 한정으로 저녁 10시까지 야간 개장을 진행해서 해운대 산책과 맞물려 조용히 관람할 수 있었다. 여러 전시가 열리는 곳이니, 해운대에 들린다면 전시 스케줄을 한 번 확인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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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해수욕장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해운대해변로 264)

여름이면 100만 인파가 몰린다는 물 반 사람 반 해운대 해수욕장. 극성수기에 가지 않으면 이처럼 좋은 곳도 드물다. 특히 밤에 보는 해운대 풍경은 해변 근처에 자리 잡은 조명 덕분에 무섭지도 않고 고즈넉하다. 비리의 온상으로 유명해진 초고층 빌딩 LCT는 엄청난 위용을 자랑한다. 아침에 보는 해운대는 아주 청명하고, 점심에 보아도 아주 좋다. 사람이 좀 더 적은 아침을 추천하는데, 혹 고비용을 부담할 수 있다면 바닷가 호텔 카페에서 무언가 먹으면서 여유롭게 멍때리기도 좋다. 지인 왈 웨스틴 조선 부산에서 마시는 아침 커피가 참으로 분위기 있다고. 참고로 2인용 애프터눈 세트도 판매한다. 나는 혼자라 감히 주문할 생각조차 못 해서 아직도 약간 억울한 상태. 하지만 바다가 보이는 근처 고깃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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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t

아트부산 2024

기간: 2024.05.09 – 2024.05.12

Place

벡스코 제1전시장: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APEC로 55

Write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등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고,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와 함께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 작업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며, 동시대 한국의 기발한 창작자에 주목하는 «비애티튜드» 편집장을 맡고 있다.

나와 세계 사이의 엇모리: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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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er_⟪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전시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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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성수동 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요? 트렌드의 첨병, 팝업의 천국이 요즘 성수동을 요약하는 단어일 거예요. 마하의 속도로 하루하루 변해가는 이런 성수동에서 느림의 미학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성수역 지근거리에 위치한 우란문화재단입니다. 우란문화재단에서 선보이는 전시는 ‘우란답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독자적인 결을 유지해 왔어요. 전통 예술과 공예적 유산을 동시대 미술과 디자인, 제작 문화의 삼각 구조에 조심스레 올려두고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큐레이션하는 모습은 광폭한 빠름이 지배하는 성수동에서 보기 드문 넉넉한 템포로 방문객의 찬탄을 받았습니다. 이런 우란문화재단이 설립 10주년을 맞이해 기획전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성수동의 속도감을 전통음악의 장단에 빗대어 바라보고, 이를 작가 7명이 각자 호흡으로 풀어낸 작품을 전시로 묶었는데요. 이를 통해 개인의 의미 있는 장단을 찾아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게 목표랍니다. 예술과 디자인을 넘나들며 큐레이터로 활약하는 조주리 님에게 이번 기념비적인 전시에 대한 리뷰를 부탁드렸어요. 지난 2020년 우란문화재단에서 열린 전시에 기획자로 참여한지라 장소성에 대한 선지식이 탁월하고, 업계에서 글 잘 쓰고 맥락을 예리하게 파악하는 분으로 소문이 나 있기에 리뷰어로 제격이었지요. 우란문화재단의 기획전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를 더욱더 흥미롭게 경험하는 포인트를 아티클에서 어서 확인해 보세요.

하루가 멀게 요란한 기세로 이 세계의 물신을 받잡는 온갖 파빌리온이 만들어지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하는 곳이 있다. 바로 서울의 성수다. 팝업pop-up이라는 단어 그대로 온갖 브랜드와 트렌드가 ‘툭 튀어나오는’ 견본시(見本市)이자 하입hype의 성지로 자리 잡은 성수를 걷노라면, 여기가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에 비교되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요즘은 성수가 ‘한국의 브루클린’이 아니라, 브루클린이 ‘미국의 성수’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지만.

다국적 무드의 카페, 레스토랑, 화려한 가게가 꽉 들어찬 대로와 대로, 모세혈관처럼 얽혀있는 작은 골목과 골목 사이로 파고 들어가 조금만 더 섬세히 살펴보면 이곳이 얼마나 복합적인 삶의 지층을 포함하는 장소인지 오감으로 가늠할 수 있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옛 공장 건물이 군데군데 남아있고, 피혁을 가공한 신발과 잡화를 제작하고 유통하던 ‘터’의 기운과 인력 및 물자가 드나드는 사운드가 공명한다. 

번쩍이는 빌딩 클러스터와 남다른 시세를 자랑하는 부티크 주거 시설이 지어지기 이전을 돌이켜보면, 이곳은 오랫동안 노동자계급, 즉 워킹 클래스working class의 지대였고, 사회 초년병과 자취하는 학생이 몰려있던 거주지였다. 게다가, 서울 사대문 안 북촌이나 서촌에서 풍기는 고즈넉한 반가의 분위기와는 또 다른, 산업화된 수공예의 본진이었다. 소가죽을 비롯한 동물의 피혁, 장식을 위한 다양한 부자재를 두루 다룰 수 있는 아티잔artisan 그룹이 마지막으로 존재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시간의 서사와 공간의 증거로 가득한 곳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성수에서 팝업 행사가 아닌 오랜 기간 진득한 준비를 거쳐 내놓는 전시를 만나는 일은 다른 곳에서의 경험보다 갑절 이상으로 반갑다. 그 중심부에서 활동하는 우란문화재단은 현재 성수에서 가장 걸출한 문화예술 공간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성수동이라는 주변 상권, 전시라는 동종업계를 분주하게 만드는 광폭한 속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충분한 준비 기간을 거쳐 매해 빼놓지 않고 다양한 전시를 기획하고, 오랜 기간 전시를 열어두는 우란문화재단의 템포는 확실히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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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빙고동에서 지금의 성수역 부근으로 사옥을 옮긴 후 활발한 행보를 보인 우란문화재단은 꾸준한 기세와 밀도로 자체적인 전시 영역을 개발하고, 기획 문법을 창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 전통 예술과 공예적 유산을 전시의 소재로 다루면서 프로덕션 방식 또한 여타의 기관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명확했다. 개인적으로 이런 독자성의 요체는 전통 공예와 장인에 대한 장기 연구에 기반한 학제적 방식의 큐레이팅과 다양한 매체를 병치하는 시청각적 양식에서 비롯된다고 느낀다. 

우란문화재단은 그 건물부터 인상적이다. 물리적으로 꽤 큰 볼륨을 차지하며 범상치 않은 외관을 지닌 이 구조체는 남다른 예술적 위용을 가졌음에도 주변 공간과 내방객을 압도하지 않는다. 내부는 대체로 단정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감도는데, 외부인이 늘상 거치기 마련인 인포데스크도, 신원을 묻는 경비원도 없다는 점이 독특하다. 어느 방향의 출입문을 거치든 예닐곱 발짝만 걸어 들어가면 전통 공예와 현대미술을 자유롭게 오가는 전시 공간의 초입으로 진입할 수 있고, 안쪽으로 다시 몇 발짝 더 내디디면 방문객 앞에 더 많은 것을 펼쳐낸다. 미려하고 고요하게 단장한 전시장을 조금 더 자세히 돌아보면 물질과 사물, 인간과 문명을 관통하는, 묵직하고도 까탈스러운 쟁점을 다룬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다.

