밈 원정대: 한국 인터넷 밈의 시조새는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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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비애티튜드»의 새로운 에세이 필자인 김경수 님이 한국 인터넷 밈에 대한 연재를 본격적으로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무척 익숙해 보이지만 실상 파고들면 끝없는 세계가 펼쳐지는 인터넷 밈을 찬찬히 살펴보려면 그 기원부터 후루룩 훑어야겠죠? 경수 님의 놀라운 능력에 힘입어 «비애티튜드» 독자를 위해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한 편의 글로 깔끔히 정리해 보았어요. 한국 인터넷 밈이 지금의 황금기를 맞이하기까지 겪은 여러 시대적 상황과 고유한 특성, 기본 어휘 등을 이해하며 기초를 탄탄히 쌓기에 이번 에세이만큼 효과적인 한 방은 극히 드물 겁니다. 한 마디로 두고두고 모셔놓고 읽을 만해요. 그럼 우리 함께 한국 인터넷 밈의 시조새를 잡으러 떠나 볼까요.

영화비평가지만 부끄럽게도 이소룡보다 싱하형의 존재를 먼저 접했다. 또 이소룡을 안 다음에도 그 둘이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출처를 알게 되었을 때, 이야말로 짤방의 재미라 생각했다.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나. ‹메이플 스토리› 게임 카페에서 퀘스트 공략을 검색하던 중 낯선 게시물을 발견했다. 제목이 이상했다. ‘개웃긴 싱하형 모음집’이라니. 호기심을 못 참고 살짝 클릭했다. 처음으로 인터넷 밈을 접한 순간이었다. 우는 듯 찡그린 듯 묘한 표정을 지은 한 남성의 사진이 등장했다. 싱하형이었다.

그는 “형왔다!!”라는 강력한 첫 문장을 시작으로 “9초도 11초도 아닌 정확히 10초에 한강 굴다리로 텨와라.”라든지 “야 이 새퀴들아 존내 맞는 거다.” 등등 현란한 말빨을 자랑했다. 나는 곧장 홀려버렸다. 이윽고 스크롤을 내리니 원본을 가공한 짤방이 등장했다. 부처님, 유희왕 카드, 당시 유행하던 영화 포스터를 비롯해 온갖 곳에 싱하형 얼굴이 출현했다. 한강 굴다리와 10초, 존내 맞는 거다 등의 캐치프레이즈는 합성 사진의 뉘앙스에 따라서 적절히 변형됐다. 매 이미지가 웃겨서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한동안 내 머릿속은 싱하형 차지였다. 학교 수학 시간에 싱하형을 노트에 그리다 걸려서 혼나기도 했다. 그런 싱하형을 시작으로 나는 당시 유행하는 짤방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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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씨의 유명한 악플러 싱하의 첫 등장을 알린 게시물이다. 사실 싱하형은 싱하라는 유저가 횽왔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말투에서 딴 이름이므로 싱하라는 원본과 거리가 있다. 악플러인 싱하는 잘 기억되지 않고 싱하형이라는 인터넷 밈만 남은 것이다. 나는 이를 자정 작용이라 생각한다.

그때부터 ‘인터넷 밈은 무엇인가?’, ‘왜 그리도 나를 웃게 했던가?’ ‘왜 싱하형과 “내가 고자라니”라고 외치는 심영에게 홀렸을까’라는 질문은 내가 평생 답해야 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인터넷 밈으로 먹고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더욱 치열히 대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한국 인터넷 밈의 기원을 뒤적거리며 그 명과 암을 살피는 일은 필수일 테다.

