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스오브서울: 김사월 ‹디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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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ce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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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다채로운 대화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피스오브서울Piece of Seoul’은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 님이 최근 새롭게 발매한 한국 대중음악 앨범 중 가장 인상 깊은 피스를 꼽고, 해당 뮤지션과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피스오브서울에서 피스는 조각(piece)이면서 동시에 평화(peace)를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태어난 새로운 음악의 조각과 여기에서 길어 올린 마음의 평화를 뮤지션의 목소리로 직접 들을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피스의 주인공은 올해로 솔로 데뷔 10년을 맞이한 싱어송라이터 김사월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채우는 뜨겁고 눅눅한 감정에 끈질기게 부딪히고 관찰하면서 매 순간을 디스코그래피로 성실하게 채우던 그가 얼마 전 네 번째 정규 앨범 ‹디폴트›를 내놓았습니다. 낙관도, 비관도, 긍정도, 부정도 없는 디폴트 상태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노래하는 음악가 김사월의 이야기를 피스오브서울에서 확인해 보세요.

‘나를 아껴줘 아니 그냥 내버려둬’에서 ‘사랑 없는 세상이 디폴트’까지 10년이 걸렸다. 농담으로라도 짧지 않은 그 세월이 유독 짧게 느껴지는 건, 매시간을 밀도 높게 채워온 김사월의 공이다. 네 장의 정규 앨범, 두 장의 라이브 앨범, 몇 장의 EP와 몇 장의 싱글. 빈칸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히 쌓인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보고 있으면 음악가는 음악으로 세상과 교류하는 존재라는 말이 새삼 와닿는다. 그토록 성실하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채우는 뜨겁고 눅눅한 감정에 끈질기게 부딪히고 관찰해 온 그가 이번에 닿은 곳은 낙관도, 비관도, 긍정도, 부정도 없는 ‘디폴트default’ 상태다. 두 눈을 꾹 감고 포맷 버튼을 누른 후 나타나는 새하얀 화면처럼 원점으로 돌아온 그는 그렇게 노래하는 게 자신의 숙명이라는 듯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여전히 노래한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을 거란 믿음에 마음이 든든하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 네 번째 정규 앨범 ‹디폴트DEFAULT›를 가지고 돌아온 김사월과 앨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 글 말미에 인터뷰어가 작성한 김사월의 정규 4집 소개글 전문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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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월 정규 4집 ‹디폴트› 커버

얼마 전 ‘사월쇼’를 마쳤어요. 간단한 소감 부탁드립니다.

일단, 전 아직 쇼를 마치지 못했고요. 아직도 사월쇼를 하는 중인 것 같아요. (웃음) 실감이 안 나요. 그 순간을 기다리면서 무척 오랫동안 준비했거든요. 엄청나게 만끽한 시간이었고, 지금도 그냥 그 기분과 장소에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둘째 날 보러 갔어요, 공연이 열린 성수아트홀을 비롯해 오프닝부터 엔딩까지 정말 만족도가 높은 공연이었어요. 특히 이번 사월쇼는 앨범 수록곡을 순서대로 들려주는 형식을 택했는데요, 기획 배경이 있을까요.

제가 사월쇼를 만들게 된 건 김사월이라는 음악가를 알리고 싶어서였어요. 활동을 계속하면서 평소에 하지 않던 시도를 재미있게 도전해 보는 쇼로 자리 잡았고요. 작년에는 10주년을 맞아 음악과 결혼도 했죠. 그런데 사월쇼를 10번 정도 했는데, 생각해 보니 공연에서 앨범을 제대로 홍보한 적이 없더라고요. 제가 보통 가을에 앨범을 내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정규 4집을 낼 즈음에 고민이 들었어요. ‘하던 대로 가을에 발표할까? 아니면 봄에 내서 사월쇼까지 같이 가볼까?’ 결국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이번이 벌써 4집이니까 저도 스스로 전력을 다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거든요. 또 그런 노골적인 홍보가 잘 어울리는 앨범이라고도 생각했어요. 대놓고 사랑받고 싶어, 갈구하는 앨범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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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회 김사월 쇼: 디폴트› 포스터

라임부터 좋네요. 4집과 사월쇼. (웃음) 개인적으로 앨범 쇼케이스처럼 공연을 구성한 게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특히 앵콜 ‘젊은 여자’를 밴드 멤버들과 둘러앉아 부르는 아이디어와 거기에 마지막 곡 ‘접속’이 이어지면서 자아낸 감상이 무척 특별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사흘 동안 공연하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나요.

공연의 모든 장치가 행복하고 특별했어요. 김사월 밴드, 브라스, 코러스, 댄서, 3일간의 의상, 조명, 무대 장치들… 그렇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대기실에 앉아 있던 출연자들 모습이에요. 다들 긴장감과 설렘 등의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그렇기 때문에 더 장난치고, 떠들며 노는 그 모습이 너무 좋았어요. 그걸 보면 저는 안심해요. 저 사람들 믿고 그냥 하면 되겠다, 생각하죠. 이렇게 행복한 현장이 어디 있을까 싶어요. 그리고 마지막 날 앵콜 곡 ‘접속’에서 관객분들이 휴대폰 플래시를 켜주셔서 관객석이 반짝거렸거든요. 제가 공연 중 객석 플래시와 함께한 경험이 거의 없어요. 그런 풍경은 함께 하나 되는 노래에나 어울릴 텐데, 제 노래 중에 해당하는 곡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무척 작고 외로운 노래인 ‘접속’을 부르며 객석 플래시를 본 건 정말 충격이자 큰 감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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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이 벌써 정규 4집이에요. 감회가 궁금합니다.

지금 발매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요. 발매 직전 인터뷰를 하면서 앨범의 구조나 내용을 잘 전달하고 싶은 마음에 엄청 열심히 대답했던 것 같아요. 이번 앨범은 어떤 앨범이고, 앨범을 내고 나니 어떤 마음이 드는지 제대로 대답해서 잘 남기고 싶었어요. 그렇게 인터뷰를 쭉 한 뒤 지금에야 비로소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바로 전혀 실감이 안 나고 ‘이제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입니다! (웃음)

구체적으로 어떤 ‘어떡하지’인가요. (웃음)

이제 뭐 하지, 다음 작업은 뭐 하지, 이번 엉엉콘에서는 뭐 하지… 내년 사월 쇼는…’ 같은 생각입니다. 음악가가 늘 꾸준히 활동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약간 그런 리듬이 생겨버려서 부담도 돼요. 그러나 다음 것을 해야 하므로 덜 쳐지고, 어쩔 수 없이 힘을 낸다는 점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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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랜 시간 차근차근 여유롭게 준비한 앨범이라 그런지 사월 님에게 남다른 작업이었다고 들었어요.

막상 대답하려고 하니까 좀 쑥스러운데요, 보통 오랜 기간 준비했다고 하면 최소 5년, 7년,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저는 이번에 한 3, 4년 가져봤습니다. (웃음) 제가 지금까지 정규 앨범을 낼 때마다 제작 기간이 너무 짧았어요. 만든다는 게 결국 다 비용과 연관이 되어 있잖아요. 제가 앨범 제작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돈도 벌고 삶을 살아야 하는데, 제작 기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비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항상 시간에 쫓긴 거죠. 첫 앨범이었던 ‹수잔›은 거의 일주일 만에 모든 보컬 녹음을 다 했어요. 다른 앨범도 거의 그랬고요. 물론 앨범 구성과 기획은 차근차근 준비하지만, 실제 레코딩에 들어가면 ‘이게 다 돈이다!’라고 생각하며 엄청나게 집중해서 완료하는 편이에요. 그에 비하면, 이번 앨범은 정말 여유로웠어요. 구상은 2022년쯤부터 했는데요. ‘이런 걸 만들어 볼까?’ 생각을 구체화한 후 이듬해 녹음을 시작했죠. 밴드 녹음은 2023년 여름에 집중적으로 했고요, 보컬 녹음은 반년 정도 잡고 천천히 녹음했어요. 하루에 한 곡쯤 녹음하고, 한 2주 있다가 또 한 곡 녹음하고요. 원래 다 그럴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거든요.

거의 차력 수준의 녹음 스케줄이네요. 집중도가 장난 아닐 것 같아요.

자체 제작을 하는 음악가는 다들 그럴 거예요. 시간을 최대한 알뜰하게 써야 합니다. (웃음) 그런데 이번 앨범 작업에서는 시간을 럭셔리하게 쓰는 경험을 스스로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언제 이렇게 해보나?’ 싶더라고요. 아직 젊고, 에너지가 있고, 그래서 제작비로 모아둔 돈을 다 써도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그렇게 했어요. 오만하지만 이 시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결의도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인’을 한 앨범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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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여유롭고 길게 해보니까 어떤가요?

너무 좋아요! (웃음) 정말 좋고, 계속 계속 작업하고 싶은 거예요. 어느 순간부터 앨범을 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 이 작업을 하는 이 기분이 너무 좋다’라는 쪽으로 생각이 흐르니 앨범에서 정 떼기가 많이 힘들었어요. 매일매일 가다듬고 예뻐하면서 지내다가 이 애틋한 돌봄을 이제 그만하고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더라고요. 이별이 다가오는 느낌이랄까요.

이런 비유가 어떨지 모르겠는데요. 아이가 있는 제 친구들이 말하길, 아이가 처음 유치원 갈 때, 작은 가방을 메고 잡고 있던 손을 탁 놓으면서 “갔다 올게!”하고 유치원 버스나 횡단보도로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기분이 그렇게 묘하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그런 거랑 비슷한 거 아니었을까 싶네요.

발매 당일 구글 드라이브가 아니라 멜론에서 제 음악이 나올 때 느낀 기분이 바로 그거 같아요. ‘음원 유출된 거 아닌가? 쟤가 왜 저기에 있지?’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지금 작은 책가방이 눈앞에 보이는 느낌이 드네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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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많은 애정을 담아 만든 곡들로 구성한 앨범이라는 의미일 테죠. 가장 오랫동안 보듬은 곡은 무엇인가요?

평소 고민과 후작업은 오래 하지만, 녹음은 편하게 금방 끝내는 스타일인데요. 이번에 ‘너의 친구’가 의외였어요. 드럼 세팅도 고민돼서 두 가지 버전으로 녹음했다가 하나를 골랐고요. 제 기준으로는 보컬도 바이브 좋게 한 번 쓱 녹음하면 끝나는 곡인데, 뭔가 마음에 안 들어서 한 번 더 녹음한 기억이 나요. 저희끼리 “얘는 선공개도 아니고 타이틀도 아닌데 왜 두 번이나 녹음하냐?” 애정 어린 구박을 하기도 했어요. 오래 보듬은 곡이라면 ‘가을 장미’가 있겠네요, 일전에도 밝혔는데, 이 곡은 관악 편곡이 두려워서 제가 완성을 계속 미루고 미룬 곡이었어요. 그러다가 올해 1월에 결국 편곡을 끝내고 보컬 녹음을 했어요.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그날 마이크랑 제 상태가 너무 좋은 거예요. 전이랑 다른 마이크를 썼거든요.

혹시 그 마이크 모델을 여쭤봐도 될까요?

‘가을 장미’ 보컬은 노이만 U89를 썼어요. 워낙 보편적으로 많이 쓰는 마이크라서 이번 앨범에는 고려하지 않고 재미있는 다른 세팅을 시도했어요. 그러다 마지막으로 녹음하는 곡이니 우연히 베이직한 마이크로 돌아온 건데, 그 표준적인 느낌에 감동한 것 같습니다. 말하고 보니 이 여정이 앨범 서사와도 비슷한데요?!

이렇게 또 큰 그림이 나오나요. (웃음) 앨범 제작을 마무리할 때 발견한 찰떡 마이크라니 아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디폴트’적인 마인드로는 ‘한 곡이라도 넣어서 다행이다’거든요. ‘물이 반이나 남았네’ 같은 거죠. 그게 ‘디폴트’에요. (웃음)

자연스럽게 앨범 ‹디폴트DEFAULT› 얘기로 넘어가 볼까요. 이번 앨범은 사월 님이 발표한 앨범 중 가장 긍정적이고 감정에 솔직하지 않았나 싶어요. ‘사랑받고 싶어’라는 말을 대놓고 해버리잖아요.

맞아요. 어쩌면 제가 그렇게 발화한 첫 번째 시도일지도 모르겠어요. ‘이젠 절 좀 사랑해 주세요’라고 말한 게 처음인데, 앞으로 못할 수도 있으니까 지금 뻔뻔하게 다 말해버리자는 마음과 의미를 담은 것 같아요.

그게 앨범을 처음 듣고 제가 가장 놀란 부분이었어요. 정말 이렇게 매사 솔직하게 모든 감정을 다 직구로 던져 버리는 앨범이 있었나, 하는 거죠. 심지어 ‘그냥 버려 버리라’고 말하는 앨범 도입부마저도 그래요. 뭔가 거리낌 없이 다 질러버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 곳에서 ‘디폴트’ 상태로 김사월이라는 사람과 감정을 하나하나 재건해 나가는 거죠. 마지막엔 느슨한 연대도 권유하고요.