수집과 보존을 중시하는 전통 박물관의 실천 양식과 기획 및 창작을 조명하는 현대 미술관의 영역 사이에서 매번 다른 좌표를 점유하는 우란문화재단은 공예의 영역을 동시대 미술과 디자인, 제작 문화라는 삼각 구조에 조심스레 올려두는 이색적 전시를 배태했다. 오늘날 생동하는 시각문화 담론으로 확장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멀리서 관망하고 가까이서 톺아보는 일은 퍽 재미난 구경이다. 연구자이자 기획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전시를 관람하는 시민으로서 말이다.

올해 재단 창립 10주년을 맞이해 전통 음악에서 사용한 악기와 리듬을 열쇠말 삼아 전시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꼭 ‘우란다운’ 접근 방식이라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생각만큼 가시화하기 힘든 청각의 영역과 박자라는 감각을 어떻게 구현하고 종합했을까 걱정이 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정성스레 조명한 전통악기는 표층에서 가시화된 소재일 것이요, 심층에서 닿고자 한 점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악기를 만드는 이로 대변되는 진중한 삶의 박자, 나아가 음악의 작창 과정과 공연에서의 수행을 살피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박자가 아닐까 추정해 보았다. ‘악기의 부분과 전체, 제작자의 마음과 수행자의 몸, 개인과 공동체 간의 결속과 어긋남, 그 밀고 당김의 원동력을 추적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같은.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전시 전경

우란문화재단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전시 입구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가 열리는 우란문화재단 1층의 전시장, 우란1경을 방문해 기획의 글을 살펴보니 이런 의도가 눈에 들어왔다. “성수동의 속도감을 전통음악의 ‘장단’에 빗대어 바라보고, 그 특징을 각자 호흡으로 풀어낸 작가 7명의 작품을 통해 개인의 의미 있는 장단을 찾아보는 시간을 마련한다.” 전시를 보기 전 지레 짐작한 향방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심 반가웠는데, 성수라는 지명을 특정하고, 작가 개인의 관찰과 논평으로 전시의 발화 스펙트럼을 겸손하게 조정한 점이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관심이 가는 부분은 전통 음악의 요소로 현대 도시의 속도를 살펴보려는 교차적 시도와 이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어긋남이었다. 과연 어떻게, 혹은 얼마만큼 가능한 일일까? 농업시대를 대변하는 민속 음악의 원초적 흥과 후기산업사회의 도심을 부유하는 사운드의 불협화음, 오래전 산업 영역으로 편입된 대중음악의 코드화된 ‘쪼’를 연결해 시대의 풍경을 들여다보고, 무엇인가를 성찰하기란 그리 간단치 않은 일이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전시 전경3

벽면에 배치한 자료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제공했다.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우리는 전시에 풍덩 빠지기 전, ‘장단’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장단은 음의 길고 짧음이라는 표준적인 정의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전시에서 주목한 장단은 주로 장구와 북처럼 타악기 연주에서 강조되는데, 악곡에서 기본적인 리듬을 형성하는 요체다. 장단의 틀거리 안에서 선율 또한 존재하므로 전통음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장단은 서양의 박자 혹은 리듬의 개념으로 동일하게 번역할 수 없다. 일정한 리듬 꼴이긴 하지만, 동시에 강약 주기와 고유한 빠르기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장단이란, 물리적 빠르기를 규정하는 서구식 개념과는 달리 연주자의 신체적 몰입과 협연자와의 시간적인 조응, 환경적인 맥락을 적극적으로 포함하는 것으로 다가온다. 재즈 연주자의 유연한 그루브groove 감각이나 스윙 연주에 담긴 박자의 탄성과 유사할 수도 있다. 더불어 농악, 판소리와 같은 전통 음악을 바라볼 땐 무대에 올리기 위해 탄생하지 않았다는 특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상적 노동과 놀이의 일부로 작동했던 지점을 전제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빠르기를 흐트러뜨리지 않는 범위 내에서 즉흥적인 변주가 가능했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임선빈 전시전경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선빈 장인의 북 작업. ‹메구북(못북)›, 2015, 오동나무, 소가죽, 36.5 × 24 / ‹고쟁이북(소리북)›, 2021, 소나무, 소가죽, 황동못, 38 × 26.5 / ‹장단북›, 1961, 오동나무, 소가죽, 비호못, 59 × 50 / 임동국 장인과 공동 작업한 ‹메구북(사물북)›, 2015, 소나무에 카슈칠, 소가죽, 44 × 27 / ‹장단북›, 1961, 오동나무, 소가죽, 34 × 40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이런 특성을 감안하면, 전통적 모양새의 북과 장구는 일종의 제유(提喩)에 해당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으로 결정한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는 장단 부호에서 따온 표현이다. 이 중 핵심은 둥글게도, 반듯하게도 아닌, ‘때로는’이라고 생각한다. 순간적인 자기 판단과 집단적인 몰입이 동시에 일어나며 그 ‘때’가 정해지고, 북을 치는 이의 머리와 어깨, 팔, 손가락, 노래하는 이의 성대가 직관적으로 협응하며 비로소 그 ‘때가 일어나는 까닭이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김진곤 전시전경

다양한 장구를 전시한 모습. (왼쪽부터) 김진곤 장인 소유의 ‹농악쪽장구›, 1980년대, 미루나무, 오동나무, 32.5 × 33 × 54, 김진곤 장인이 작업한 ‹사물장구›, 2024, 오동나무, 소가죽, 28 × 29 × 51.5 / ‹무속장구›, 2005, 오동나무에 자개, 소가죽, 29 × 30.7 × 52 / ‹반주장구›, 2010, 물푸레나무, 28.5 × 29.7 × 57.5 / ‹장단장구›, 2024, 소나무, 29.5 × 31.5 × 54.3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이번 전시는 다양한 작가군이 공간을 채우며 독특한 어울림을 만들어 낸다. 전통 장인과 동시대 미술가의 작업이 동일 선상에 서있고, 소장품과 커미션 작업이 한 프레임에 담기며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작품 간의 과감한 믹스매치가 부르는 전시의 시각성과 관람객에 의해 비로소 완성되는 스토리텔링은 관람을 쉽지 않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낳는다.

가령,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전통 방식으로 수천, 수만 개의 장구와 북을 만들어 온 김진곤과 임선빈의 작업물을 전시장으로 옮겨와 좌대 위에 올리는 순간, 국악기는 연주자의 몸에 예속된 도구이기보다 그 자체로 독특한 조각적인 사물이자, 공간을 호령하는 토템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질 좋은 가죽을 구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과 끊임없이 무두질을 반복하며 솜씨 좋게 가죽으로 북을 메우고 끈을 매다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전시 관람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장구와 북 여럿이 도열한 모습은 마치 제의를 치르는 하나의 장면으로, 가죽에 배인 노동의 시간을 기념하는 미학적 사건으로 다가온다. 살가죽을 두드리는 진동과 공명이, 북을 만든 이의 숨은 리듬이 공기 사이로 회절하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이동훈 전시전경