심영의 “내가 고자라니! 를 처음 본 순간에 고자의 뜻도 몰랐고, 이 짤의 원본인 ‹야인시대› 64-65화를 본 적이 없다. 그저 심영의 절규가 웃겨서 매일 반복해 보았다. 나중에야 심영이 공산주의자인데다가 진짜로 고자가 된 것이 아니라 김두한이 라디오에 서 한 허풍을 작가가 한 차례 더 부풀려 만든 것임을 알았을 때의 충격을 잊기가 힘들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 밈으로 ‘여겨지는’ 게시물은 (놀랍게도) 실존한다. ‘복숭아맛’이라는 유저가 2001년 7월 17일 디씨인사이드(이하 디씨)에 올린 ‘오늘 산 중저가형 모델 싸게 팝니다..’이다. 비슷한 형태의 게시물이 이전에도 존재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서버를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글쓴이의 개인적인 사정만으로도 시대를 강타한 전설적인 글의 원본이 언제든 사라진다. 그래서 살아남는 존재가 가장 강하다. 성지로 등극하기 때문이다. 해당 글은 언뜻 보기에 중고 디지털카메라를 판매하는 평범한 게시물이다. 아직 디씨가 중고 카메라 커뮤니티로 불리던 시절, 디씨 회원들이 중고 카메라를 판매할 때 쓰는 글의 스타일을 흉내 냈는데, 막상 게시물을 클릭하면 먹다가 남은 과자 사진이 나왔다. 사진 한 장만 바꿨을 뿐인데 중고 카메라 판매 글은 과자 판매 글이 되었고, 이후 인터넷 밈의 기원으로 회자되면서 성지 순례의 대상으로 신분이 격상했다. 지금이야 흔하디흔한 드립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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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를 카메라에서 과자로 바꾸었을 뿐인데 이만큼 재밌어질 수 있다니. 이처럼 사소한 장난이 축적되다가 유머 게시판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디지털카메라 동호회가 한국 인터넷 문화의 성지가 되리라고 누가 생각했을까.

무엇보다, 이 게시물은 ‘낚시’라는 형식을 유행시켰다. 제목과 내용 사이의 아이러니가 특징인 낚시는 오직 인터넷에서만 제대로 기능한다. 모든 텍스트는 제목과 내용 간에 긴장을 지닌다. 책이라면 제목과 목차가 내용을 적절히 압축해 출간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인터넷 게시판은 다르다. 제목을 클릭해야만 다음 링크로 넘어가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제목과 내용 간에 별다른 연관성이 없으면 그대로 낚시를 당할 수밖에 없다. 속수무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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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는 당시 인터넷 커뮤니티의 엄숙한 분위기를 부수는 장난이었다. 동호회 성격을 띤 과거의 커뮤니티에서는 해당 주제에 어울리는 내용만 논해야 했다. 이런 진지함에는 불필요한 잡담을 막는 순기능뿐 아니라 역기능도 있다. 제목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제곧내(제목이 곧 내용)’ 게시물에도 불필요한 내용을 적어야만 했다. 이런 강요와 제약을 피하는 우회로가 ‘짤방(짤림방지용 사진)’이다. 내용이 시답잖고 별것 없더라도 게시물 꼴은 갖췄으니 제재하지 말라는 일종의 저항이나 다름없었다.

낚시용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밈 중 하나를 예시로 들어보겠다. 나도 여러 차례 당했고, 동시에 애용하던 방법이다. ‘유명 아이돌 멤버 A 씨, 일반인과 열애 인정.jpg’라는 제목의 게시물이 있다고 치자. 웬만한 돌부처가 아니고서는 마우스 커서를 클릭하지 않을 인내심이 없다. 그리고, 짜잔. 예수님이 제자 베드로에게 “이제부터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아동 만화 한 컷이 등장한다. (자매품으로 ‘도라에몽 낚시 짤방’이 있다.) 실제 원본이 『만화로 보는 어린이 성경』이다. 예수님 입에서 낚시라는 말이 나와서 그런지, 화가 치밀기 보다는 오히려 차분해지는 아이러니가 제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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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낚시는 저질스럽고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유통하는 데에도 한몫 제대로 했다. ‘낚일 만한’ 제목의 게시물에 ‘낚인’ 사실을 알리는 짤방을 매칭하지 않고, 아주 평범한 제목에 고어, 포르노, 욕설 등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붙이는 것이다. 나 또한 이를 통해 고어나 포르노 이미지를 조우하곤 했다. (굳이 사례를 들진 않겠다.) 그때는 이 모든 것을 ‘엽기’라는 미명 아래 용납하던 시절이었다. 폭력적인 콘텐츠와 음란물에 대한 단속이 강화된 지금은 당시 유행하던 수위의 이미지를 올리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낚시는 지금도 여전히 건재하다. 소셜미디어 속 바이럴 마케팅에서 애용하는 카드 뉴스를 보자. ‘요즘 논란’ 운운하는 제목으로 시작하지만 막상 페이지를 넘기면 ‘찍먹vs볶먹’ 따위의 별것 아닌 사건이 펼쳐진다. 이와 반대로 커플 썰을 평범하게 풀다가 마지막 장에 급작스레 남성용품 광고를 하는 경우도 있다. 조회수만 오르면 뭐든 못 하는 게 없는 세상이라지만 지극히 옹졸한 행태로 계승됐다.