저는 ‘다음 앨범 주제는 이걸로 해야지’ 생각하면서 앨범을 만드는 편은 아니에요. 오히려 그러면 부담돼서 작업을 못할 것 같아요. 뭐랄까, ‘앨범은 내도 되고, 안 내도 되지만, 곡은 꼭 만든다’라는 느낌으로 계속 곡을 만들어 가다가 그렇게 모인 노래 중 좀 더 큰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넘버가 생기면 앨범을 구상하고 만들게 되는 것 같아요. 정규 앨범 제목도 지금까지 그냥 다 수록곡 제목을 땄어요. 그 노래에서 이 앨범이 시작됐다는 뜻이기도 한데요. 그래서 이번 앨범 같은 경우에도, 당연히 노래 ‘디폴트’가 시작이었어요. ‘디폴트’를 만든 게 2022년 여름인데, 당시 상황이 제게 좀 강렬했던 것 같아요. 노래를 만들고 나니 이런 내용의 앨범을 만들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서서히 작업을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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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가 태어날 때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나요?

음악과 음악가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부풀려지거나 가치 절하를 받으면서 청자의 사랑과 배반을 겪기 마련이잖아요. 대중이 예전에 저를 좋아하셨어도, 지금은 아닐 수 있고요. 자연스러운 거지만, 좀 솔직하게 말하면 김사월이라는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할수록 느끼는 캐릭터의 한계 때문에 답답하던 때였어요. 열심히 한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잘 된다는 건 또 다 뭐냐, 싶은 거죠.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런 무력감과 들끓는 마음 같은 게 있던 시기였어요.

그런 배경에서 ’디폴트’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니, 곡이 사뭇 다르게 들리기도 해요. ‘디폴트’를 가리켜 앨범에서 가장 급진적인 곡이라고 소개했는데, 어떤 측면에서의 급진일까요? 특히 두 개의 구조로 나누어 ‘보컬은 위에서 장악하고, 밴드는 아래에서 지옥처럼 들끓는 상황’이라는 구조 설명이 재밌었는데요. 이런 구조를 만든 계기도 궁금해요. 뭔가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에 나오는 세계인 ‘Upside Down’ 같기도 하고요.

‘디폴트’의 벌스verse에서는 상처받기 싫으니까 기대를 낮추잖아요. 사랑 없는 게 디폴트니까 이 정도 사랑도 대단하고, 여기서 만족한다고. 하지만 그 말을 스스로 뒤집고 부정하면서 지금은 사랑 없는 시간이 아니고 사랑을 기다리는 시간인 거야, 난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고 싶어, 외치는 후렴이 등장합니다. 느낀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게 제가 지향하는 가사의 톤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솔직해지는 일은 아무래도 용기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부정적으로 들어가는 자신을 멈춰 세우고 방향을 돌려버리는 장면은 제 음악에서 처음 있는 시도였다고 생각해요. 사운드에 대해서는, ‘이제 부정에서 긍정으로 갑니다’가 아니라, ‘부정과 긍정, 그 무엇도 아닌 다른 애매하고 미묘한 감정들 모두 다 생생하게 느껴지며 폭발한다’가 ‘디폴트’답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연출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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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의 표제곡이자 대표곡인 ‘디폴트’는 앨범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덕분에 그 트랙을 중심으로, 앞뒤로 가지를 뻗어나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요.

처음에는 ‘디폴트’를 어디에 놓을지 꽤 고민했어요. 그런데 이 노래가 결국 자기 자리를 알아서 찾아가더라고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제가 어디에 따로 두려고 해도 결국 노래가 자기 의지로 거기에 가려고 하더라고요. 이 노래 앞에 뭔가 굉장히 진행되어 있어야 ‘디폴트’가 제힘을 발휘하며 표제곡으로 존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디폴트’가 자기를 그렇게 다 터뜨린 후 찾아오는 낙차나 황량함 같은 것을 다른 곡들이 또 받아줘야 하겠구나, 싶었고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흐름이 만들어지고 나니 아예 완전 반반 콘셉트로 데칼코마니 같은 앨범 구조를 더 강화하게 됐어요.

그렇게 허리에 중심을 두다 보면 앨범의 시작부에 생기는 부담감이 상당할 텐데요. 실제로 ‹디폴트›의 첫 곡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버려요’와 두 번째 곡 ‘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는 지금까지 김사월의 음악에서 가장 낯선 느낌으로 다가오는 곡들 아닐까 싶었습니다. 60~70년대 로큰롤 사운드를 바탕에 두고 있고, 제목도 운율이 맞아서 좀 쌍둥이 같기도 하고요.

사운드 측면에서는 이 앨범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끔, 일종의 ‘어그로’를 끌고 싶었던 것 같아요. 1, 2번 트랙은 사운드에 대한 항의성 의견도 많이 들었어요. 좌/우 소리도 다르다 보니까 제발 중간에서 음악을 듣고 싶다고요. (웃음) 그런데 곡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노래와 앨범에 이입하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 생각할 때가 있어요. 1, 2번 트랙은 이미 자아와 멘털이 분열된 상태에서 시작하는 곡이기에, 사운드 콘셉트를 지금처럼 확정해 버렸죠. 이제는 그런 반응을 조금 이해하기도 하지만요. (웃음) 그리고 서사에서도 1, 2번 곡들은 아예 한쪽으로 빼놓을 수밖에 없었어요. 앨범에서 가장 비관적인 기조가 많은 트랙이거든요. 그래서 내심 이 곡들을 빨리 처치해야 다음 곡과 이야기를 쌓아갈 수 있겠다고 동물적으로 계산한 것 같아요.

저도 앨범을 듣고 직관적으로 느꼈어요. ‘아, 이건 우선 다 무너뜨리자는 계략이구나.’ (웃음)

자기를 엄청 외롭게 하는 비관을 계속 쌓아가다가 너무 높게 쌓아서 결국 자기 혼자 무너져 버린 거죠. 그렇게 다 무너지고 바닥을 치고 보니 비로소 주위가 보이고 내 곁에 사람들이 있었구나, 깨닫게 되는 과정이 ‹디폴트› 속에 있더라고요. 윤하 님이 앨범 소개 글에서 그 부분을 짚어주셔서 좋았어요.

맡겨주셔서 제가 더 기뻤습니다. 두 곡은 언제나 함께하는 김사월 밴드와 원테이크로 녹음했다고 들었어요. 원테이크 레코딩에 돌발 상황이 많은데, 수월했나요?

이번에는 큰 녹음실에 가벽을 세운 후, 드럼 연주자가 아이패드로 메트로놈을 보면서 연주하고 그걸 들으면서 악기 연주자들이 함께하는 형태로 진행했어요. 녹음한 테이크 중 좋았던 것을 고르고, 그 위에 제 보컬과 코러스를 쌓아서 완성했죠. 노래를 진행하는 중에는 메트로놈이 일정하지 않고, 서로의 호흡에서 오는 미묘한 텐션과 그루브가 다르기 때문에 그 테이크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다는 걸 새삼 경험했습니다. 라이브를 위해 합주를 하면서 우리가 매번 다른 테이크를 연주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다시금 느꼈고요. 아무튼, 모든 게 다 한 번뿐이라는 거죠.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버려요’는 선공개 곡이었는데, 뮤직비디오도 색달랐어요. 영화 ‹수면의 과학›에 등장하는 ‘If you rescue me’도 생각나고요. 앨범의 전반적인 비주얼에 관해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사랑해 주세요 그리고 버려요’ 뮤직비디오의 인형 탈 아이디어는 감독님께 제가 따로 부탁드렸어요. 청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장치를 가지고 가고 싶었고, ‘버려요’라고 말하지만 절대 버리고 싶지 않게끔 사랑스러워 보였으면 했어요. 예전에 비틀스가 그런 모티프의 의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대담하고 불균형한 느낌이 좋아서 오마주하고 싶었습니다. ‹수면의 과학›의 유명한 신도 거기서 나오지 않았을까 유추해 봅니다. 앨범 비주얼에는 한 인물이 될 수 있는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어요. 젠더리스한, 극도로 페미닌한, 인형 탈을 쓴, 교복을 입고 얼굴에 멍이 든, 생과 사의 경계에 있는 인물들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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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남성과 여성의 특성을 극대화한 느낌으로 찍은 사진도 독특했어요.

처음에는 흰 배경에 서 있는 사람, 비틀스 초창기 앨범을 연상시키는 셔츠와 타이 차림 같은 걸 시도하고 싶었어요. 패티 스미스의 ‹Horses› 앨범 커버처럼 명징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비주얼 전문가들과 이런 모티프를 상의하다가 헤어 스타일을 아주 파격적으로 선택해 버렸어요. 그러고 나니 전반적 콘셉트가 좋은 의미로, 극단적으로 잡힌 것 같아요. 남성용 정장 같은 걸 입은 반항적인 여성 사람 같은 커버가 되었는데요. 저는 이 분열감이 이번 앨범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과하게 페미닌한 콘셉트도 있어요. 페미닌한 특성은 제가 가진 스펙트럼 중에서 스스로 복잡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소예요. 하트 하트 세상에서 사랑스럽게 꾸민 심드렁한 여자랄까요. 한 앨범에서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를 시도할 수 있어서 무척 만족스러웠어요. 함께해주신 전문가분들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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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 님은 자신과 결이 맞는 좋은 협업자를 잘 찾는다고 생각해요. 협업자에 관한 자신만의 기준이 궁금해요.

인스타그램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지만, 현재로서는 좋은 작업자를 찾고 연락하기에 가장 쉬운 플랫폼이기도 해요. 아티스트 계정을 팔로잉하며 저와 함께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용기 내어 연락드리게 되었어요, 이분들이 원래 잘하시던 걸 제가 최대한 잘 받을 수 있게끔 상황과 콘셉트를 유동적으로 조정하는 편입니다.

다시 앨범으로 돌아와 볼게요. 이번 앨범에는 타이틀이 ‘나쁜 사람’과 ‘디폴트’로 총 두 곡인데, 특별한 선정 이유가 있나요?

‘디폴트’는 이번 앨범을 기획하는 계기를 주었기에 당연히 타이틀이 되었고요. 앨범 구조상 중요한 노래들은 선공개로 발매하며 이미 제시했기 때문에 더블 타이틀은 듣는 사람이 편하게 소화하고 앨범에서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노래로 구성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나쁜 사람’을 선택하게 됐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앨범은 ‘디폴트’라는 곡을 기준 삼아 ‘새로운 김사월’과 ‘익숙한 김사월’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성한 느낌이에요. 앨범에 대한 주위 반응은 어떤가요?

무척이나 다양한 감정을 동시에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건 저의 대표적인 음악적 화법 중 하나인데요. 아예 앨범 구조까지 극단적으로 짜놓으니까 약간 개운하더라고요. 저를 잘 나타내는 구조인 것 같아요. 청자가 어떻게 느낄지 궁금해서 주변에서 앨범을 들었다고 하면 ‘무슨 곡이 제일 좋디?’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편이에요. 흥미롭게도, 반응이 반으로 갈렸어요. 전반부가 좋다는 분도 있고, 저를 오래 지켜본 분들은 후반부를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는 게 이번 앨범의 좋은 점이었어요. 최근에 느낀 건데, 의외로 ‘독약’파가 좀 있더라고요. ‘독약’이 퀄리티가 좀 좋게 나온 트랙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저희 밴드 멤버들은 전원 ‘가을 장미’가 제일 좋다고 하더라고요. 해당 곡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았다는 게 웃음 포인트에요.

그래서 제일 좋아하시는 거 아닌가요. ‘오히려 좋아!’ (웃음) 사실 저도 ‘가을 장미’를 가장 좋아해요. 곡 시작부에서 가을 낙엽이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제 심장도 같이 타는 느낌이랄까요. 앨범 발매 전 라이브에서 선보일 때도 인기가 많았던 곡이라고 들었어요.

그런가요. 제 체감은 라이브에서 인기가 많았기보다는, 저만 좋아하는 곡에 가까웠던 것 같은걸요. 앨범을 위해 편곡하면서 이 곡이 좀 더 좋아져 버렸어요. 아끼는 만큼 편곡에 대한 부담과 기대가 동시에 존재하는 곡이기도 했는데, 녹음 단계에서 클라리넷이나 플루트 연주가 잘 정리되니까 마음이 보람차더라고요. ‘가을 장미’는 저에게도 여러모로 마음에 많이 남는 곡이에요.

앨범 감상을 찾아보면, ‘가을 장미’가 마지막 곡인 줄 알았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이게 끝인가?’ 싶은 순간 ‘눈과 비가 섞여 내리는 밤’과 ‘밤에서 아침으로 가는 통신’이 등장하죠. 어떻게 보면 앨범의 에필로그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전반부 곡들처럼 쌍둥이 같기도 하고, 동시에 이 곡들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감정을 전하기도 해요.

두 노래를 비슷한 시기에 만든 건 아니에요. 그냥 제 삶에서 산발적으로 나온 노래들인데, 만들어 놓고 보니까 얘네도 붙여 놓을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자, 보세요. ‘눈과 비가 섞여 내리는 밤’, 그리고 ‘밤에서 아침으로 가는 통신’이잖아요. 이 두 곡을 어떻게 떼요. (웃음) 그렇게 서로 자석처럼 붙은 곡들이기도 하고, 1, 2번 트랙처럼 서로 못하는 얘기를 대신 도와주는 트랙이기도 해요. ‘더 나은 일이 있어!’ 같은 희망찬 얘기는 아니지만, 어쨌든 내일은 오고 삶도 계속된다는 걸 알려주는, 그런 곡들이에요.

그런 마음을 담아서인지 들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사월 님이 쓴 작가 노트가 떠올라요. “낙관과 비관을 내려놓은 상태”, “어둠 속에서도 빛을 기다릴 수 있는 깨끗한 마음”을 이상적인 디폴트 상태로 언급했으니까요. 이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나요?