이동훈, ‹일곱 번째 감각›, 2022, 느릅나무에 아크릴릭, 가변설치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전시를 이루는 한 축이 악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는 관람의 여정에서 다양한 세대와 실천을 대변하는 조각, 회화, 도자, 텍스타일, 사운드, 퍼포먼스, 텍스트, 무빙 이미지 작업과 만나게 된다. 일례로, 조각가 이동훈이 K팝 아이돌의 군무 씬에서 포착한 모습을 표현한 ‹일곱 번째 감각›(2022)은 어떤가? 역동적인 댄스 대형에 따라 서있는 목조각은 특유의 뻣뻣함 때문에 오히려 대상으로부터 시선을 해방하는 역설적 상황을 낳는다. 칼군무의 오작동에서, 완성이 덜 된 것처럼 보이는 조각적 양감에서 누군가는 음악 본연의 유희와 표출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할 수도 있겠다. 혹은 주문에 걸린 듯 멈추어진 장면 앞에서 능동적으로 BGM과 안무(choreography)를 덧입힐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박지원 전시전경

박지원, ‹Dig in the Ground›, 2024, 점토에 유약 소성, 각 20 × 20 cm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악기의 탄성 있는 가죽과 대비되는 소재로 제작한 작품들의 질감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예컨대, 박지원 작가에게 새로운 도자 작업을 청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보다 시적인 해석과 감각적인 포용이 필요하다. 말캉한 가죽처럼 부드러운 흙을 빚어 고온에서 소성한 세라믹이 경화되고 형태와 질감이 우연히 변성하는 과정에는 인간이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는 2%의 영역에 존재하는 불완전한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물과 흙, 불, 사람의 손길을 더해 이루어지는 도자의 단단함과 그 속에 깃든 연약함의 구조를 직시하는 일은 때로 악기를 쥐고, 패고, 어루만지며 이루어내는 여러 질감의 공명을 이해하는 것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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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우, ‹굳은 비와 너절한 모터음›, 2024, 모터, 스테인리스 막대, 와이어, 스피커, 앰프, 콘크리트, 나무 각재, 시멘트, 우레탄, 철망 등, 85 × 90 × 156 cm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 걷다 보면 안과 밖으로 실재하는 소리가 들린다. 근방에서 수집한 사운드에 직접 연주한 장구 소리를 개입시킨 서민우의 작업까지 온 것이다. 스스로 구체 조각(concrete sculpture)이라 지칭하는 작업의 묘사는 꽤나 서사적인 구석이 있다. 사운드의 거친 추상성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잔여음 덕분인지 도시의 특정한 풍경이 연상된다. 작가는 타격음을 지속음으로, 긴장감을 유연함으로, 가락을 노래로 옮겨오고자 한다. 분명 비가(悲歌)로 들리던 사운드의 해석과 감각적인 수용은 얼마든지 새로고침 될 수 있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뭎,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입구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뭎,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뭎,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2024, 2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상) 1분55초, (하) 18분 25초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전통 악기를 모범 삼아 복각한 악기, 그와 동떨어져 보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악기 구실을 하는 대상의 조각적 번안과 변형 과정이 전시 전반에 걸쳐 펼쳐지는 와중에, 몸과 공간을 직접적으로 매개하며 제작한 뭎의 퍼포먼스 필름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은 상이한 접근을 보여준다. 공간을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과정을 예비하고, 몸의 움직임을 직접적으로 중계하는 이들의 작업은 전시 공간에서 관객의 신체가 작품을 통해 겪는 동일시와 객관화의 거리감을 끊임없이 자극한다. 뭎의 작업은 단일한 주제 의식에 수렴 또는 종합되기보다, 여러 방향으로 분산하며, 기획의 동일성으로부터 작은 틈을 내어 새로운 감각과 호흡을 자극한다. 관람객은 적극적인 퍼포머이자 수용자로서 작가가 구축한 이질적이고 무한한 공간과 상황에 균열을 내고 구멍을 찾으며 한 편의 공연을 공조한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태싯그룹, Morse ㅋung ㅋung

태싯그룹, ‹Morse ㅋung ㅋung›, 2019, 단채널 영상, 컬러, 스테레오 사운드, 4분 12초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태싯그룹은 또 어떤가. ‹Morse ㅋung ㅋung›(2019)은 텍스트의 운동 감각과 리듬을 다룬 오디오 비주얼 작업이다. 과학적인 리드미컬함은 관람에 쾌(快)를 더해준다. 한글 창제 원리를 모스 부호의 장단에 대입한 작업은 약속된 체계에서 일말의 무질서와 탈주를 허용하는 장단의 변주를 떠올리게 한다. 기본 장단에서 연주자와 관람객이 하나 되어 이어졌다 떨어지듯, 쪼개지고 더해지는 박 속에 그들이 만든 새로운 소리는 하나의 유기체이자 생명체로서 한 편의 공연을 펼쳐낸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임선빈, 링북,

임선빈, ‹링북›, 2020, 소나무, 소가죽, 200 × 300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이따금씩 전시에서 다루는 소재는 대주제로 가기 위한 방아쇠(trigger)이거나,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터뜨리기 전에 안전하게 깔아놓는 맥거핀MacGuffin일 때가 잦다. 그런 면에서 이번 전시는 단순히 음악에 관한 전시도, 악기를 소개하는 자리도 아니다. 재단 설립 1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전이란 측면에서 기관이 지향하는 방향과 지금의 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도를 응축한 결과물이다. 즉, 소재이자 주제이고, 트리거이자 맥거핀이며, 기관의 아이덴티티 강화를 위해 기존의 기호 체계를 ‘당겨오는’ 당김음(syncopation)의 과정이자, 아직은 이해받지 못할 일부분에 대해서는 멈칫 주저하면서도 결국 재빨리 ‘밀고 나가는’ 엇모리이기도 한 것이다.

우란문화재단 윈도우갤러리

(좌) 김진곤, ‹별신굿장구›, 2024, 오동나무, 개가죽, 22.5 × 24 × 47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우) 임선빈, ‹메구북(과정)›, 2022, 소나무, 소가죽, 55 × 36.5 © 우란문화재단, 촬영: 언리얼스튜디오

전시장 문을 나서니 생동하는 봄날의 거리와 마주한다. 우란문화재단 건물로부터 한 걸음씩 멀어지는 내내,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읽고, 이해하려고 애쓰던 머리와 몸통, 팔다리가 기민하게 이어지지 않고 붕 뜬 느낌에 사로잡힌다. 의식하는 순간 내딛는 걸음걸음이 어쩐지 이상한 장단이다. 그러나 장단 맞추기란 일단 장단이 존재해야 가능한 일 아니던가? 실제 우리 삶에는 그 어떤 정해진 악보도, 따라야 할 무보도 없다. 세계 곳곳을 보면 불협화음과 엇박자투성이다. 공동체와 개인, 중심과 주변부, 그리고 세계와 나…

이번 전시가 만일 세계를 구성하는 오만 가지 것의 ‘장:단’에 대한 예민함을 심어주려 했다면 내게는 일말의 성공을 거뒀을 테다. 만일 이런 판단이 일렀다면 조금은 뭉개면서, 의도가 지연되고 있다면 빨리 당도하기를 기다리며, 우리를 둘러싼 일상의 높낮이가, 내일의 모양새가 꼭 그랬으면 좋겠다.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Exhibition

«때로는 둥글게 때로는 반듯하게»

기간: 2024.03.13 – 2024.06.02

11시~19시 (일요일 및 공휴일 휴관, 단 6월 2일은 제외)