낚시와 더불어 인터넷 밈의 또 다른 원초적 특성으로는 재생과 정지를 꼽을 수 있다. 지난 2020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어도비에서 서비스를 종료한 파일 형식, 플래시(.swf)를 기억하는지? 플래시는 게임, 애니메이션, 뮤직비디오 등 개인이 창작한 B급 감성의 2D 콘텐츠를 동시다발적으로 퍼뜨리며 작금의 인터넷 문화를 만드는 데 크게 공헌한 주인공이다. 플래시로 유통된 콘텐츠 중 허무송은 재생과 정지가 짤방의 기원임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예다.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라는 가사를 “아빠가 출”로 줄여 유저를 당황시키고, “엄마가 안아”를 “엄마가 안 와”로 바꿔 노래 ‘뽀뽀뽀’를 동심 파괴의 장본인으로 만든다. 특히 “아빠가 출”이라는 가사가 나오는 대목에서 영상 속 남성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지는데, 싱하형이 탄생하는 논리가 이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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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래시 애니메이션은 그때만 해도 뮤직비디오의 대안으로 기능했다. 동요도 뮤직비디오가 있어야 더 어린이에게 잘 불렸으므로 동요를 기반으로 한 플래시 뮤비가 많이 제작되었다. ‘당근송’, ‘숫자송’ 등이 그 사례다. ‘허무송’은 이러한 –송 시리즈의 반발로 등장한 것이다. 2004년 즈음 웃대의 한 유저가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싱하형의 이미지는 사실 이소룡이 출연한 ‹용쟁호투(龍爭虎鬪)›(1973)의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탄생했다. 이소룡의 극 중 캐릭터가 여동생을 죽인 원수에게 복수하며 그의 몸을 짓밟고 서는 장면이다. 그런데 얼굴에 울분이 가득한 영상을 정지하는 순간, 이소룡의 표정은 급작스레 우스꽝스러워진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새로운 표정의 발명은 마치 허무송의 가사를 멈출 때의 허무함과 당혹감을 괴상한 표정으로 그려내는 일과 유사하다. 인간이 실제 지을 수 있는 표정의 범주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싱하형 같은 짤방은 비언어적인 소통을 가능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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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에 제작된 이소룡을 스타덤에 오르게 한 미국 영화. 미국 전역에 쿵푸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소림사 무술인 리(이소룡)가 여동생을 죽인 숙적 한(석견)에게 복수한다는 내용. 스파이 장르의 플롯 공식을 따다가 만든 영화로 지금까지도 홍콩 무협 영화의 대표작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움짤은 이런 면모가 발전한 경우다. 영상을 초 단위로 잘라 음성 없이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성 영화 시대의 제스처와 닮았다. 축구 감독 최강희의 모습을 담은 움짤은 “아 식빵 무지 달다! 이거 팬케이크 아냐?”라는 감탄사로도, “이게 왜 경고야. 파울이구먼!”이라는 항의로도 읽힌다. 몸짓과 입 모양 등으로는 피사체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모호함이 깃들었다. 오직 움짤을 가져다 쓰는 사람이 그 뜻을 결정할 뿐이다. 이는 당시 인터넷 밈 문화를 만들던 청년 세대와 이어진다.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요즘 말로 ‘갓반인’이 되지 못한 그들은 쓰고 남은 존재, 즉 잉여로 호명됐다. 잉여 인간이 인터넷 공간에서 제 목소리를 내면서 함께 진화한 게 짤방과 움짤이다. 이들은 지금도 일상 속 자질구레하고 잉여로운 순간을 가장 정확히 공유하는 제스처적 소통 방식으로 건재하다.