그런 마음이 되기를 희망하면서 작가 노트를 쓰긴 했는데요. 앨범을 만들고 나면 그때의 문제의식에 대한 나름의 결론과 완전히 다른 시각이 제게 들어오는 것 같아요. 어쩌면 드디어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저에게 더 이상 중차대한 이슈가 되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깨끗한 마음을 기다리며 살겠다는 삶의 방향은 지금도 비슷하지만, 사실 인간은 낙관과 비관을 내려놓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요즘 제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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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 가운데 ‘칼’ 이야기도 빠뜨릴 수 없어요. 선공개 곡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오랜만에 김사월의 관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트랙이 아니었나 싶어서요. 언제, 어떻게 작업한 곡인가요?

2021년 초 재미로 사주를 봤는데요. 제 성질이 칼이라는 거예요. 나무나 물처럼 누군가와 화합하는 느낌이 아니라, 척 보기에도 차갑고 무서운 칼이 저를 나타낸다는 사실 자체에 약간 충격과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내 성질로 다른 사람을 지킬 수는 없을까?’ 다양한 생각이 이어지면서 만들게 된 곡이에요. 제 성질을 받아들이려는 시도이기도 한 거죠. 관능이라 표현해 주셔서 쑥스럽지만, 숨과 비음으로 만드는 보컬의 결이 저의 시그너처 같은 톤이라고 생각합니다. 섬세한 보컬을 쌓아가는 장면의 매력을 보여 드리고 싶었어요. 세밀하게 표현할 때 저 또한 쾌감을 느끼고요. 칼은 날카로운 특성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많이 달라지는데요. 이번에는 소재가 주는 아찔함에 초점을 맞췄어요.

‘못 우는데’와 ‘호수’도 앨범 중반을 탄탄하게 받쳐주는 곡들입니다. 공연을 보고 나서 두 곡이 더 좋아졌다는 반응을 많더군요. 저도 공연 뒤에 무심결에 ‘못 우는데’를 계속 흥얼대고 있더라고요. 두 노래에 대한 애정이나 후일담도 조금 나눠주세요.

‘못 우는데’는 대신 울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고, ‘호수’는 내 존재만으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 대한 불신과 승복을 담은 노래입니다. 후반부는 제가 주력으로 해오던 포크 색깔이라 더 부담되더라고요. 사실 저는 연주자로서 둔탁한 부분이 많아서 보컬이나 가사를 더 세밀하게 가져가는 경향이 있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연주할 때마다 능숙하지 않은 예쁨이 필요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못 우는데’와 ‘호수’는 ‘이런 색깔을 가진 음악이 어쩌면 너무나 나답구나. 그래서 이대로도 좋구나’ 하고 자신을 비로소 믿게 되는 작업이기도 했어요.

앨범 트랙 리스트를 쭉 보다 보면 1, 2번 트랙과 11, 12번 트랙이 앨범을 안정적으로 감싸 안아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지금까지 발표한 앨범 중 가장 탄탄한 구조를 갖춘 느낌인데요.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탄탄한 김사월이 담긴 앨범이라고 느꼈습니다. 앨범 발매 한 달이 지난 후, ‹디폴트›의 김사월을 어떻게 다시 바라보게 되는지 궁금해요.

이번 앨범 이후로 저라는 사람도, 음악도 좀 더 단단해지고 긍정적인 시대를 향해 가고 싶었어요. 아직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확답하긴 힘들지만, 지금으로서는 저의 수많은 감정과 관점 중 ‹디폴트›의 자리가 생겨났을 뿐이지 여기서 긍정으로 도약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요즘은 이전보다 더 어두운 감정도 많이 느끼거든요. 그런데 사람이 굳이 도약해야 하는 것도, 이제 철들었다고 증명하기 위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결국 저는 천국과 지옥 같은 감정의 스펙트럼을 모두 느끼고 그 자체를 긍정하는 방향을 선택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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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특히 정규 앨범이라는 건 사월 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제가 할 수 있는 표현 방식 중 가장 저답고도 고상할 수 있는 것, 제일 잘하고 싶은 것입니다.

올해로 데뷔 10년이 되었어요. 10년 전 상상하던 김사월과 지금의 김사월은 무엇이 같고 또 다른가요?

10년 전과 근본적으로는 달라진 점이 별거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표면적으로는 변화가 많은 것 같아요. 생계 활동이 되면서 성격도 조금 사회적으로 바뀌었고,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면서 책임감도 느낍니다. 청자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 드리고 싶은 부담감도 느끼고요. 그런데 표면적인 건 내일이라도 당장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근본적인 것, 즉 ‘이걸 왜 하는가?’에 대한 마음을 등대 삼아 앞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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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이번 ‘피스오브서울’은 ‘현대카드 BONUS TRACK’에서 인터뷰어와 김사월이 진행한 대담 내용을 일부 수록했다.

* 김사월 정규 4집 ‹디폴트›: 김사월의 새로운 화학식

포기하면 편하다는 건 맨 처음 누가 말했을까. 과연 포기하면 편하다. 까짓거 없었던 걸로 치면 후련하다. 집착하고, 매달리고, 엉엉 꼴사납게 우는 내 자신을 싫어하지 않아도 되고, 내가 나를 속여 쟁취한 가짜 평화를 조용히 바라보는 기분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포기하면 무너진다. 어딘가는 반드시 무너진다. 만약 그 아수라장 속에서 운 좋게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그다음은 무너진 잔해 옆에 새로운 탑을 쌓는 순서다. 일찌감치 인생의 진리를 깨달아버린 그 누군가도 분명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이었을 것이다.

김사월의 네 번째 앨범 ‹디폴트›는 그렇게 모든 걸 무너뜨렸다 다시 쌓아 올리는 행위에 골몰하는 앨범이다. 무너지는 것이 다채로운 만큼 새로 세워지는 것도 다채롭다. 대상은 올해로 데뷔 10년을 맞이한 싱어송라이터 김사월을 둘러싼 거의 모든 것이다. 어쿠스틱 기타를 메고 포크송을 부르는 김사월, 불온하고 처연한 노랫말을 쓰는 김사월, 세상이 지겹다는 표정으로 절대적인 존재를 구하는 김사월,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를 부러 꾹 누르는 김사월,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지치지 않는 메아리처럼 노래하는 김사월. 그 수많은 김사월은 ‹디폴트› 안에서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해체되고, 재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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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파편의 흔적은 앨범의 시작부터 바로 확인할 수 있다. ‹디폴트›의 첫 곡이자 앨범 발매에 앞서 공개한 ‘사랑해주세요 그리고 버려요’는 스타일과 작법에 있어 기존 김사월을 굳이 떠올릴 필요가 없다는 강력한 암시다. 김사월과 자주 호흡을 맞춰온 연주자 이시문(기타), 전솔기(베이스), 전수영(드럼)과 함께 작업한 곡들은 6, 70년대 밴드 음악을 향한 오마주를 온몸으로 표현한다. 원테이크로 진행된 레코딩과 믹싱마저 그렇다. 마치 한 곡 같은 두 곡이 흐르는 내내 왼쪽에서만 모노로 들려오던 김사월의 목소리는 두 번째 곡 ‘외로워말아요 눈물을닦아요’의 후반 합창 부분이 되어서야 비로소 풀 스테레오의 영역에 접어든다.

‘이런 건 어떠냐’며 넌지시 청한 날 것의 밴드 사운드는 앨범 한 가운데 위치한 표제곡 ‘디폴트’까지 이어진다. 경쾌한 터치의 징글쟁글 연주와 푸근한 코러스 위로 관계, 추억, 사랑을 풀어내는 김사월 특유의 노랫말이 아린 뒷맛을 남긴다. 가만히 듣다가 어설픈 위로로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찰나, 여섯 번째 곡 ‘디폴트’가 등장한다. ‘사랑이 없는 게 디폴트인 세상’에서 ‘사랑받고 싶다’는 외침을 무모하게 반복하는 애달픈 갈구. 어떠한 생명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메마른 들판에 울려 퍼지는 간절한 새벽기도처럼 처연하게 시작한 노래는 몰아치는 후주와 함께 결국 가슴 깊은 곳 숨겨왔던 마음을 터뜨린다. 절대적인 것을 넘어 ‘엄마가 나를 낳았듯’이 존재론적인 사랑’을, 그냥도 아니고 무려 ‘다 가지고 싶’다고. 무심코 슬퍼질 정도의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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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다면 한 번쯤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사랑을 향한 날 것의 열망을 드러낸 김사월은 일곱 번째 곡 ‘칼’부터 앨범의 방향을 천천히 튼다. 굳이 서두르지도, 안달 내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붕괴한 자리를 뿌옇게 채운 연기 속에서 ‘널 슬프게 하는, 널 힘들게 하는 세상을 베어 버리겠다’는 뜨겁고 서늘한 다짐이 나쁜 주문에라도 걸린 것처럼 반복된다. ‘못 우는데’, ‘호수’, ‘가을 장미’까지 이어지는 앨범의 중후반은, 아마 당신이 김사월이라는 이름을 떠올렸을 때 가장 쉽게 떠올릴 법한 김사월 식 포크의 결을 가진 노래들이다. 그렇기에 그 안의 목소리에 좀 더 집중하게 된다. 나 대신 울어주는 누군가, 나를 살고 싶게 만드는 호수, 지금은 시들어도 매해 피어날 것임을 아는 장미. 익숙한 얼굴로 이야기를 전하는 노래의 표정에 몇 번의 무너짐과 몇 번의 재건을 겪었는지 모를 묘한 표정이 어려 있다. 섣불리 짐작할 순 없지만, 전과 다르다는 느낌만은 분명하다. 남은 것들 가운데 제일 따뜻하고 고운 것을 하나하나 모아 만든 이야기의 등을 클라리넷과 플루트, 신시사이저가 조심스레 토닥인다.

이즈음에서 마무리되었을 법도 한 ‹디폴트›의 이야기는 에필로그를 조금 더 남긴다. ‘가을 장미’에서 타닥이던 불꽃 소리가 소멸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거였구나 자연스레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오르락내리락 얕은 숨을 쉬던 가슴팍이 결심했다는 듯 큰 숨을 한 번 들이쉬고 부르는 건 건 ‘눈과 비가 섞여 내리는 밤’ 그리고 앨범의 마지막 곡 ‘밤에서 아침으로 가는 통신’이다. 같은 물질이면서도 온도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갖는 눈과 비가 섞여 버리는 밤, 피아(彼我)를 구별하기 어려운 두 존재가 온 세상을 축축이 적시는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아침이 올 거라는 김사월로부터의 전언이다.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한 메시지다.

김사월이 ‹디폴트›에서 부르는 디폴트는 그가 경험한 이전의 어떤 디폴트와도 다르다. 한 번 포기한 사람이 다시 품는 희망은, 모든 걸 잃어 본 사람이 다시 쌓아 올린 디폴트는, 겉보기엔 같을지언정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화학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자의로 또는 타의로 모조리 무너뜨린 것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이의 지난한 시간을 생각한다. 무엇보다 거센 힘이다. 의지다. 그러므로 언젠가 또다시 무너져도 이제는 상관없다. 기대를, 희망을, 사랑을 한 번 포기했던 곳에서 김사월이 다가올 아침을 꿋꿋이 노래한다. 무너진 김사월, 녹아버린 김사월, 다시 쌓은 김사월이 모두 여기 있다. 김사월의 화학식이 새로 쓰였다. 글: 김윤하

Artist

김사월(@april_sour)은 포크를 중심으로 다양한 음악을 들려주는 싱어송라이터다. 2012년부터 홍대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2014년 김사월X김해원의 ‹비밀›로 처음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 발표한 솔로 데뷔 앨범 ‹수잔›으로 본격적인 주목을 받았다. 특히 비평가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그의 음악은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음반상 2년 연속 수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로맨스›(2018), ‹헤븐›(2020) 등의 정규앨범을 꾸준히 발표하는 한편, ‹7102›(2017), ‹1202›(2022) 등 정규작에 준하는 볼륨의 라이브 앨범을 정기적으로 선보이며 팬덤을 단단히 다졌다. 단편선과 선원들, 브로콜리 너마저, 신해경, 에픽하이, RM 등 분야를 막론한 다양한 음악가와 협업하면서 자체 브랜드 공연 ‘사월쇼’, ‘엉엉콘’을 통해 자신만의 확실한 색깔과 완성도 높은 무대를 지속해서 선보이고 있다.

Writer

김윤하(@romanflare)는 K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관해 쓰고 이야기하는 대중음악평론가다.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면서, 가끔은 작가 겸 기획자, 음악 콘텐츠 프로듀서로 일한다. 2023년 TVING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K-POP GENERATION›에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일보» «국민일보» «시사IN»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다.