참여 작가: 김진곤, 뭎, 박지원, 서민우, 이동훈, 임선빈, 태싯그룹

Place

우란1경: 서울 성동구 연무장7길 11 우란문화재단 1층

Writer

조주리(@jurimillercho)는 현대미술 분야에서 기획자로 활동하며, 하나의 전시가 다음 전시로 이행하는 시간 속에서 개인의 연구와 비평 활동을 양분 삼아 공공의 기획과 작품 생산으로 연결되는 일을 제안하고 주도해 왔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성격의 문화예술기관에서 일하거나 독립적인 조직 형태로 기관과 협업하며 주로 큐레이토리얼의 방법적 확장과 변주, 예술적 지식 생산에 관한 실험에 관심을 가져왔다. 이화여자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심리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고, 기획자로 활동하는 시기와 맞물려 런던 시티대학교에서 문화 정책 및 경영학을,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역사문화학을 공부했다. 지금까지 기획한 전시로는 «원피스»(111cm, 2023), «고고학»(스페이스 중학 외, 2023), «나의 잠»(문화역서울 284, 2022), «Triple rings; 복각본들, 어제 글피로부터»(문화역서울 284, 2021), «홈, 커밍»(아름지기, 2021), «기획전»(문화비축기지, 2020), «루트 메탈리카»(을지아트센터, 2020), «화이트랩소디»(우란문화재단, 2020), «끈질기게 끈질긴»(d/p, 2019),«베틀,배틀»(토탈미술관, 2018), «동백꽃 밀푀유»(아르코미술관, 2016-2017), «리서치,리:리서치»(탈영역우정국, 2016), «2의 공화국»(아르코미술관, 2013) 등이 있고, 그 외 다수의 국제교류전과 학술 행사, 레지던시 운영, 기획자 양성 프로그램, 서울시의 공공미술 기획에 참여했다.

애프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4인에게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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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나라에 의외로 대중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상이 없다는 사실 알고 계신가요? 물론 세보면 많지만, 업계에서 신뢰하는 상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그중 비영리로 운영하는 한국대중음악상은 수십 명의 전문 선정위원이 오직 음악적인 면모에 집중해 난상토론을 하는지라 수상자 발표 시즌이 오면 모든 매체가 결과를 송출한답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한국대중음악상 결과가 공개됐습니다. 가장 주목 받는 종합분야에 해당하는 ‘올해의 음반’,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악인’, ‘올해의 신인’은 각각 빈지노의 ‹NOWITZKI›, NewJeans의 ‘Ditto’, 실리카겔, KISS OF LIFE에 돌아갔는데요. 한곳에 쏠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선정위원의 다양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블럭 님이 선정위원 네 분에게 공식 선정의 변 이외의 추가적인 코멘트를 부탁드렸어요. 이번 기회를 빌려 작년 한국 대중음악 신을 타오르게 했던 주인공들을 다시 한번 체크해 보세요.

지난 2월 29일 한국대중음악상이 최종 수상자를 발표하며 21번째 막을 내렸다. 한국대중음악상의 꽃인 종합분야는 ‘올해의 음반’, ‘올해의 노래’, ‘올해의 음악인’, ‘올해의 신인’으로 나뉜다. 마땅히 어울리는 수상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선정위원들은 서로 다른 시선으로 고민하고, 바라봤을 것이다. 사무국장이 지닌 권력(?)으로 선정위원 네 사람을 닦달해 종합분야에 대한 코멘트를 갈취했다. 조혜림, 신샘이, 이수정 선정위원은 각각 긍정, 중립, 비평적인 논조로 접근했고, 김윤하 선정위원의 자유로운 의견도 포함했다. 이번 리뷰를 통해 작년 한국 대중음악 신을 달군 주인공―빈지노, NewJeans, 실리카겔, KISS OF LIFE―에 대한 다양한 시야를 공유할 수 있길 바란다. 참고로 시상식은 다음 링크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이번 리뷰에 참여한 선정위원에 다시 한번 감사한다.

조혜림 : 음악 콘텐츠 기획자. 음악에 관해 만들고, 듣고, 보고, 쓰는 일을 한다. 좋은 음악과 음악가를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신샘이: 음악 리뷰어. 플레이리스트 큐레이션, 음악 리뷰까지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을 소개한다.

이수정: 뮤직 콘텐츠 에이전시 알프스 소속으로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을 기획하고 프로그래밍한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케이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을 다룬다. 음악을 더욱더 선명한 말과 글로 풀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다.

01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올해의 음반 – 빈지노(Beenzino) ‹NOWITZKI›

빈지노(Beenzino)는 뛰어난 스토리텔러다. 그는 청춘의 단면을 눈에 잡힐 듯 생생하게 묘사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이제는 빛바래진 가치들에 대한 낭만을 다시금 떠올리게 만든다. ‹NOWITZKI›의 빈지노는 어느덧 30대 중반이 된 자신의 삶을 노래한다. 신혼(‘침대에서/막걸리’), 여행(‘여행 Again’), 군대(‘Camp’)처럼 또래의 한국 남자들이라면 겪을만한 사건부터 일반적인 것과는 동떨어진 화려한 예술가의 삶(‘Monet’, ‘Coca Cola Red’, ‘바보같이’ 등)까지. 그가 겪었던 시간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며 각자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변화하는 삶의 단계에서도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와 지키고자 했던 멋을 잃지 않으며 현재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단선적인 진행을 벗어나는 플로우와 허를 찌르는 워드 플레이가 곁들여진 가사, 로파이Lo-Fi한 질감으로 포장한 세련되고 따뜻한 분위기의 프로덕션은 빈지노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감각적인 사운드를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현재를 살아가는 30대 청년의 가장 인간적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빈지노는 여전히 트렌드의 선두에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NOWITZKI›는 그를 일시적인 유행이 아닌 시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 공식 선정의 변

02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빈지노 정규 앨범 ‹NOWITZKI› 커버

조혜림: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된 빈지노의 ‹NOWITZKI›는 앨범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2023년 발매된 우수한 앨범들 사이에서 7년 만에 나온 빈지노의 정규 앨범은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변치 않는 청춘과 낭만의 상징임을 증명했다. 더불어 힙합이란 장르를 넘어 한국 대중음악계에 영원히 ‘멋’ 그 자체로 남을 아티스트임을 증명하기도 했다.

신샘이: 한 음악가가 긴 공백기 끝에 선보이는 음반은 청자에게도, 음악가에게도 독특한 의미를 갖기 마련이다. 그동안의 시간에 대해 서로가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해소하고자 하는 공통된 마음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빈지노는 7년의 공백을 음악으로 멋지게 풀어낸다. 그의 음악적 감각은 벌어진 시간을 단번에 뛰어넘고, 진중하면서도 재치 있는 말솜씨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국대중음악상은 한 장의 음반이 가지는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 ‹NOWITZKI›를 올해의 음반으로 결정했다.