피스오브서울: 실리카겔 ‹POWER ANDRE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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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ce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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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다채로운 대화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피스오브서울Piece of Seoul’은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 님이 최근 새롭게 발매한 한국 대중음악 앨범 중 가장 인상 깊은 피스를 꼽고, 해당 뮤지션과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피스오브서울에서 피스는 조각(piece)이면서 동시에 평화(peace)를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태어난 새로운 음악의 조각과 여기에서 길어 올린 마음의 평화를 뮤지션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세요. 여섯 번째 피스의 주인공은 지금 ‘한국 록의 분명한 미래’라고 불리는 밴드 실리카겔입니다. 얼마 전 ‘2024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음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는데요. 그들이 7년 2개월 만에 2CD로 발표한 정규 2집 ‹POWER ANDRE 99›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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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김춘추, 김한주, 김건재, 최웅희

2022년 8월, ‘NO PAIN’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지자, 아무도 ‘실리카겔Silica Gel’을 막을 수 없었다. 싱글 커버 이미지처럼 힘껏 공중으로 뛰어오른 이들은 자신에게 불어온 바람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계속 가속도를 붙였다. 다행히 10년여간 다져놓은 체급이 기꺼이 감당할 만한 속도였다. 2023년 3월 싱글 ‘Mercurial’, 4월 EP ‹Machine Boy›, 8월 다시 한번 싱글 ‘Tik Tak Tok’을 발표했고, 한국 땅에 존재하는 페스티벌을 모조리 도장 깨기 하겠다는 기세로 무대에 서고 또 섰다. 일 년을 꽉 채워 각종 무대를 섭렵한 이들은 11월 단독공연 ‘POWER ANDRE 99’를 열었다. 아직 발표되지도 않은 새 앨범의 신곡들을 수록 순서대로 부르는 과감한 구성이었다. 티켓은 순식간에 매진됐고, 사흘간 이어진 공연에 다녀온 이들은 온통 호평을 쏟아냈다. 그 긴 여정의 마지막에 정규 2집 ‹POWER ANDRE 99›가 탄생했다. 첫 정규 앨범 ‹실리카겔› 이후 7년 2개월 만이었다.

CD 2장에 18곡을 넣은 방대한 앨범 볼륨은 어쩌면 그렇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들이 겪어온 유무형의 경험 전부를 아우른 결과일지도 모른다. 멤버 전원이 병역의 의무를 마치자 곧이어 팬데믹이 터졌다. 그 사이 이들의 영상 아래 달리던 ‘귀 썩는 음악’이라는 댓글은 어느새 마치 마법처럼 ‘밴드 붐이 왔다’로 바뀌었다. 이 모두가 정말 마법일 리 없다. 그렇다고 단지 버티기만으로 이루어질 리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정규 2집 ‹POWER ANDRE 99›는 단순히 앨범이라기보다 그러한 변화에도 한결같이 음악과 동료를 진지하게 대하던 ‘실리카겔 정신’이 음악으로 승화한 결과물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음악은 여전히 현란하고 광폭하며, 동시에 소박하고 따뜻하다. 호사가들이 말하는 장르를 떠나서, 밴드라는 형태와 음악이라는 매체로 시도할 만한 각종 실험체가 앨범 안에 꿈틀거렸다. 앨범의 방대한 서사를 이끄는 미지의 존재 ‘머신 보이Machine Boy’, 브레인스토밍 페이지를 통해 그를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재창조하는 팬들과의 상호작용까지, ‹POWER ANDRE 99›는 우리가 음악으로 경험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선사했다. 말만 번지르르한 세계관이나 콘셉트가 아닌, 단단한 현실과 상상 사이 어딘가 ‹POWER ANDRE 99›가 위치한다. 누구보다 열린 자세로, 누구보다 견고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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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카겔 정규 2집 ‹POWER ANDRE 99› 커버

‹POWER ANDRE 99›를 발매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어요. 앨범이 발매되기 전 2023년 내내 EP, 싱글 발매에서 공연까지 전력 질주하는 기간이 있었고요. 앨범 발매 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이나 느낌에 대해서 기억나는 대로 알려주실 수 있나요?

춘추: ‘휴! 나왔다!’ 사실 발매할 때까지 엄청 힘들었어요.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시기고, 음반이었기 때문에. 성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잘해야 해!’라는 생각이 너무 커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은 후련해요. 다음 활동에 대한 기대감과 열정이 점점 커지고 있는 시기입니다.

웅희: 저는 사실 앨범 나오고 뮤직비디오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더욱더 긴장 상태였어요. 좋은 기분은 아니었던 기억이…

건재: ‘아- 나왔다!’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좀 더 촘촘히, 좀 더 잘, 좀 더 신경 쓸 수 있는 부분을 더 챙길 수 있었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한주: 한차례 종업식을 치러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Machine Boy’ 및 ‘POWER ANDRE 99’ 캠페인을 주파하는 감각에 드디어 제동이 걸리는구나. 그리고 자연스레 다음 작업에 대한 생각이 들었죠. ‹POWER ANDRE 99› 후에 어떤 도약을 할 수 있을지 각력(脚力)을 비축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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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정말 쉴 틈 없이 달린 것 같아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로요. 힘든 순간은 없었나요?

춘추: 정말 힘들었죠. 공연하는 건 그렇게 힘들지 않았어요. 다만 음반 일정이 조금 타이트해서 그 안에 모든 걸 넣는 데에 감정적으로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게 조금 힘들었던 것 같네요.

웅희: 물론 힘들긴 했지만, 저는 빠르게 달려 나가다 보니 음미하면서 가지 못했던 순간들이 아쉽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래도 고속 열차를 타면 풍경이 안 보이죠.

건재: 의외로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은 많지 않았고요, 음악가가 음악을 만들고 공연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굉장히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반면에 많은 자리와 기회들을 습관적으로 건조하게 행하지 않고 싶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했거든요. 그런 거에 스트레스를 좀 받았던 것 같아요.

한주: 거짓말처럼 들릴 수 있지만 멤버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가장 힘들었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곡을 써내면서 프로젝트의 초반 기획에 힘을 싣고자 노력하는 포지션이다 보니 그 후의 과정을 떠넘기는 듯한 부채감도 상당하고요. 멤버들의 능력을 신뢰하는 만큼 의지하는 바도 크기에 작업 과정에서 힘들어하는 모습을 엿볼 때마다 정말 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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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수많은 무대 가운데 제일 기억에 남는 무대가 뭐였는지 궁금해요.

춘추: 단독 공연 ‘POWER ANDRE 99’의 첫날이었던 거 같아요. 거의 대부분이 신곡들로 이루어진 공연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반응들이 기억에 남았어요. ‘거봐. 좋잖아’라는 생각이 딱 들면서, 공연 당시에도 진행하고 있던 앨범 후반 작업에 대한 걱정들이 많이 사라졌죠.

웅희: 뮤직비디오 촬영이 생각나네요. ‘Realize’ 뮤직비디오 촬영 날 섭외된 관객분들과 슬램도 하고 크라우드 서핑도 하고 내가 무슨 짓을 벌인 건가 생각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즐거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재: 이게 무대라고 하기엔 조금 다를 수도 있을 텐데요. 수많은 무대도 좋았지만, 그 무대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가져온 곡을 쓰는 시간, 회의와 제작… 그렇게 지나간 숱한 밤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 것 같아요.

한주: 질문을 받을 때마다 바뀌곤 하는데요. 요즘엔 산산기어가 주최한 헨즈 클럽 파티에서 공연했던 때나 신도시에서 카운트다운 공연을 했을 때가 떠올라요. 연주자인 실리카겔과 관객인 분들이 서로 엄청난 기운을 부딪쳤던 게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인가 봐요. 서울 어딘가 클럽에서 게릴라 공연을 열면 다시 그런 상황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상상을 많이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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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카겔 라이브를 떠올리다 보니 갑자기 궁금해지는데요, 춘추 님은 ‘Tik Tak Tok’ 후반부 기타 솔로 연주할 때 보통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거의 접신 수준이잖아요. (웃음)

춘추: 실리카겔 곡 중에 기타 솔로라고 할만한 구간이 있는 곡들이 몇 곡 있어요. 대표적으로 ‘Desert Eagle’의 후주라던가, ‘9’의 기타 솔로처럼요. ‘Tik Tak Tok’은 그 곡들과는 다르게 즉흥적으로 녹음했고, 처음부터 즉흥적인 구간으로 의도적으로 계획했던 만큼 라이브 때마다 자유롭게 연주하곤 합니다. 저도 즉흥연주를 정말 좋아하고, 많이 공부한 분야이기도 해서 항상 즐겁고 기대되는 부분이에요. ‘Tik Tak Tok’이 있는 날이면 무대에 오르기 전에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합니다. ‘어떤 라인으로 시작할까? 저음부터 밀어낼까? 고음부터 연주할까? 단선율로 시작할까? 코드로 시작할까? 노트를 처음부터 많이 뿌릴까? 길고 적은 음으로 시작할까?’ 등등요. 연주 중에는 코드와 음, 음정과 물밀듯이 밀려오는 강력한 음의 방향성에 집중하게 돼요. 그러다 솔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멜로디로 나설 때 그제야 멤버들을 보죠.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 표정에 매번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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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햇수로 결성 10년 차가 되었습니다. 요즘 드물게 긴 시간, 단계별로 성장한 밴드라고 생각하는데요. 밴드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터닝포인트라고 느낀 순간이 있었나요?

춘추: 다른 뮤지션들의 음반 작업이나 개인 작업에 참여하며 기타리스트에서 프로듀서의 위치가 되어 가던 순간이 결국 실리카겔에서 제가 한 단계 성숙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한 명의 뮤지션으로서의 기량을 높인 과정이었습니다.

웅희: 저는 역시 베이시스트로 파트가 바뀐 시점이 터닝포인트였습니다. 그때부터 밴드에서 맡아야 할 음역대도 달라졌지만 흔들리지 말아야 할 역할을 맡다 보니 저의 인격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의 다짐이 지금의 실리카겔에 영향을 많이 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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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 저는 분명히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또 계속해서 받고 있어요. 그만큼 저도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을 테고요. 터닝포인트라고 콕 집어 이야기해 드리기는 어렵지만 좋은 영향을 기다리는 사람보다는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계속 든다는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아요. 그러나 그 마음이 큰 터닝포인트였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한주: 개인적으로는 수적 지표가 늘어나고 밖에서 알아봐 주시는 분들이 많아지면서 ‘뭔가 바뀌었구나’ 바로 체감하지만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성공적인 모델에 안착했다는 감각은 전혀 없어요. 그에 대한 욕심도 없고요. 그래서인지 터닝포인트라 여길 지점을 떠올리면 흐릿한 느낌뿐이에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무대에 오르고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상황이 달라졌다 싶은 거죠. 다만 ‘NO PAIN’ 발매쯤부터 주변 시선의 변화가 빨라진다는 느낌은 받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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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성장한 만큼 위기도 많았을 것 같아요. 한주 님은 ‘NO PAIN’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어려웠던 시절 작업한 곡이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한주: 사실 지금을 포함하여 쉬운 상황은 없지만, ‘NO PAIN’은 확실히 그런 것들을 밀어내고자 만든 곡이란 느낌이 크죠. 어찌 보면 신화 속 이카로스Icarus 같은 느낌도 있어요. 태양에 닿고자 ‘NO PAIN’을 외치지만 날개가 녹으면 ‘Mercurial’에 어울린달까요. 하지만 ‘NO PAIN’은 날개가 녹아도 우리의 의지는 어느 지점에서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느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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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AIN› 커버

‘피스오브서울’은 앨범을 중심으로 진행하는 인터뷰인데요. 이번에는 사전 정보를 찾을수록 오히려 어려워지는 지점이 있어요. 멤버들 모두 앨범 관련 인터뷰나 방송에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놓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기도 했고요. 생각해 보면 이 기조는 실리카겔의 활동 전반을 둘러싼 어떤 ‘정신’이기도 한 것 같아요. 자신들의 결과물에 대한 해석을 ‘열어 놓는다’라는 건 밴드 실리카겔이 음악이나 창작물을 대하는 태도일까요?

춘추: 명확한 의미나 사상이나 뜻을 전달하고 싶지 않아요. 멤버들끼리도 취향이 너무나 달라서 뭘 정하든 지금도 만장일치가 나오는 경우가 잘 없어요. 저희끼리도 좋아하는 게 이리 다른데 어떻게 우리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뜻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싶어요. 그래서 저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 놓고 싶다는 표현보다, 추상적이어도 좋으니 어떤 느낌을 즐겼으면 해요. 뭔가를 보거나 듣거나 맛보았을 때 ‘!’ 하는 그 찰나의 순간이 있잖아요. 그 느낌을 즐기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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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희: 저는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 때 처음 접하고 펼쳐지는 다양한 세계, 끝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상을 너무나도 즐겨요. 그래서 그런 기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게 커요. 근데 최근엔 조금씩 의도를 설명드리는 것도 재미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건재: 분명히 기초, 근원에는 정확한 생각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그걸 규정하면 아무래도 재미있는 상상력이나 펑션이 나올 가능성을 좁히는 행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느끼는 건, 저희는 활짝 열려있지만, 또 분명히 닫혀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는 점이에요. 그런 양면성 덕분에 저희도 아마 똑바로 규정하거나 재단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해요

한주: 이런 질문에조차 열린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네요. 실리카겔은 꽤나 다자적인 그룹이에요. 결성 때부터 명백한 리더 체제로 운영되기보단, 구성원 각각의 기능이 원활하게 작동하며 자연스레 형성되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방식이었고요. 그만큼 각 모듈의 해석을 방임적으로 두고, 합쳐질 때의 임의적인 결과물을 즐겁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만드는 음악이나 세계관적 내용 또한 느슨하게만 합의하고 각자의 해석을 존중하는 문화가 있어요. 작품을 공개한 후에도 감상하는 분들을 저희의 다자주의적 평행선에 두면 좋겠다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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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치열할 만큼 꼼꼼한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게 실리카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음악도 음악이지만 외적인 면도 그렇죠. 그렇게 모든 게 열린 ‹POWER ANDRE 99›의 첫 곡 ‘On Black’을 1집의 ‘비경’과 같은 코드로 흡사하게 작업한다거나, 오랜만에 금의환향한 ‘헬로루키’ 축하 무대에서 수상 당시 마지막 곡으로 불렀던 ‘9’를 다시 부른다거나 하는 것들요. 실리카겔이 다양한 결과물을 만들면서 가장 ‘대충 하는’, 즉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부분과 가장 ‘꼼꼼하게 작업하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춘추: ‘대충’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 명확한 의미나 내용을 전달하는 것보다 더 쉽다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일은 듣는 사람에게 확실한 무언가를 넣는 게 아니라, 다양한 감상이나 인상의 느낌을 떠올리도록 더욱더 치밀하고 디테일한 요소를 넣는 작업으로 연계돼요. 의도적으로 우리가 전달할 내용을 빼는 게 아니랍니다. 저희는 ‘이 정도는 비워놓자’라고 작업하는 부분은 단 한 군데도 없어요. 모든 것에 의도가 있고, 그것이 해석적인 공백이 되도록 만드는 것 또한 실질적인 작업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웅희: 이번 ‹POWER ANDRE 99›의 꼼꼼한 부분은 역시 사운드였다는 생각이 드네요. 사운드는 해석의 여지가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반면 제가 만든 ‘Ryudejakeiru’의 뮤직비디오는 해석이 여러 갈래로 파생되더군요.