이수정: 한국대중음악상 종합분야를 선정하는 최종회의 장면이 생각난다. 겨우 다섯 부문이니 빠르게 수상작을 정하자던 회의 초기의 결의는 결국 두 시간을 꽉 채우며 무력해졌다. 언성은 오가지 않았지만 왜 이 후보가 반드시 수상해야만 하는지, 혹은 왜 이 후보는 안되는지에 대해 신랄하게 의견을 교환했다. 선정위원이 많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키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선정위원들도 다수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서 공격적으로 의견을 피력한다. ‘풀 렝스full-length’ 앨범이 아닌 음반이 음반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혹시나 음반의 완성도보다 음악인의 인지도나 활동력을 더 크게 반영하는 건 아닌지를 두고 토론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김윤하: 힙합을 좋아하는 이유는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그런 다양한 이유의 중심에는 언제나 ‘힙합에는 인생이 있다’라는 문장이 존재한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 마이크를 든 MC들은 DJ와 결합해 세상 그 어떤 음악보다 서사와 노랫말이 주목받는 장르를 탄생시켰다. 빈지노의 ‹NOWITZKI›가 올해의 음반상을 받은 건, 그런 힙합의 기본 정신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행하는 음악가의 말과 생각을 더없이 세련되게 담아낸 앨범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있지도 않은 한(恨), 다 쓰지도 못할 돈과 여자 타령만 하다가 ‘국힙’이라는 단어가 일종의 조롱으로 전락한 시대에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자신의 삶을 똑바로 걸어가는 한 음악가의 진짜 힙합 앨범이 나왔다. 빈지노 앞에 늘 붙는 수식인 ‘멋’은 그대로인 채, 화학식만 바뀌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빈지노 수상 소감

03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올해의 노래 – NewJeans ‘Ditto’

“라-타-타-타” 울리는 심장은 찬란하고 눈부신 그때의 우리에게 보내는 달콤하고 아련한 안부 같다. 교복을 입고 시공간을 감싸안으며 춤을 추는 소녀들의 희구하는 눈빛은 시간을 움직이고 낯익은 기억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우리는 1998년의 어느 학교에서의 보낸 발신이 아스라이 21세기에 닿아 애틋하고 그리운 너와 나를 이어줄 것이라 믿는다. 데뷔와 동시에 큰 성공을 이뤄낸 NewJeans가 4개월 만에 가져온 ‘Ditto’는 발표와 동시에 전 세대를 아우르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유행가의 탄생을 알렸다. 강력하고 화려함으로 무장한 가요계에 느슨하고 꿈결 같으며 따스한 온도를 가져온 ‘Ditto’는 볼티모어 클럽 장르를 재해석하여 그 어느 때보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같은 설렘을 구현했다. 우리의 지나간 학창 시절을 반짝이는 사랑스러운 피사체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겨주었고, 어설픈 듯하지만, 진심을 다한 마음과 진실한 우정은 누군가, 아니 우리의 가장 순수하고 행복했던 기억 속으로 살금살금 걸어들어와 마음을 자극했다. 그들이 보낸 ‘Ditto’란 애틋한 전언에 우리는, 전 세계는 NewJeans에게 사랑을 가득 담아 용기와 응원의 회신을 보낸다. – 공식 선정의 변

04_한국대중음악상_korean-Music-Award

뉴진스 싱글 ‹Ditto› 커버

조혜림: 올해의 노래로 뽑힌 뉴진스의 ‘Ditto’는 2023년 가장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설렘 가득한 곡임이 틀림없다. 화려한 음악으로 가득한 케이팝 신에 이 따스하고 꿈결 같은 음악은 신선하고 달콤한, 그리고 짜릿한 충격이었다. 아마 가장 많은 사람이 따라 부른 노래 중 한 곡이 아닐까?

신샘이: 지난해 ‘Attention’으로 올해의 노래 후보에 올랐던 뉴진스가 올해 ‘Ditto’로 마침내 올해의 노래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뉴진스가 ‘Ditto’ 이전의 음악에서 10대 소녀들의 여름을 떠올리게 하는 찬란함과 풋풋함을 주된 정서로 삼았다면, 이번 ‘Ditto’에서는 계절을 바꿔 겨울의 맛을 보여줬다. 아름다운 추억을 꺼내볼 때 가슴이 시리도록 아련한 감정을 사운드와 비주얼로 구현해 낸 ‘Ditto’는 2023년의 노래로 기억될 뿐만 아니라 매년 겨울이면 울려 퍼질 새로운 겨울 노래가 될 것이다. 올해의 노래에 후보로 오른 곡들 모두 음악 팬들 마음에 뜨거움을 준 곡들이지만, 한국대중음악상은 긴 생명력을 가진 노래의 탄생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나 싶다.

김윤하: 올해의 노래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작 이래 가장 유명한 이들이 가장 치열하게 경쟁하는 부문이다. ‘대중이 모르는 대중음악’이라는 피눈물 나는 비난 속에서도 ‘저희 이런 후보들도 있는데요’ 수줍게 꺼내어 보여줄 수 있었던, 케이팝이 지금처럼 다수의 후보를 내지 못하던 시절에 기자들이 한 줄이라도 기사를 더 쓸 수 있게 만들어 준 고마운 부문이기도 하다. 이런 올해의 노래에서 ‘Ditto’가 수상한 건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스럽고, 어떤 의미에서는 특별하다. 2023년 한 해 동안 뉴진스가 발표한 여러 곡 중 무엇이 상을 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Ditto’만이 줄 수 있는 감상이다. ‘Ditto’는 일 년 내내 차트와 플레이리스트를 빛낸 뉴진스의 첫 겨울 노래이자, 2022년과 2023년 겨울을 잇는 대명사 같은 존재다. 섬세하게 잘 세공된 이 연결고리는 세대와 시대를 뛰어넘어,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저장해 놓은 애틋하고 코끝 찡한 겨울 기억을 하나하나 끄집어 꿰어냈다. 단지 인기곡이어서가 아닌 사랑 받는 곡의 이유, 나아가 우리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려준 곡이라는 점에서 더없이 특별하다.

NewJeans 수상 소감

05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올해의 음악인 – 실리카겔

전작들부터 구축해 온 실리카겔의 사운드 하이웨이는, 점멸하는 신 사운드 수혈로 스탠리 큐브릭 같은 첨단을 열고 있다. 전복적인 기타 프레이즈는 흡사 ‘섬광처럼 번쩍이는 사막 유령들(곡 ‘Desert Eagle’ 콘셉트)’의 광란, 기계 같은 음성변조와 미니멀-맥시멀 라인을 광적으로 해체시켰다 조립하는 다채로운 악곡 구성들. 각자 멜로디를 써오고 앙상블식으로 이어 붙이다 보니 생경한 스케이프가 일어나고, 그것은 기존 소리들의 주파수와 연결되는 새로운 다중우주를 낳는다. ‘Desert Eagle’-‘NO PAIN’을 잇는 ‘Tik Tak Tok’의 대곡적인 멜로디라인과 메인리프, ‘에이블톤라이브 DAW’(‘MAX MSP 코딩프로그램’ 내 플러그인) 같은 ‘뉴 인스트루먼트’의 도입, 박제되기보다는 둥글게 흐르도록 놔두는 가사의 창작 방식, 음악과 실시간 동기화하는 패션 착장…,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조명과 비디오로 쌓아 올린 비행선체 같은 무대로 구현하는 순간, 시공은 뒤틀린다. 정작 본인들은 연출보다는 Weather Report, Miles Davis를 동경하며 연주 중심의 앙상블을 추구하는 팀이라지만. ‘록의 사멸’을 이야기하는 한국 대중음악 신의 최전선에서 실리카겔은 분명 독보적인 색채로 음악적, 장르적 저변을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아이돌의 전유물로만 여겨지는 숏폼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고, ‘요즘 시대의 록’이라는 테제를 극한값까지 끌어올리며. 실리카겔 붐은 결국 근간이 탄탄한 좋은 음악이 컨템퍼러리 힙스터 문화를 관통할 때 일어나는 화학작용이며, 현시점 한국 록의 분명한 미래다. ‘펜타포트’와 같은 국내 대형 페스티벌부터 홍콩 ‘클라켄플랍’과 일본, 대만까지 거친 ‘기계소년(EP 음반 ‹Machine Boy› 속 캐릭터)’의 꿈은 더 넓은 세계로 비상(飛上)하려 한다. K라는 카테고리에 묶이기 보단 치열하고 비상(非常)한 록으로, 한국 대중음악 신의 팽창 우주는 여기에. – 공식 선정의 변

06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실리카겔 싱글 ‹NO PAIN› 커버

조혜림: 2023년 가장 많은 페스티벌에서 만날 수 있었던 실리카겔의 거침없고 열정적인 행보와 음악적 진화는 그들이 올해의 음악인이라는 점을 인정하게 만든다. 실리카겔은 쉴 틈 없이 달렸고, 끊임없이 발전했으며, 인디 신의 선두에 서서 부흥을 이끌었다.

신샘이: 실리카겔은 지난해 현장에서 음악 팬을 가장 많이 만난 뮤지션 중 한 팀일 것이다. 이들은 각종 음악의 장에 참여해 그곳에 있는 관객들을 실리카겔의 팬으로, 더 나아가 록 음악 장르의 팬으로 섭렵했다. 용기 있게 가장 최첨단의 음악을 들려주면서도, 대중을 만나기 위해 어디든 나아가는 이들의 자세와 기세는 올해의 음악인이라는 타이틀에 손색이 없어 보인다.

김윤하: 실리카겔에 대한 말은 사실 올해의 음악인 후보 선정의 변에 거의 다 했구나 싶다. 다만 이들이 데뷔 후, (너무 길다면) 적어도 2023년 한 해 동안 보여준 놀라운 활약을 뒷받침하는 성실과 뚝심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이야기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NO PAIN’의 히트, 누구나 혹할 만한 ‘밴드 붐은 왔다’라는 말은 화제성을 모으기 위해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다. 그 눈부심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다면 이제는 그 안에 숨은 진짜를 볼 때다.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한 이유에는 지금의 반짝임만이 아닌, 앞으로 한국 대중음악을 전례 없는 방식으로 이끌고, 파괴하고, 다시 만들어낼 그룹에 대한 신뢰도 함께 어려 있다. 더불어 정국, 뉴진스, wave to earth 등의 후보를 보면서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작곡가, 제작사, 활동 반경 등의 기준에 대해 ‘한국’ 또는 ‘한국인’이라는 제한이 필요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오갔던 것이 조금 허망해진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변화가 찾아올지, 이래서야 도무지 한국 대중음악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다.

실리카겔 수상 소감

07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올해의 신인 – KISS OF LIFE

2000년대 미국 힙합/R&B를 흡수한 케이팝의 익숙한 향취, 수많은 것을 끌어와 분방하게 조합하며 맥락을 창작하고 이를 정교한 구성미로 마감하는 케이팝의 작법, 그러나 이를 아주 낯설게 재연한다. 매우 케이팝적이면서도 동시에 이질적이고, 복고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이다. 좋은 취향과 날카로운 안목, 군더더기 없는 완성도, 유려한 힘과 관능, 탄탄한 기량과 참신한 과감성이 조합되었는데, 그 양상을 ‘모범적’이라 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그 표현이 이들의 용감한 도전을 빛바래게 할까 하는 우려 뿐이다. KISS OF LIFE를 올해의 신인으로 꼽는 의의는 케이팝이 (여전히) 새로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임을 확인하는 데에도 있다. 이 놀라운 신인의 데뷔를 꼭 기억해야 함은 물론이다. – 정식 선정의 변

08_한국대중음악상_korean Music Award

키스오브라이프 미니앨범 ‹Born to be XX› 커버

조혜림: 거를 타선이 없었다. 올해 한국대중음악상 후보들은 누가 수상을 한다 해도 아낌없이 박수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정적으로 보자면 압도적 1위가 없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듣기 좋고 훌륭한 음악들이 장르별로 골고루 포진했다는 점은 리스너들에게 풍요롭고 행복한 일이다. 그 와중에도 확연히 빛나는 것은 종합분야였다. 키스 오브 라이프의 특색 있고 짙은 농도의 음악은 신인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프로페셔널했고, 다양한 분야의 반짝이는 신인 사이에서 멤버별로 다채로운 재능과 개성을 뿜어냈다. 키스 오브 라이프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이해인의 높은 안목과 전직 아이돌로서의 경험치가 돋보인다.

신샘이: 케이팝 시장이 레드오션이 된 건 오래전 일이지만, 키스 오브 라이프는 그 틈을 발견해 케이팝을 더 새롭고 풍성하게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이들은 20년 전(때로는 그보다 멀리) 미국의 R&B/힙합 음악을 자료실 삼아 자신만의 사운드와 몸짓으로 만들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멤버들이 과거의 음악을 마치 자신 속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자연스럽고 자신감 있게 소화한다는 점이다. 이번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 후보엔 일렉트로닉, 글로벌 컨템퍼러리, 재즈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가들이 이름을 올렸다. 한국대중음악상이 그중에서도 키스 오브 라이프의 손을 들어준 건 케이팝이라는 장르의 새로운 가능성까지 보여줬다는 점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수정: 후보작과 수상작을 두고 사실 아쉬움은 없다. 그러나 다양한 장르에서 올라온 아티스트와 음악을 두고 종합적인 순위를 매기는 일은 언제나 난감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신에 공헌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크다. 딱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는 신인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다. 보통 최우수 장르분야 후보에 오른 신인은 ‘올해의 신인’ 후보로도 오르는데, 데뷔 음반을 낸 해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낸 아티스트가 드물다는 사실은 지금 음악 산업의 한 현상을 반영하는 지점인 것 같아 씁쓸해지기도 한다. 우린 언제나 세상을 놀랍게 할 만한 신인이 가장 기다려지는데 말이다.

김윤하: 재즈, 일렉트로닉, 글로벌 컨템퍼러리 등 다양한 장르의 신인이 후보군에 이름을 올린 가운데 케이팝 부문에서 KISS OF LIFE와 H1-KEY(하이키), 두 여성 그룹의 약진이 이채로웠다. 2023년 케이팝이 그 어느 해보다 신인 남성 그룹을 다수 배출한 해였기에 더욱 그랬다. 많은 이들이 5세대, 이지리스닝, 청량 등 특정 키워드에 천착하는 사이, KISS OF LIFE와 하이키는 자신만의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하며 의미 있는 숫자의 팬덤 구축과 전문가의 음악적 호평을 동시에 끌어냈다. 힙합과 R&B를 바탕으로 한 장르적 개성을 토대로 멤버들의 탄탄한 실력을 쌓아 올린 KISS OF LIFE와 케이팝이 줄 수 있는 힘찬 에너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낸 하이키는 2024년에도 얼마든지 주목할 만하다.

KISS OF LIFE 수상 소감

Writer

블럭(@bluc___)은 만들고, 연주하고, 부르는 거 빼고 음악과 관련한 일은 다 하는 사람이다. 글도 쓰고, 기획도 하고, 진행도 하고, 제작도 한다. 한국대중음악상 사무국장으로 일하며, «디자인 프레스» 객원 기자로 활동한다.