건재: 아마 저희가 가장 대충 하는 부분은 본인의 건강 아닐까 해요. 적어도 무언가를 만들면서 ‘대충’을 겨냥하고 행했던 적은 제 기억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대충 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 자리를 빌려 사과를 드립니다. 저 단어를 떠나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부분에 주안점을 둔다면 짧게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장황하게 늘려서 전달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저게 또 대충 하는 느낌은 아니거든요. 엄청 꼼꼼하게 이것저것 연결해 본다는 말이죠. 이 답변이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습니다. (웃음)

한주: 해석의 여지를 남긴 듯한(대충 혹은 느슨하게 보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업들은 대체로 ‹POWER ANDRE 99›처럼 거시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프로젝트에서 더욱 그렇지 않나 싶네요. 그 안에 미시적으로 구성된 모든 요소는 가장 꼼꼼하게 작업하는 부분이라 답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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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의 여지를 열다 열다 ‹POWER ANDRE 99›의 브레인스토밍 페이지까지 만들었어요. 이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한주: 앨범에 있어 여러모로 감상하신 분들의 해석이 열려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걸 실천할 장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에 채무감을 느끼고 있었어요. 그러다 발견한 서비스예요. 실리카겔이 작업적으로 실천하는 탈중심화를 그대로 열어둘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겨 오픈하게 됐어요. 아이디어는 멤버들이 제출했지만, 준비하는 데는 저희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크루가 힘을 많이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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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ANDRE 99› 브레인스토밍 페이지 © 실리카겔 공식 인스타그램

뇌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있더라고요. (웃음) 혹시 직접 확인한 브레인스토밍 결과 중에서 가장 기발하거나, ‘우리 생각을 간파했다!’ 싶은 내용이 있었다면 알려주세요.

춘추: 재미있던 것 중 하나가 있어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뭔가 갑자기 곡의 내용을 설명하는 글에(무슨 곡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Mercurial’이었나?) 개구리가 등장해서 뭐 ‘○○○은 개구리였다’ 이런 글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그 개구리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게 너무 재미있었어요.

웅희: 간파한 부분도 많다고 생각하지만, 저희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감상평 혹은 해석이 정말 많고 재밌어요. 저는 ‘PH-1004의 신체 개조라는 트렌드와 자폭 시스템’이라는 파트가 너무 재밌었습니다. 하염없이 읽게 돼요.

건재: 직접적인 내용 한 줄을 꼽기보다는, 살아가면서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꼭 해줄 수 있는 말이나 행동이 있잖아요. 예를 들어 멋대로 힘내자고 하지 않는다든가, 상상을 만들어 대입해 해소해 본다든가, 응원이나 위로하는 그런 것들, 그리고 훨씬 더 많은 것들요. 우리가 그 안에서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한 ‘한 덩어리’라는 느낌이 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를 빌어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것 같은 풍광이 기억에 남습니다. 본인이 스스로에게 말해줄 때는 무엇보다 본인의 속도와 본인의 시간으로 하게 되고, 또 듣게 되잖아요. 많은 예시나 우화들을 만들어 이야기하던 게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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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R ANDRE 99› 브레인스토밍 페이지 중 일부 © 실리카겔 공식 인스타그램

한주: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희의 생각’이라는 부분은 꽤나 느슨한 영역이라서 어떤 내용이 그에 부합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해당 프로젝트 오픈 때부터 서비스가 허락하는 한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기대가 있었기에 그런 면에서는 정점(APEX)을 갱신했다고 생각합니다.

‘출마를 선언합니다’라는 말이 멤버와 스태프 사이에서 유행이라고 들었어요. 요즘도 계속 유행 중인지, 혹시 2024년 새롭게 생긴 유행어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건재: 조금씩 변화구가 있긴 하지만 아직 애용 중인 문구입니다. 연초라 딱히 생각나는 건 없는데 공통적으로 제일 많이 한 말은 아무래도 어떤 일정이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와 같은 말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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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앨범 얘기를 해 볼게요. 우선 18곡이라는 수록곡 숫자부터 압도적인 앨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거의 광기 아닌가요?! 처음부터 이렇게 큰 볼륨이 될 걸 예상하고 작업했는지, 어쩌다 이런 볼륨이 됐는지 궁금합니다.

웅희: 다들 정규 2집에선 오랜 기간을 투자해서라도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는 쪽으로 합의했던 것 같아요. ‹POWER ANDRE 99› 이전에 보여줬던 ‹Machine Boy›와 그 앞에 발매한 싱글들도 ‹POWER ANDRE 99›의 서사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며 발매했거든요. 그런 이유로 2CD의 정규 앨범이 나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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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rcurial›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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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chine Boy›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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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k Tak Tok› 커버

‹POWER ANDRE 99›에 대한 최초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웅희: ‘Mercurial’을 발매하기 전부터 거대한 정규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쌓아 올리자는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그 당시 인간의 형태를 한 기계의 이미지를 필두로 한주가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때 한주가 썼던 짧은 글이 있었는데요. 빌드업 과정에서 해당 글과는 멀어졌지만, 그게 최초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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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곡을 1차로 배치하고 조금씩 다듬어 갔다고 들었어요. 혹시 처음부터 절대 위치가 바뀌지 않았던 곡이나 최종 단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추가된 노래가 있을까요?

춘추: 처음부터 가장 강력한 위치를 고수했던 것은 아무래도 ‘On Black’과 ‘Eres Tu’였어요. ‘시작은 무조건 이렇게 가져가야 해!’라는 느낌이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지라 이것만큼은 그대로 보여주자고 다들 생각했어요. 작업 후반에 ‘PH-1004’라는 곡을 추가하기로 했죠. 아무래도 수록곡 간의 다이내믹을 최대한 크게 가져가고 싶었어요. 이번 앨범에서 어쩌면 가장 극단적인 수록곡이죠.

확실히 그런 느낌이에요. 앨범 첫 곡 ‘On Black’을 듣자마자 ‘나는 지금 ‘POWER ANDRE 99’가 주인공인 이야기에 초대되었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거든요.

한주: 맞아요. 애초에 1번 트랙으로 사용할 곡이 필요해 만들었습니다. ‹POWER ANDRE 99›라는 앨범의 부팅 이미지를 선사하는데 집중했어요.

앨범의 마지막 곡 ‘PH-1004’도 그래요. 자연스럽게 긴 이야기가 마무리된 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춘추: ‘PH-1004’는 머신 보이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고 싶어서 나오게 된 곡이에요. 사랑 노래처럼 보이지만, 사실 엄청 불안정하죠. ‹POWER ANDRE 99›에 수록된 강렬한 곡들과 강하게 대비시켜 이런 모습도 잊지 말아 달라는 목적이었달까요? 저희가 ‘Machine’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도 했고, 비주얼적으로도 기계, 금속을 느끼게끔 했지만, 결국 머신 보이의 이야기는 저희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앨범에는 ‘Realize’, ‘Budland’, ‘Mercurial’, ‘NO PAIN’처럼 이미 발표한 곡과 신곡이 새롭게 조합돼 있어요. 저는 글을 새로 쓰는 것보다 수정하는 게 더 어렵던데요. 기발표 곡을 새로 줄 세우는 게 어렵지는 않았나요?

건재: 사실 저희가 묵혀놨다가 다시 꺼내 후닥닥 재편해 사용하는 경우도 왕왕 있고, 지속적으로 계속 편곡해서 재생하는 곡과 소리도 있어요. 많이 어려운 접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니라서 딱히 어렵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수정이라는 주제는 늘 어려워요. 그렇지만 잦은 수정은 결국 곡의 퀄리티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곡을 쓰는 단계에서 앞뒤 순서를 상정하고 만들어놓은 것도 있다 보니 ‘으악! 어려워서 못 하겠다!’라는 느낌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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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앨범에 새로 들어간 곡들 위주로 여쭤볼게요. 첫 곡이 끝난 뒤 ‘Eres Tu’와 ‘Juxtaposition’이 바로 이어집니다. 연주나 편곡, 구성적 측면에서 각각 실리카겔 ‘초기’와 ‘지금’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곡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두 곡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나요?

한주: 두 곡 모두 ‹POWER ANDRE 99› 프로젝트 콘셉트에 대한 기여를 의식했어요. ‘Eres Tu’에서는 실리카겔 멤버들이 지닌 컬러풀한 지점과 돌발적이지만 글리치한 느낌을 살리려고 했죠. 이어지는 ‘Juxtaposition’은 앨범이 어필해야 하는 질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기계적이고 강압적인 뉘앙스를 강조하게 됐답니다.

‘APEX’와 ‘Ryudejakeiru’는 앨범의 더블 타이틀로 정해져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곡들이라는 느낌이었어요. 실리카겔이라는 요소를 이루는 불과 물을 극대화해 만든 작업이랄까요. 두 곡을 타이틀로 정하면서 어떤 논의가 오갔는지 궁금합니다.

춘추: 그런 의도를 가지고 발매했던 건 아니지만, ‘NO PAIN’의 집중도가 우리에게 어쩌면 선입견을 만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히려 저희는 이때 더 이상한 걸 들려주자는 생각으로 곡을 쓰고 작업했어요. ‘APEX’를 필두로 우리가 그리 호락호락(?)하진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다만 단순히 이상한 것만 던져놓는 실리카겔이라는 이미지도 저희가 원하는 건 아니었기에 이번 앨범이 우리의 단적인 모습에 집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PEX’가 ‘들어라!’라는 곡이라면, ‘Ryudejakeiru’는 ‘같이 듣자!’라는 곡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NO PAIN’을 기점으로 드디어 실리카겔의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라는 반응이 소소한 화제가 되기도 했죠. (웃음) 가사는 실리카겔 음악의 그 어떤 부분보다 열린 영역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혹시 이번 앨범에서 그렇게 ‘들리는 것’ 혹은 ‘함께 부르는 것’을 의식하고 쓴 가사나 단어가 있을까요?

춘추: 아무래도 ‘Ryudejakeiru’의 후반부 합창 부분이 아닐까 해요. 가사는 “나나나” 뿐이지만, 실제로 녹음하면서 다양한 보이스와 다양한 인격을 담고 싶었어요. 그래서 저희 목소리로도 담고, 괴상하게 목소리를 내어서도 녹음을 받았죠. 단순히 다수의 사람이 노래하는 연출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노래하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소리를 담아 봤어요.

얼마 전 EBS에서 바로 그 ‘Ryudejakeiru’를 실버 합창단과 함께 부르는 색다른 연출을 보여주기도 했어요. 라이브 당시도 그렇고 이후 인터뷰에서도 멤버들 모두 상당히 몰입한 것 같더라고요.

웅희: 모두가 어울려 화합하고 싶다는 초기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그때 저는 뚝딱이와 번개맨, 뿡뿡이 등 EBS의 유명 캐릭터들을 한자리에 모아 어벤져스를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덕분에 뚝딱이를 만날 수 있었네요. (웃음) 여하튼 이를 시작으로 어떻게 하면 소외받지 않고 모두가 모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어린이 합창단 혹은 실버 합창단과 ‘Ryudejakeiru’를 다 함께 부르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감동적일 것 같다는 추측으로 시작했는데, 기대보다 더 감동적인 무대를 만들어주셔서 다시 한번 합창단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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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에 또 하나의 감동 포인트가 있던데요. 건재 님이 ‘Gosan’에서 처음으로 보컬을 담당했어요. (웃음) 상당히 목가적인 느낌이 드는 게 실리카겔 음악에서 여태껏 느끼지 못했던 묘한 감상을 자아내더라고요. 곡의 뼈대를 건재 님이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건재: 과찬의 말씀, 감사합니다! 실리카겔에서 잘 느껴보지 못한 묘한 감상을 느끼셨다고 말씀해 주시니 무척 즐겁네요! 아무래도 들리는 목소리 중에 제가 전면에 있다 보니 더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어요. ‘Gosan’은 하나의 생각이나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곡은 아니에요. 당시에 저를 이루던 생각, 몸, 시각, 청각 등을 뭉쳐서 음악으로 표현해 봤습니다. 일본 다카야마(高山)에 가면 높이 솟은 나무들이 참 예쁘게도 계속 풍경을 펼치는데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오지 않은 미래를 빌려서 사랑을 노래 해봤어요. 그리고 그 텍스트에 음을 덧칠해 봤습니다. 듣는 데 도움이 되실까요? (웃음)

사실 ‹POWER ANDRE 99›는 들으면 들을수록 이렇게 조각조각 나누어 물어보는 게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돼요. 단순한 앨범 한 장이 아니라, 마치 2023년 실리카겔의 모든 조각을 모은 ‘시간과 공간의 방’으로 다가옵니다. 그 공간에서 멤버 각자에게 가장 큰 울림으로 남은 건 무엇인가요?