아카이브가 이러니 얼마나 좋게요: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아카이브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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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애티튜드가 주목하는 요즘 ‘무엇’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아카이브archive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무언가 빽빽이 눌러 담은 자료집이 떠오르는데요. 하지만 전시 아카이브가 늘 그리 무겁기만 하다면 숨 막힐지도 몰라요. 작품과 전시를 효과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게 가장 중요하죠.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을 아카이빙한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아카이브 신문’은 그래서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물리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무리 없이 녹아드는 친근감은 물론, 작가의 입을 빌리지 않고도 전시의 이모저모에 대해 소곤거리는 방식이 호기심과 이해도를 쑥쑥 높이거든요. 잘 읽고 서랍에 넣어놓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요. 오는 4월 7일 끝나는 전시를 독특하게 아카이빙한 이 ‘물건’에 대해 알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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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근처를 지나갈 일이 생긴다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한 가지를 추천한다. 옛 국군기무사 건물의 외형이 그대로 남은 도로변 입구로 진입하면 오른쪽에 미술책방이 있다. 의외로 아는 사람만 아는, 숨겨진 밀지다. 사실 나도 왼쪽에 있는 미술가게에 자주 가며 탐심을 내보인 적은 많지만, 건너편에 있는 미술책방은 미술가게와 유사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지나치곤 했다. 근데 얼마 전 친한 지인이 미술책방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있다고 귀띔하는 것이 아닌가. 아주 가볍고 휴대성도 용이해서 꼭 추천한다는 말이 얼마나 달콤하게 들리던지. 기대에 찬 마음으로 미술책방에 들어가 뭔가 가져갈 만한 것을 눈짐작으로 훑고 있는데 데스크를 관리하는 분이 친절하게도 말을 걸어주신다.

“어떤 걸 찾으세요?” 조심스레 물건과 관련한 키워드를 말했다. “저…‘프로젝트 해시태그’라고…” 이윽고 내 눈에 펼쳐진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신문이었다. 꽤나 귀여운 일러스트레이션이 커버를 장식한 타블로이드 사이즈 인쇄물은 진짜 신문에 쓰이는 재생지로 만들어서 정신없이 들고 다니다가 젖거나 찢길까 봐 저절로 조심스러워졌다. 신문의 제호 자리에는 큰 글씨가 박혀 있었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아, 키워드가 아니라 정확한 제목이었구나. 교양 넘치는 내 지인이 이 신문을 왜 추천했을지 순간 고개가 갸웃거렸지만, 단수가 아니라 1호와 2호로 이루어진 ‘복수’의 물량에 탐심이 동하고 말았다. 일단 챙기고 나온 후 테라로사에서 커피를 시키고 주르륵 훑어봤다. 근데 아니, 이거 꽤나 재밌잖아? 심지어 정보까지 알뜰하다니. 집으로 가져갈 마음에 진실한 보호 본능이 깨어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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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아카이브 신문’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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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아카이브 신문’ 2호

내가 조우한 물건의 공식 명칭은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아카이브 신문’이다. ‘프로젝트 해시태그’라면 나도 잘 안다. 2019년 시작해 이제는 연례행사처럼 서울관에서 꾸준히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차세대 창작자 공모전 아니던가.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하지만 지식이 있다고 진짜 아는 건 아니다.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서울관을 참새 방앗간 들리듯 오갔지만 ‘프로젝트 해시태그’의 실체를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인이 최종 팀으로 선발된 사실을 알고 축하의 말을 건네면서도, 실제 전시를 보러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울관은 지하 세계로 한번 내려가면 혼이 빠지기 일쑤인데, 이 광대한 예술 지옥으로 직행하는 에스컬레이터 선착장을 코앞에 두고서, 바로 뒤편에 입구를 낸 전시실로 유턴하기에는 아무래도 애매한 감이 있었다.

그런데 아카이브 신문이 내 마음을 돌려놓을 줄이야. 서울관 개관 이래 1층 전시실을 처음으로 가봤다. 지금 열리고 있는 전시인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도 처음으로 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3시간을 보냈다. 강박적으로 전시의 모든 요소를 스캔하는 내 성정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재미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다.

04_프로젝트 해시태그_project hashtag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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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이번에 선정된 주인공은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이하 RBSC)’와 ‘랩삐’다. RBSC는 ‘사회적 발효’라는 개념으로 비인간과 인간,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협업에 초점을 맞추는 팀이다. 이번에는 바다에서 자생하는 해조류와 이를 둘러싼 섭생과 산업에 대해 연구했는데, 부산 앞바다에서 채취한 우뭇가사리를 끈끈한 점액질로 만들어 굳힌 우무를 주재료로 전시를 꾸몄다. 전시장에는 우무를 덩이째 조형한 후 식용색소를 더해 만든 오브제들이 곳곳에 놓여있고 (살짝 만져볼 수 있는데 정말 독특하다), 우무를 피막처럼 펴 발라 굳힌 작업을 아주 천천히 변형하는 파티션처럼 배치해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눈앞에서 펼친다. 우뭇가사리가 자라는 밀생지이자, 착취 없이 꾸준히 얻을 수 있는 재료의 생산시설, 그리고 만들어진 결과물이 자연으로 분해되는 과정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묶는 이름으로 ‘공생체은하수’를 선택한 것도 무척 낭만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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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즈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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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무덩이›, 2023. 사진 제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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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라이스 브루잉 시스터즈 클럽 ‹공생체은하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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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체은하수› 연계 프로그램 안내

랩삐는 ‘놀이노동(playbor)’을 주제로 정말 재미있는 결과물을 내놓았다. ‘토스TOSS’로 추정되는 금융 플랫폼이 뿌리는 코인을 얻기 위해 점심시간마다 앱에 접속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휴식 시간을 교묘하게 노동으로 치환하는 놀이노동을 떠올린 게 작업의 계기라고 한다. 랩삐는 작은 밭을 엉성한 솜씨로 개간해 옥수수 모종을 심고, 벌레와 날씨, 조류, 고라니, 멧돼지에게서 좌충우돌 밭을 사수하며 옥수수를 키워낸다. 그리고 이 귀한 수확물로 강냉이를 만들고, 소량으로 포장한 후 전시실에 갖다 놓았다. 오직 전시실의 QR 코드로만 접속되는 모바일 게임을 통해 자신들이 겪은 옥수수 농사를 똑같이 클리어한 관람객에게 리워드로 강냉이를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강냉이 털어 국현감’이란 유머러스한 이름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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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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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삐 팩토리›, 2023. 사진 제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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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모르겠고 강냉이 털기에도 바쁩니다›, 2023. 사진 제공: 작가

게임 못하기로 자타공인 소문난 입장에서 몇 번을 실패하고서 겨우 클리어했는데, 그 과정에서 옥수수 농사를 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랩삐는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프로세스를 외울 정도로 몰두했다. 그들의 고된 농사 과정이 어느새 내 휴대폰 속 디지털 노동으로 치환되는 걸 보며 감탄이 나왔다. ‘이게 놀이노동이구나!’ 예상처럼 돌아가지 않는 농사일과 연달아 터지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이 동원하는 각종 편법을 비롯해 원초적인 기원 의식에 몰입하며 노동요와 저주요를 펼쳐내는 영상 작품 속 모습은 한 편의 블랙 코미디로 비쳤다.