춘추: 소위 ‘머신 보이’ 세계관에 한 해 동안 집중했던 과정이 콘셉트와 활동 방향, 그리고 이전의 저희에게 부족했던 것, 이후의 저희에게 필요한 것을 많이 감지하도록 도와준 것 같아요. 선택과 집중이란 게 어쨌든 중요한 상황에서, 실리카겔이 지닌 가능성에 대한 작은 확신과 새로운 추진력의 원동력을 축적한 한 해이자 프로젝트였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네요.

웅희: 저에게 큰 울림이었던 순간은 다른 멤버들의 방을 구경할 때였습니다. 말씀대로 멤버들의 시간에 감명받으며 버텨왔어요. 제게 가장 큰 힘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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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재: 너무 멋진 질문을 주셔서 부담스러운데요. 그냥 다른 미사여구나 이것저것을 차치하고 아무래도 ‘이들과 내가 열망하고 사랑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다’라는 마음이 항상 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아요. 존경이나 표현의 울림은 평소에도 장착이 돼있어서 따로 꼽기 어렵네요!

한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앨범 뮤지션으로서 탄력을 회복한 게 크지 않나 싶어요. 싱글이나 EP 이슈도 좋아하지만, 시즌별로 넉넉히 표현할 수 있는 단위는 앨범이니까요. 이런 탄력을 활용해 이제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이야기를 나눌수록 실리카겔의 멤버들이 서로에게 모두 좋은 동료이자 자극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제작 막바지에는 멤버들이 먼 곳으로 떠나서 집중적으로 합숙 작업을 한 걸로 알고 있어요. 당시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건재: 뭐 다들 꼴이 말이 아닌 채로 작업하던 모습이 다 코미디였던 것 같은데요. (웃음) 사실 너무 고농도로 집중하다 보니 제게는 기억이 감각으로 남아있지, 시간의 시점으로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웅희 감독님의 유튜브 채널 ‘채 웅희최 널’의 ‘SILICAGEL AWESOME MOMENTS’를 통해 생생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POWER ANDRE 99›를 만드는 과정에서 새롭거나 기억에 남는 순간을 알려주세요. 자기만 아는 특정 곡의 숨겨진 포인트나 작업 당시 에피소드도 환영합니다.

춘추: 믹싱할 때 기억을 하나 꼽자면, 사실 믹싱이 굉장히 어려웠어요. 이번 음반에는 더욱더 성숙한 사운드를 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기존 실리카겔이 작업하는 방식에서 부족한 요소들을 보완하는 여러 방법과 시도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떨어지는 트랙(곡 안에서의 개별 트랙)들은 많이 탈락하기도 했어요. 지금까지는 다양한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방식으로 믹스를 해왔었는데, 이번에는 조금은 닫힌 방식으로 제 기준과 판단에 훨씬 더 많이 의존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방법적으로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아쉬운 것은 아쉽고 좋은 것은 좋았던 건 마찬가지긴 하네요.

웅희: ‘Ryudejakeiru’ 뮤직비디오 촬영 날 하늘이 도와주신 덕분에 날씨가 따듯했어요. 덕분에 야외에서 스텝들과 배우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아 햄버거를 먹었는데 그때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아무래도 좋은 기억만 남아서 추억이 보정된 것 같긴 하지만요. (웃음)

건재: 녹음 전 사전단계에서 정말 엄청나게 고민하고, 연구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준비했거든요. 한 곡 한 곡 사운드 셰이프Shape를 예측하며 모델링을 하고, 이를 토대로 이것저것 심벌즈들과 드럼들을 조합한 후 몽땅 들고서 녹음 장소에 도착했어요. 그리고 한 모델, 한 조합, 한 구성 등등을 꺼내면서 멤버들과 소리를 듣고, 좋아하고, 부정하고, 의문을 가지고, 선택한 소리들을 담았습니다. 그 기억이 많이 남아있어요. 체력이 좋은 편인데도 불구하고, 녹음을 끝낸 후 끼니도 못 먹을 정도로 졸아버리곤 했답니다.

한주: ‘Babyface’라는 트랙을 작곡하던 당시의 상황이 생각나요. 중후반부 기타와 보컬 유니즌 솔로를 메이킹할 때 술에 취해있었거든요. 작업방에서 홀로 기타와 보컬을 동시 연주로 녹음하며 극에 치닫는 기분을 느꼈던 추억이 있습니다. 후에 스튜디오에서 춘추 씨가 해당 파트 기타 연주를 하냐 마냐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결국 제가 술에 취해 녹음한 데모 테이크가 앨범에 반영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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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라디오 방송에서 ‘실리카겔은 멜로디스트들의 모임’이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저도 무척 동의합니다. 데뷔 당시 독특한 사운드로 주목받았지만, 실리카겔 음악의 핵심은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생각하거든요. 혹시 멤버들 각자 ‘이건 정말 끝내준다’라고 생각하는, 특별히 좋아하는 실리카겔의 킬링 멜로디가 있을까요?

춘추: ‘Mercurial’의 멜로디 라인을 정말 좋아해요. 느린 템포, 비교적 빠른 하모닉 리듬으로 순차 진행되는 코드, 길게 뻗어나가는 벌스Verse 멜로디, 후렴 직전의 변화폭이 작은 긴장감을 주고, 후렴에서 다소 편안한 진행감의 멜로디가 주는 카타르시스, 2절에서 치고 나오는 과감하고 다이내믹한 벌스 등 여러 가지로 다양한 다이내믹이 만들어지는 좋은 멜로디라고 생각합니다.

웅희: ‘Andre99’의 메인 멜로디도 좋지만 ‘9’의 베이스 라인도 킬링 멜로디라고 생각합니다. 베이스를 한번 들어보세요. 하하!

건재: 그때그때 취향이 달라지는데요. 요즘에는 ‘Juxtaposition’의 후주에 나오는, 저희 표현으로 말하자면 ‘국밥 베이스 라인’을 참 좋아하고 있습니다.

한주: 진성 멜로디스트로서 하나는 너무 어렵고 둘을 꼽자면, ‘Kyo181’과 ‘NO PAIN’ 이야기를 해볼게요. ‘Kyo181’은 하나의 동기 멜로디로 곡 전체를 해결하는 재밌는 곡이에요. 멜로디스트로 유명한 작곡가들은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겸비하고 있기도 하죠. 멤버로서 칭찬하는 게 우습지만, 정말 좋은 곡이에요. ‘NO PAIN’은 A-B-C-D 전개가 명확한 곡인데요. 인트로-인터루드-아웃트로 테마와 후렴 멜로디가 주는 힘이 곡 전체를 잘 아우른다고 생각해요.

실리카겔은 ‘동료와 함께하는’ 것을 무척 중시하는 밴드 같아요. 실제로도 영상감독, 엔지니어, 스타일링 등 지금 함께하는 스태프 중 데뷔 때부터 호흡을 맞춘 이들이 많고요. 추상적인 노랫말 가운데에서도 ‘모두’, ‘함께’ 같은 단어에는 유독 방점이 찍힌 듯한 느낌을 받아요. 실리카겔에게 ‘동료와 함께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춘추: 예전부터 주변 뮤지션들이 ‘새로운’ 작업자를 매번 찾아가는 게 좀 의아했어요. 이렇게 중요한 프로젝트에서는 당장의 아웃풋보다 팀워크가 더 중요한 거 아닐까, 생각하거든요. 밀도 높은 작업은 유능한 사람이 아니라 깊은 사람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좋은 아웃풋의 비밀은 결과물 그 자체보다 작업자들 사이에 있다고요. 좋은 작품은 특정한 누군가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함께하지 않으면 생길 수 없는 신뢰와 여유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에 함께하는 동료 한 명 한 명이 감사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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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희: 혼자였다면 절대, 절대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없었다고 자주 생각합니다. 아까 말했듯 멤버들도 그렇지만 동료들이 저희 프로젝트를 위해 모든 걸 쏟는 모습을 보면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어요. 저를 성장시킨다고 할까요?

건재: ‘좋은 동료가 계속 있어 줄 이유를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계속 머무를 수 있는 이유를 계속 제공할 수 있어야 하겠다 싶어서요. 그래서 뭐든 열심히 하려고 노력합니다.

한주: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해요. 실리카겔 멤버, 동료 작가, 동료 스태프 등을 아우르는 관계에서 오는 시너지가 지금까지 실리카겔에 굉장히 중요한 에너지를 선사했어요. 앞서 언급했지만, 실리카겔의 세계는 꽤나 다양하고 다자적이기에 저희와 알맞은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모듈을 잘 연결해 두고 재밌는 일들을 합성해 내려고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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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상은 실리카겔이라는 밴드 색깔에도 반영됩니다. 멤버 네 사람 모두가 그 자체로 실리카겔이면서, 동시에 한 사람의 완전히 독립된 음악가라는 인상을 무척 강하게 받아요. 이렇게 민주적으로 바람직한 운영은 어떤 공감대를 바탕으로 가능한 걸까요?

춘추: 오랜 활동으로 자연스럽게 학습된 멤버들 간의 무언가 덕분이 아닐까 합니다. 성격과 경향, 취향… 이런 것들이요. 100% 알긴 어렵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여러 요소가 있거든요. 그런 것들이 멤버들 간의 신뢰를 공고히 해가면서, 서로를 인정하는 거죠. 딱히 다른 이유가 필요 없이, 오랫동안 서로를 이해하려고 고민도 많이 하고, 그렇게 지내온 시간이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해요. 그 힘든 기간을 버틴 멤버들도 대단합니다.

웅희: 각자가 서로를 존경하기 때문에 이런 운영이 가능한 것 같아요. 일전에 이야기했던 ‘팀플레이’라는 이야기가 다시 한번 생각나네요.

건재: 하하. 과찬 감사합니다. 사실 저희 스스로 훈수를 둘 만큼 대단한 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회적, 미학적, 예술적인 차원에서 모범 사례가 되고 싶어 소망하거나 집착하는 그런 열망도 강하지 않은 편인 것 같고요. 제 경우에는 그냥 저의 부족한 점이나 나약한 점을 더 정확히 인지하거나 찾으려고 노력하고, 보완할 방법을 고민하죠. 물론 힘든 부분도 여전히 많아요. 이를 마주하고 고민하는 행위가 분명 즐겁다고 스스로에게 강요하면서도, 그렇게 쉽기만 하지 않을 때가 늘 있거든요. 뭐… 다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생각 위에서 자란, 이를테면 삶을 견지하려는 태도 같은 게 다들 여러 모양으로 존재할 테고, 뭐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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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 전체적인 공감대는 실리카겔이라는 규정할 수 없는 사상으로 엮이는 게 아닐까 싶고요. 기본적으로는 멤버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전문적인 영역을 최대한 존중하고 따르려는 의지인 듯해요. 저의 경우, 작/편곡 혹은 작사나 초기 아이디어 제안이 주된 역할이라면, 춘추 씨는 실리카겔의 기술적인 모든 부분을 감독하고 있어요. 음향적인 부분, 물건이 관여하는 부분에 누구보다 전문적이죠. 건재 씨는 드러머로서 물리적으로 구현해야 하는 부분들을 치밀하게 잘 짜내고, 프로젝트에 있어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내거나 행정적인 처리를 말끔히 하는 등 그만의 분야가 있답니다. 웅희 씨는 최근 실리카겔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고, 개인 채널에 저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공유하는 등 음악 이외에도 멀티미디어적인 부분에 일조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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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실리카겔이 걱정 없이 단단하게 항해할 것 같다는 믿음이 드는 대답들이네요.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웃음) 올 한 해 실리카겔로서의 활동과 멤버 개개인의 활동도 다양하게 준비하고 있는데요. 혹시 공개해도 좋은 이슈를 알려줄 수 있을까요?

춘추: 개인적으로는 ‘놀이도감’이라는 프로젝트가 있는데요. 기회가 된다면 공연도 하고 음반도 내게 되겠죠? 일단은 실리카겔의 다음에 조금 더 신경을 많이 써보고 싶습니다!

웅희: 올해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다양한 영상물 시리즈 제작을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조만간 5월에 큰 공연이 있겠네요.

건재: 역시나 일단 실리카겔의 제작 및 활동이 언제나 최우선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더 많이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요. 그런 마음이 흘러넘칠 때마다 조금씩 모아 ‘시라카미 우즈Shirakami Woods’에도 풀어내 보고 싶습니다. 이런 실험을 통해 실리카겔과 제게 양분이 되는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거든요.

한주: 실리카겔은 변태(變態)를 거듭하지 않을까 싶어요. 깜짝 놀랄 법한 이벤트가 있으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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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새롭고 용감한 사운드(Brave New Sound)’. 밴드 실리카겔Silica Gel은 김한주(건반/보컬), 김춘추(기타/보컬), 김건재(드럼), 최웅희(베이스) 4인으로 이루어진 밴드다.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바탕으로 구축해 낸 고유의 사이키델리아, 폭발적인 에너지의 라이브 퍼포먼스가 응집하여 현재 가장 새롭고, 용감한, 사운드를 만드는 밴드 실리카겔이 되었다. 2015년 EP ‹새삼스레 들이켜본 무중력 사슴의 다섯 가지 시각› 발표 이후 정규 앨범 2장, EP 3장, 다수의 싱글을 발표하며 활약 중이다. 그들의 가능성이 궁금하다면 그 답은 음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시도한 적 없기에 들어본 적 없는, 들어본 적 없기에 새로울 수밖에 없는, 이상한 것들은 늘 곱씹을수록 새로움을 선사하기에. 

Writer

김윤하(@romanflare)는 K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관해 쓰고 이야기하는 대중음악평론가다.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면서, 가끔은 작가 겸 기획자, 음악 콘텐츠 프로듀서로 일한다. 2023년 TVING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K-POP GENERATION›에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일보» «국민일보» «시사IN» «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다.

피스오브서울: 강아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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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ce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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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Interview

다채로운 대화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피스오브서울Piece of Seoul’은 대중음악평론가 김윤하 님이 최근 새롭게 발매한 한국 대중음악 앨범 중 가장 인상 깊은 피스를 꼽고, 해당 뮤지션과 이야기를 나누는 코너입니다. 피스오브서울에서 피스는 조각(piece)이면서 동시에 평화(peace)를 뜻합니다. 지금 한국에서 태어난 새로운 음악의 조각과 여기에서 길어 올린 마음의 평화를 뮤지션의 목소리로 직접 들어보세요. 다섯 번째 피스는 사람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사랑해서, 마치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사랑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표현하는 싱어송라이터, 강아솔이 5년 만에 발표한 정규 4집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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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드물게도 깨끗하게 정리된 빈 책상에 앉아 싱어송라이터 강아솔의 신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를 틀었다. 첫 번째 트랙인 ‘어떤 겨울은’의 기타 첫 음이 울리는 순간, 꼭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솔이라는 뮤지션을 안 지 벌써 10년. 이번 신보처럼 창작자의 지난 시간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는 느낌이 드는 앨범은 처음이었다. 강아솔답게 여전히 따뜻했지만,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싸움을 어렵게 끝낸 이의 얼굴에 떠오를 법한 쓸쓸한 미소가 앨범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실제로 강아솔은 이 앨범을 두고 ‘정말 긴 터널을 통과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강아솔의 네 번째 정규 앨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는 제목 그대로 서사를 전개하는 앨범이다. 사랑이 전부였던 한 사람이 그 전부를 잃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났다가 다시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무척 사적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 같기도 한 여정을 뮤지션 특유의 포근한 터치로 그려낸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무작정 떠난 삿포로행 기차에서 태어난 연주곡(‘어떤 겨울은’)으로 시작해 결국 다시 사랑을 부르며(‘사랑을 하고 있어’) 마무리되는 앨범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봤다는, 그의 생애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서 길어낸 혼돈과 어둠의 기록이다. 그런 앨범이 이토록 푹신하고 따뜻할 수 있다니. 다 무너져 다시 돌아온 곳에서, 그를 기꺼이 기다려준 모두의 품에서 그만의 사랑이 다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기 때문일 테다. 언제나처럼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분명 전과는 다른 사랑일 거라는 강아솔과 새 앨범에 관한 긴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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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솔 4집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 커버

얼마 전 ‘제주도 홍보대사’가 되면서 입신양명하게 되었어요. 소감부터 들어볼까요?

정말 한 번도 예상한 적 없던 일이라서 너무 얼떨떨해요. 도지사님께 임명장을 받고 2년 동안 제주도 홍보대사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이제는 제 행보를 저도 모르겠어요. (웃음) 앞으로 더 노골적으로 제주도를 노래할까 봐요. 가문의 영광입니다.

‘제주’는 꽤 오랫동안 강아솔을 대표한 키워드였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자부심이 있죠? 제주도에서 찍은 ‘온스테이지’ 영상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아직 많잖아요.

이런 기분이 들어요. 해외에서 큰 상을 받으면 국내에서 화제가 되잖아요? 육지에서 열심히 해서 제주에 역수입된 거죠. (웃음) 정말 과거급제 느낌이에요. 고향 친구에게도 축하 많이 받았습니다.

본격적인 새 앨범 얘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5년 만의 정규앨범이에요. 그런 것치고는 곡 숫자가 좀 적어요. 예전에 발표한 ‘사랑을 하고 있어’를 포함해 총 일곱 곡이잖아요.

정규로 내겠다는 말을 너무 오래 해와서, 중간에 EP로 바꾸거나 싱글을 낸다고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 정말 새빨간 거짓말쟁이가 돼버려서요. 더불어 이 앨범은 정규로밖에 묶을 수 없는 마음의 크기라는 생각도 있었어요. 앨범 제목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잖아요. 긴 호흡의 장편 소설처럼 가고 싶었어요. 좀 무겁다면 무겁고, 내밀한 얘기가 많거든요. 계속 무겁기만 하면 힘드니까 좀 더 편안한 곡을 몇 곡을 더 넣어볼까 했는데 잘 안 써지더라고요. 이렇게 저렇게 정리하다 보니 일곱 곡밖에 남지 않았네요. 죄송합니다.

사과를 유도한 질문은 아니었어요. (웃음) 이전 앨범보다 완결성 있는 앨범으로 이해해도 될까요?

맞아요. 예전 앨범은 맨 마지막에 앨범 제목을 지었는데, 이번에는 이미 중간을 넘어갈 때 정할 수 있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딱 정해져 있었거든요. 주제를 먼저 놓고 이에 맞춰 곡을 모은 건 이번 앨범이 처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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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정해진 순간을 기억하세요?

저는 보통 앨범을 만들 때 주위에 앨범 얘기를 많이 해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내가 이런 걸 준비하고 있고, 요즘 이런 마음이고, 이런 걸 쓰고 있다는 얘기를 끊임없이 하거든요. 그러다가 이 문장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 가는 이야기야.” 말하는 순간 굉장히 직관적이고 누구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따로 메모를 해놨어요. 이후에도 제목을 생각했는데, 이보다 더 좋은 후보가 없더라고요. 완전히 확정한 건 앨범과 함께 발간한 책의 원고를 청탁하면서였어요. 작가님들께 이번 제목 한 줄만 보내드렸거든요. 사실 제게도 이 문장이 가진 힘이 굉장히 컸어요. 길었던 여정이 자연스럽게 딱 정리가 되더라고요. 다들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다가 결국 다시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게 되잖아요. 우리는 이 문장을 계속 반복하며 살아가는구나 싶었어요.

앨범을 책과 함께 발매한 점도 독특했어요.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 책을 먼저 구매했는데, 더 풍성하게 앨범을 이해할 수 있었어요.

사실 이 정도 규모로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어요. 처음 계획은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들께 짧은 글이라도 받고 싶다는 생각이었어요. 최근 노래를 낼 때 작가님들께 앨범 소개 글을 받았는데 그게 너무 좋았거든요. 그런데 이번은 정규앨범이니까 내가 곡을 쓸 때 의지하던 작가 여러 분을 모아서 글을 받아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던 거죠. 원래는 브로슈어처럼 만들어서 무료로 배포하려 했는데요. 출판사 ‘픽션들’의 이아립 님에게 아이디어를 말했더니 이런 작가분들이랑 하는 거라면 규모가 너무 아쉽다면서 아예 책을 만들자고 먼저 제안을 해주셨어요. 청탁 메일 담당은 저였는데, 다들 너무 흔쾌히 하겠다고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출판사와 작가님들께 다시 한번 너무 감사해요. 그래서 이 책이 앨범 홍보 목적으로 쓰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예술 장르로 존재하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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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소개 © 픽션들fictiondle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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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책 표지

결국 제목과 커버만 동일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커버는 제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목정원 작가님의 작품이에요. 사실 앨범 커버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번 앨범과 책 디자인을 도와준 픽션들 아립 언니가 목정원 작가님 작품 몇 개를 제안했어요. 작가님도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사실 커버 디자인도 재미있는 구석이 있어요. 작품 원본은 사람들이 왼쪽으로 가는데요. 책 커버에서는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앨범 커버는 위쪽으로 움직여요. 해가 뜨는 곳, 해가 있는 곳으로 가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2019년에 발표한 노래 ‘아무 말도 더 하지 않고’가 앨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당시 겨울에 떠난 삿포로 여행이 큰 모티브였는데, 벌써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네요. 그때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어요.

해당 곡을 만든 건 2018년이에요, 너무 힘든 시기였어요. 노랫말 그대로 처음으로 누군가를 너무 미워하면서 나도 미워졌어요. 말도 안 통하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났어요. 제가 눈을 좋아해서 한겨울의 홋카이도가 바로 떠오르더라고요. 그때 혼자 참 많이 걸었어요. 혼자 등산하고, 혼자 걷고, 진짜 하염없이 걸으면서 계속 자책했어요. ‘내가 왜 그랬지, 내가 믿는 사랑이 뭘까, 내가 하던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을까?’ 모든 게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요. 제가 사람을 되게 좋아하거든요. 사람 좋아하고 사랑 좋아하고 누구를 믿는 걸 너무도 좋아하던 사람이 한순간에 모든 의미를 잃은 거예요. ‘아무 말도 더 하지 않고’ 노래를 보면 ‘불을 밝히지 말아요 어둠을 해치지 말아요 환한 불빛만이 모든 슬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건 아니에요’라는 가사가 있거든요. 정말 혼자, 완벽한 어둠에 있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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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며칠을 보내니 좋아하는 친구들, 행복했던 기억이 막 떠오르는 거예요. 고민과 어둠이 무색하게요. 제가 직접 쓴 가사는 아니지만, 노래 ‘사랑은’에 보면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거’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때 제 마음 그대로였어요. ‘사랑은 어쩔 수 없는 거구나, 다들 진짜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며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요. 물론 돌아왔다고 바로 벌떡 회복하지는 못했죠. 이후로도 침잠의 시간을 오래 겪다가 새 친구도 사귀고 주위의 돌봄도 받으면서 자연스레 치유했어요. 어느 순간 사람들에 둘러싸여 맛있는 밥 먹고, 수다 떨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제가 있더라고요. 그때 이제 비로소 아무도 없는 곳에서의 여행이 끝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부족하지만, 어서 빨리 앨범을 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정말 긴 터널을 통과한 기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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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앨범 마지막 곡명이 ‘사랑을 하고 있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네요.

정확해요. ‘나 이제 돌아왔어, 괜찮아’라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어요. 다음 앨범 기대하셔도 좋아요. 원래 아픔을 딛고 쓴 사랑 노래가…(웃음) 비록 제 힘든 시간을 잔뜩 담았지만, 이번 앨범이 저는 너무 좋아요. 그만큼 작업 과정이 충만하고 행복했거든요.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들을까, 고민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만 이렇게까지 집중한 건 이번 앨범이 처음이에요. 정말 건강하게 사랑받으면서 태어난 앨범입니다. 저는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이 제 곡을 좋아할 때가 제일 행복한데요. 프로듀서 전진희 씨도 그렇고 권영찬 씨를 비롯한 연주자분들도 다들 작업을 좋아해 주시니까 너무나도 행복하고 고마웠어요. 정말 아무것도 무섭지 않더라고요. 앞으로 그분들에게 평생 순종하고 은혜를 갚으면서 살 생각입니다. (웃음)

앨범에서 깊은 허무와 슬픔만큼 따뜻함과 사랑까지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이유를 이제 좀 알 것 같네요. 앨범 제목만큼 제 마음을 울린 게 타이틀곡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의 첫 소절이었어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다 /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고 /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다 / 나는 나를 외로이 버려두었지.’ 으아, 정말 이런 가사는 어떻게 쓸 수 있는 거죠?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은 앨범 첫 곡인 ‘어떤 겨울은’과 함께 삿포로에서 쓴 곡이에요. 말씀하신 딱 그 부분만 써놓고, 3~4년 동안 묵혀놨어요. 한국에 돌아와서 나머지를 써보려고 한참을 고생했는데요. 와, 도저히 안 되더라고요. 그 구절만으로 이미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고생고생하다가 실제로 완성한 건 1년도 채 안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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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델리 스파이스도 ‘차우차우’를 그렇게 완성했나 봐요.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너의 목소리가 들려’ (웃음)

진짜 별생각을 다 했어요. 뒷부분을 다 허밍으로 정리하라는 말도 들었는데 그럴 배짱은 없더라고요. (웃음)

앨범을 들으면서 ‘이렇게 감정만으로 이루어진 앨범은 정말 오랜만이다’라는 감상이 들었어요. 특히 최소한의 단어로 이루어진 시적인 노랫말 때문에 그렇게 더 느꼈던 것 같아요.

실제로 가사에 신경을 정말 많이 써요. 저를 포크 뮤지션으로 많이들 말씀해 주시는데, 보통 포크하면 기타 치면서 노래하는 음악으로 이해하잖아요. 제가 생각하는 포크는 이야기 같아요. 삶의 이야기를 진하게 풀어내는 게 포크라는 장르인 것 같고, 그래서 저는 제가 포크 뮤지션으로 불리는 게 너무 자랑스럽고 계속 그렇게 불리고 싶어요. 제 정체성이 포크이기에 내 이야기를 음악에 솔직히 잘 담아내야 한다는 책임감, 사명감 같은 게 있답니다. 그래서인지 같이 작업하는 분들조차 가사에 있어서는 기다릴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줘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죠. 제 가사 초고를 보시면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시간을 들일수록 나오는 케이스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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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에 공을 얼마나 들이는지 마음으로 느껴지네요.

발음도 엄청 중요해요. 저는 단어 하나하나 사전으로 다 찾아보는데요. 의미는 좋은데 발음이 애매하다 싶으면 유의어와 반의어를 검색하고, 사전적 의미로 풀어낸 문장도 다 체크해요. 거의 집착 수준이죠. 가사든 산문이든 글을 읽다가 걸려 넘어지는 단어들도 최대한 수집하고요. 예를 들어,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에서 ‘나를 키운 건’이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어느 날 ‘키우다’라는 단어가 엄청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그럴 땐 관련 단어를 있는 대로 모아놓고 하나씩 지워나가며 작업해요. 진부하지 않으면서 쉽고, 남용하지 않는 표현을 쓰고 싶어서 정성을 많이 들여요. 가사에 욕심이 정말 많은 것 같아요.