아카이브 신문은 본 전시와 깊게 연결돼 있으면서도 동시에 독립적으로 기능한다는 면에서 아주 재미있는 존재다. 나 같은 경우, 신문 덕분에 낯선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고, 브로슈어와 티켓 이외의 기념품을 하나 더 챙길 수 있었으며, 무엇보다 전시에서 다루지 못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읽으며 두 팀의 프로젝트에 대해 총괄적으로 접근하는 기회를 얻었다. 아마 다른 이에게는 전시를 직접 관람하지 않더라도 주제와 연계한 여러 가지 활동(타블로이드 신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각종 게임이 있다!)을 즐길 수 있는 여가 콘텐츠, 전시장에서 작품을 더욱더 유심히 관찰하도록 돕는 돋보기, 그 자체로 집에 가져가 서랍에 보관할 만한 흥미로운 물건으로 기능할 것 같다. 지향하는 포지션이 여러모로 영특하다.  

실제로 아카이브 신문 1호는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살살 불러 모아 전시에 대한 필수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데 최적화됐다. 커버부터 돋보기 탐험이다. 숨은 미생물과 강냉이를 찾으라며 전시에 등장하는 여러 요소를 일러스트레이션으로 표현하고, 짝맞추기 놀이로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는 모양새가 마치 어린이를 위한 친절한 교보재를 연상시킨다. 이건 분명히 칭찬이다. 전시와 관련한 수많은 정보를 천천히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하기 때문이다. RBSC와 랩삐의 작업에서 중요한 배경인 부산 앞바다와 강화도 옥수수밭을 귀엽게 묘사하는 접근법은 독자에게 본능적인 호감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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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아카이브 신문’ 1호 표지

이런 기조는 1호에 수록된 두 편의 글에서도 이어진다. 미술 전문 필자가 친절하게 작성한 전시 안내 글은 매우 부드럽고 쉽게 읽힌다. 제목부터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을 위한 가이드’다.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자연스럽게 전시에 대한 설명에 녹아들며 심리적인 긴장을 놓게 된다. ‘우뭇가사리와 강냉이가 미술관으로 간 까닭은…’이란 제목의 두 번째 글은 오랜 기간 인터넷으로 다져진 클릭 본능을 간지럽힌다. 셰프 겸 푸드 라이터로 활동하는 해당 필자는 식재료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과 전문성을 기반으로 우뭇가사리 등 음식과 관련한 일화를 전시 내용과 엮어 글로 풀어낸다. ‘프로젝트 해시태그’가 추구하는 타 분야와의 자유로운 연결과 소통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게다가 글이 끝나는 시점마다 한 페이지 전면을 신문용 게임에 온전히 배정한 점은 자칫 지식에 체할 수 있는 사람을 위한 최고의 배려다. (내 머리로는 풀 수 없었지만) 네모 로직과 빙고 게임을 통해서 아날로그로 돌아가는 추억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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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뒷면에는 웹사이트 광고와 함께 QR코드를 노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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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에서 신문 게임의 정답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훌륭한 점은 실제 타블로이드 신문에 있을 만한 요소를 활용해 프로젝트와 관련한 정보를 독자에게 스며들게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문에 꼭 들어가는 작은 광고 박스에 전시 정보를 넣는다든지, 뒷면에 신문 홍보 문구와 함께 아카이브 신문의 웹사이트와 직결되는 QR 코드를 박아 놓았다든지. 이는 실물이 없어도 아카이브 신문을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게 하는 영속적인 포털 역할을 하면서도, 독자에게 뿌려놓은 게임의 정답을 확인하는 유일한 답안지로 기능하며 자발적인 접속을 유도한다. 친절하게도 2호가 나온다는 사실까지 홍보하니 뭔가 더 있겠구나, 기대감까지 심는다. 실로 요망하다.

2호는 또 어떠한가. 1호를 통해 전시에 대한 저항감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더욱더 노골적으로 전시에 대해 다룬다. 하지만 전시 자체를 파고드는 게 아니다. 작가들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함께 교류한 협력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마치 작가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엿듣는 느낌이랄까. RBSC에게 해조류의 세계에 대해 알려준 자연형태연구소 & 동주책방 운영자 이동주 박사, 부산에 거점을 마련해 준 알티비피 얼라이언스 김철우 대표와의 인터뷰를 비롯해 랩삐 작업의 핵심인 ‹원 클릭 쓰리 강냉이› 게임을 구현한 박정수 개발자, 옥수수 농사를 ABC부터 가르치며 결국 강냉이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입성하게 만든 일등 공신이자 랩삐 멤버의 이모부인 오홍식 농부의 인터뷰까지! 전시 뒤편의 공로자들이 궁금한 관람객에게는 마치 단비와도 같다. 전시를 보지 않은 사람들 또한 인터뷰를 읽다 보면 어느새 두 팀의 작품 세계와 전시 준비 과정을 다각도로 알 수 있다.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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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에서는 협업자 네 명의 인터뷰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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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트 일러스트레이션이 인상적인 그래서 이모부님께 물었다 인터뷰 섹션

실제 전시에 참여한 두 팀에게 직접적인 발화를 요구하는 대신, 그 주변부의 핵심 인물을 공략해 고유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은 괘씸할 정도로 똑똑하다. 아카이브 신문의 가치를 독립적으로 극대화하기 때문이다. 전시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몰입해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레 전시 전문가로 변한다.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에 대한 흥미와 이해도를 높이는 데 아카이브 신문이 기묘한 방식으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불어 맨 마지막 장의 대형 광고란에는 «프로젝트 해시태그 2024»에 대한 공모 소식까지 알리니, 완결하는 모양새까지 촘촘하기 그지없다. 화룡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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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해시태그 2023 아카이브 신문’의 또 다른 미덕은 물성을 가진 컬렉터블한 인쇄물의 형태로 전국 곳곳에 뿌려진다는 점이다. 서울, 경기, 인천, 강원, 대전, 충청, 전라, 광주, 경상, 대구, 부산, 제주까지 총 33곳에 달하는 장소에 신문 수백 부를 배치해 무료로 나눠준다. 서울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전시와 관련한 흥미로운 정보를 편히 알 수 있는 수단이자, 전시를 새롭게 체험하는 대체재이며, 시간이 된다면 전시를 직접 체험하라고 소곤거리는 초대장과도 같다. 웹사이트, SNS 등 온라인으로 정보를 뿌리는 게 상식인 시대에 오프라인 배포처를 고집하며 얻은 이점은 아주 확실하다. 손으로 재생지를 넘기고 코로 잉크 냄새를 맡으며 온라인 속 가상 세계와 다른 실재적인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인간은 본신과 함께 시간과 공기를 공유한 존재에게 상상 이상의 애정을 지니기 때문이다. 각종 정보로 빼곡한 작가 중심의 결과물이 근본으로 취급받는 세상에서, 타블로이드 신문의 모습을 띤 얇고 가벼운 아카이브의 등장은 그래서 무척이나 반갑다. 아카이브가 이러니 얼마나 좋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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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전종현은 국민대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한국문화관광연구원 RA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월간 «디자인» «SPACE 空間» «노블레스»에서 에디터로 일하며 디자인매거진 «CA»와 «허핑턴포스트코리아» 등에 다양한 칼럼을 썼다. 주거 건축을 다루는 «브리크» 부편집장, 편집위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고, 2021년부터 2023년까지 기아글로벌디자인센터와 함께 «기아 디자인 매거진» 창간 작업과 콘텐츠를 총괄했다. 현재 디자인·건축 저널리스트로 «조선일보» «디에디트»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에 기고 중이며, 동시대 한국의 기발한 창작자에 주목하는 «비애티튜드» 편집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