저도 퇴고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라, 지금 엄청나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고민한 시간이 쌓여서 결과가 된다는 말을 믿어요. 예를 들어, ‘사랑한다’라는 말을 쓸 때 그냥 무작정 ‘사랑한다’라고 쓰는 것보다 뭔가 다른 표현이 없을까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돌아와서 쓴 ‘사랑한다’는 서로 다르다고 생각해요. 그 사이에 단어가 품고 있는 게 달라져 버린 거죠. 그런 단어를 모아 부르면, 문장의 두께도 달라져요. 이런 집착 때문에 진희가 애를 많이 먹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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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마침 전진희 씨 얘기를 하려는 참이었어요. 이번 앨범에서 대활약하셨더라고요. 프로듀싱도 담당하고, 4번 트랙 ‘헤어지지 말아요’는 물론 앨범 전반의 피아노 연주도 하시고, 편곡자 명단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있었어요.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특별한 애정을 드러내셨는데, 이 자리를 빌려 공식적으로 고백 한 번 더 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웃음)

저는 지금 이 자리에 불러서 마주 앉아서도 바로 고백할 수 있어요. (웃음) 진희는 제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친구이자, 정말 존경하는 뮤지션입니다. 작업도 무척 열심히 하고, 자기 색깔도 뚜렷하고요. 무엇보다 제 앨범을 자기 앨범 대하듯이 만들어줬어요. 실제로 작년에 진희의 앨범도 나와 버리는 바람에 ‘내 앨범 하나 더 만드는 것 같다’는 말을 할 정도였죠. 진희의 피아노 연주도 정말 좋아해요. 아름답잖아요. 진희가 피아노를 쳐 준 ‘헤어지지 말아요’는 처음 데모를 듣자마자 ‘이건 연주가 아니다. 전진희의 피아노가 나와 같은 목소리의 하나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목에 ‘with 전진희’라는 표기를 꼭 하고 싶었죠. 이외에도 정신적으로도 의지를 많이 하고 있고요. 제가 갑자기 부정적인 생각에 휩싸여서 ‘안 돼. 안될 거 같아’라고 하면 진희가 옆에서 ‘아니야. 어렵지 않아. 쉬워’하면서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돌봐줬어요. 앨범과 관련된 일이라면 녹음에서 사적인 것까지 항상 도와줬죠. 누구보다도 애정을 가지고 제 앨범을 지지해 준 사람이에요. 심지어 작업하면서 서로 싸운 적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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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한 번도 없어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보통 앨범 작업을 함께하면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자주 대립한다고 하던데, 저희는 그런 게 전혀 없었어요. 우선, 제가 프로듀서 말에 좀 순종하는 타입이긴 해요. 절대복종. (웃음) 물론 아무한테나 그러는 건 아니고 이 사람과 하기로 했으면 그 사람을 100% 신뢰해 버려요. ‘이 사람 말고는 나를 위해서 더 무언가를 해줄 사람은 없다’라는 마음으로 프로듀서 말을 하나하나 새겨듣죠. 진희가 ‘프로듀서 할 맛 난다’라는 말도 했다니까요. 무슨 말을 해도 우선 고민해 보겠다는 자세가 너무 좋다면서요. 그런데 문제는 그 피드백이 한 1년 뒤에 오는… (웃음)

강적이네요. (웃음) 그러면 혹시 서로 조율하는 경우도 없었어요?

그건 자주 있었죠. 예를 들어서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이 제게 일종의 도전 같은 곡이었어요. 대부분 어쿠스틱 악기로 시작하는 경향과는 다르게, 이 곡은 앰비언스도 있고 일렉트릭 피아노로 시작해서 제게 굉장히 낯선 편곡이었어요. 그 얘기를 좀 깊게 했던 걸 제외하면… 제가 사실 전진희를 정말 사랑하거든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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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고백이 끊이지 않네요. (웃음) 이쯤에서 사랑하는 분이 더 나올 때가 됐거든요. 앨범의 또 다른 with의 주인공, 안미옥 시인님이요.

피지컬 앨범에는 lyrics로 표기되어 있어요. 전부 lyrics로 하고 싶었는데 유통사에서 음원 사이트 시스템상 표기가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with로 바꿨어요. ‘사랑은’이라는 곡의 가사를 의뢰할 때는 그래도 에세이보다 구체적이었어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앨범을 만들 때 저는 당시까지 내린 인생의 정의에 대한 의심과 무너짐을 경험하고 있었어요. ‘도대체 사랑이 뭘까’, ‘내가 아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 같다’라는 생각이 쏟아지니까 아예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곡을 하나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데 도저히 못 하겠더라고요. 이미 무너졌으니까요. 그래서 ‘우우우우 사랑은, 우우우 사랑은’ 이런 식으로 데모를 녹음해서 미옥 언니에게 드렸어요. 사랑에 대해 제가 생각하던 추상적인 말들도 다 모아서 함께 전달하면서, 언니한테 ‘언니, 잘 써주세요’ 했어요. 나빴죠? (웃음) 그런데 언니가 가사와 시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너무 힘들어하는 거예요. 별별 방법을 써봐도 안 돼서, 문장 써놓은 거를 다 받으니까 A4 2장 분량이었어요. 거기에 있던 문장을 조합해 지금의 가사가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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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런지, 묘하게 강아솔의 가사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저도 그게 재미있더라고요. 제가 보기에도 은근히 비슷하면서, 달라요. 저와 색깔이 맞지만, 또 다른 매력이 있는 글이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평소에 언니 시집을 보면서 자주 작업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녹음 엔지니어분도 귀신같이 ‘사랑은’을 콕 집어서 가사가 너무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안미옥 시인님과 어떻게 알게 되셨어요?

6년 전쯤 행사를 하나 같이 했어요. 그 뒤로 제가 언니를 너무 좋아해서 따라다녔고요. 밥도 먹고, 차도 마시다가, 언니가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하면 더 자주 만날 수 있지’ 고민해 보니 같이 작업하면 되겠더라고요. 정말 좋아하는 시인이자 언니예요.

사람을 정말 좋아하시네요.

맞아요. 처음엔 작품으로 좋아하다가도 나중에는 그냥 사람 그 자체를 좋아해 버려요. 사람은 다 아름다운 것 같아요. 그 아름다움이 하나하나 다 사랑스러워요. 누가 예쁘다 못생겼다, 이런 것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사람 너무 좋아’ 인간입니다. (웃음) 제가 평생 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살아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정말 도움을 많이 받거든요. 좋은 사람들이 항상 곁에 있었고, 그래서 사람을 좋아할 수 있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놀고 수다 떠는 게 정말 너무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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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람을 좋아하는데,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 시기가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돌이켜 보니까,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진짜 힘들었어요. 정말 사랑해서 정말 미워했어요. 태어나서 처음 겪는 감정이었어요. 마음에서 독이 피어나는 게 이런 거구나 했죠. 그렇게 변한 상황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주체가 바로 저였어요. 진짜 미칠 것 같은 거예요. 미움이라는 게 결국 사랑에서 오는 거잖아요. 사실 이 사람은 정말 고맙고 좋은 사람이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내게 너무 상처를 줘서 미운데요. 그렇다고 미워할 수만은 없어서, 한마디로 속 시원하게 마음껏 미워하지 못하는 저 자신 때문에 더 힘들었어요. 그런 게 이번 앨범에 다 담겼어요. 성숙해지기 위해서 필요한 아픈 성장 같은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강아솔의 앨범에서 ‘사랑’은 언제나 중요한 테마예요. ‘이렇게 시작된 사랑’, ‘이게 바로 사랑’, ‘사랑은’처럼 제목에 사랑이 들어간 곡도 많고요. 정규 3집 앨범도 ‹사랑의 시절›이었죠. 이번 앨범에는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멀리 떠났던 강아솔의 사랑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여정을 그리는 느낌이었어요. 지금까지 강아솔이 부르던 사랑 노래의 에필로그 같은 앨범이랄까요.

에필로그라는 말이 정말 딱 맞는 것 같아요. 앨범을 완성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쭉 듣는데, 처음 들었던 생각이 ‘내가 진짜 많이 아팠고, 많이 슬펐구나’였어요. 스스로 짠했어요. 작업하면서 울컥했던 가사가 있거든요. ‘모두가 있는 곳으로’이란 곡의 ‘발길을 돌려 걸어가네 / 내가 있을 곳으로 / 모두가 있는 곳으로’였어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썼던 곡들을 정리하는 단계에서 ‘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고 ‘네가 있을 곳은 여기야’라고 얘기해주는 친구들이 있구나.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엄청나게 크게 다가왔어요. 그때 비로소 실감했던 것 같아요. ‘아, 내가 정말 모두가 있는 곳으로 왔구나. 힘든 시간을 잘 통과했구나. 사랑을 잃은 사람이 아니라 더 많이 사랑하고 싶은 사람으로 거듭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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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솔 3집 ‹사랑의 시절› 커버

앨범에서 느낀 안심과 안도감이 착각이 아니었네요.

저도 제 노래를 들으면서 안심했어요. 다음에는 지금의 나를 노래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얼마나 따뜻한 마음들이 노래에 배어 나올까, 저도 기대돼요. 이제 새해잖아요. 그래서 올해에는 곡을 많이 쓰려고 다짐하고 있어요. 지난 몇 년 동안은 회피하고 싶은 감정을 곡으로 쓰는 게 괴롭고 힘들었지만, 지금은 똑바로 마주 봐도 행복한 감정밖에 없어서 덜 괴롭게 곡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혹시 힘들 때 만든 노래로 라이브 하기가 힘들지는 않나요?

그냥 ‘노래 잘 썼네’, ‘가사 좋네’ 해요. (웃음) 앨범 발매 전에 진행한 단독 공연에서 이번 앨범 수록곡을 들려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요. 따지고 보면 ‘제가 이렇게 아주 힘들었답니다’라는 걸 처음으로 밝히는 자리잖아요. 그래서 관객분들이 다 제 친구들 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얘들아. 나 이렇게 힘들었다’라는 마음으로 편하게 칭얼댔어요. 오래 담아온 마음을 풀어내는 자리이다 보니까 벅차기도 했고요. 오히려 제 친구들이 가끔 놀려요. “너 이런 사람 아니잖아!” 그럼, 제가 말하죠. “니들이 뭘 알아!” (웃음) 제가 하는 창작 활동이 대부분 내밀하고 밀도 있는 일이다 보니, 일상에서는 명랑하고 단순하고 가벼워지고 싶어요. 다만 음악 할 때만큼은 진중하고 깊어지지요. 그래서 음악은 제 삶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존재 같아요. 

‘밸런스 강’, 강아솔의 2024년 계획을 알려주세요.

올해에는 연주곡을 많이 만들어 보고 싶어요. 연주곡 만들기를 되게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앨범마다 연주곡을 수록하기도 하고요. 원래 저는 작곡가 지망생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싱어송라이터로 살고 있는데, 아직 연주곡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답니다. 이번 앨범 첫 곡 ‘어떤 겨울은’이 제가 처음으로 발표한 기타 독주곡이기도 해요. 올해는 그런 곡을 많이 작업해 볼까 합니다. 다른 기타리스트분과 협업 계획도 세웠어요. 진행 중인 멜론 스테이션 팟캐스트도 계속 이어갈 것 같고요. 얼마 전부터 와우산 레코드와 함께하기로 해서 회사 분들과 재미난 계획을 도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든 기쁘게, 또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 물어보고 싶어요. 강아솔이 생각하는 ‘사랑’은 뭔가요?

‘라디오스타’ 식 진행이네요. (웃음) 강아솔에게 사랑이란 ‘매일 하는 것’입니다. 일상이나 호흡처럼요. 사랑이라는 말을 저는 정말 매일 쓰거든요. 친구, 연인, 지인 누구에게나 사랑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표현해요. 그냥 그게 제 사랑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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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강아솔은 포크 싱어송라이터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그는 2012년 그 동안 만든 노래를 모아 정규 1집  ‹당신이 놓고 왔던 짧은 기억›을 발표한다. 앨범에 담긴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목소리와 노래가 진심 어린 음악을 찾아 헤매는 이들을 빠르게 끌어당겼고, 강아솔은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정규 2집 ‹정직한 마음›(2013), 정규 3집 ‹사랑의 시절›(2018)을 비롯해 싱어송라이터 수상한 커튼, 이아립과 함께한 ‹우리의 만춘›(2019), 피아니스트 임보라와 호흡을 맞춘 EP ‹유영›을 발표하고, 다수의 싱어송라이터가 모인 음악동아리 ‘작은평화’를 결성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치열한 시간 중 저만 알고 있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결국 다시 빛을 찾은 여정 끝에 2023년 5년 만의 정규작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를 발표했다.

Writer

김윤하(@romanflare)는 K팝에서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관해 쓰고 이야기하는 대중음악평론가다. 다양한 온오프라인 매체에 글을 기고하거나 출연하면서, 가끔은 작가 겸 기획자, 음악 콘텐츠 프로듀서로 일한다. 2023년 TVING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케이팝 제너레이션K-POP GENERATION›에 스토리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현재 «한국일보»«국민일보»«시사IN»«채널예스»에 칼럼을 연재하며,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사랑과 음악이 끝내 세상을 구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