마법의 짤이라 불리는 이 움짤은 최강희 전북 현대 감독이 2016년 K리그 최종전에서 전북 현대와 FC서울이 경기를 벌이는 중 득점 찬스가 날아가 버린 상황에서 탄생했다. 원본에서는 사실 소리가 삽입되어 있다. “아, 정말 미치겠네! 왜 그걸 안 차? 라고 따지듯 말했다지만 원본에서 육성이 잘 안 들려서 헷갈린다. 원본이 뭔들 움짤이 재밌으면 그만이다. 영화에서도 관객의 상상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지점이 있듯이 말이다.


이쯤에서 인터넷 밈에 대한 특성을 종합해 보자. 우선 특정 유저들이 짤방과 움짤 등을 활용해 온갖 합성 소스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일정한 규칙이 통용되는 세계관을 구축한 후, 여기에서 각자 독립적인 상상으로 합성 소스를 재창조하는 행위가 바로 인터넷 밈이다. 이때 재창조는 이른바 ‘드립’이라 부르는 디씨식 농담 코드에 기반한다. 애드리브의 준말로 즉흥적인 농담을 뜻하는 드립은 디씨 갤러리에 글이 올라올 때 최대한 빨리 웃긴 농담을 댓글로 달아서 베댓(베스트 댓글)이 되려는 경쟁에서 유래했다. 촉박한 마감에서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탄생하듯 드립은 개인의 창조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며 예측불가능한 유쾌함을 안긴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웃겨야 한다는 강박이 무의식에 깔린 저속하고 비윤리적인 말까지 여과 없이 끌어낸다. 여성, 소수자 등 타인에 대한 혐오를 그대로 드러내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드립과 이에 기반한 인터넷 밈은 선과 악의 이중성을 모두 지닌다.

하지만 여기에 절망으로 대응하는 건 성급하다. 짤방이 인터넷 밈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정화되는 경우도 많다. 짤방의 기원이 입에 못 담을 만큼 더러울지라도, 대중의 손을 거쳐 세계관이 형성된 이후에는 원본의 부정적인 뉘앙스가 사라지곤 한다. 드립 또한 특정 세계관에 머무를 때 수많은 창조의 원천 역할을 맡는다. 그러니 원본의 출처를 의심하고 조심하는 일이 필요할지언정 늘상 진지할 필요는 없다. 인터넷 밈은 원본 짤방을 다시 한번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 스스로 풍자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기 때문이다. ‹야인시대›를 활용한다고 조폭을 미화하는 게 아니다. 유저에게는 합성 소스로 활용가능한 ‘그 무엇’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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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일리가 있구먼!

여기서 잠깐! 이제 한국 인터넷 밈의 시조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겠다. 미안하다. 사실 이거 말하려고 지금까지 어그로 끌었다. 2019년 6월 19일 오후 1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프레스로 일하는 중 우연히 상황주의자라는 아방가르드 운동 집단이 1973년 만든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라는 괴상한 영화를 접했다. 한국과 홍콩의 합작 영화 ‹정도›(1972)를 ‘전용’했다는 소개 글에 끌렸다. 사실 전용이 뭔지도 잘 몰랐다. 근데 영화를 보는 동안 싱하형을 처음 접했을 만큼이나 배가 아프게 웃었다.

원작 ‹정도›의 배경은 한국이다. 태권도를 수련하는 한국인과 검도를 수련하는 한국인 사이의 갈등을 그린 작품의 장르와 플롯은 전형적인 무협 영화에 가깝다. 상황주의자는 여기에 무단으로 프랑스어 더빙을 덧입히고 원본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 선전 자막을 달았다. 어린아이 두 명이 체 게바라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대화를 나누고, 연인과 보내는 마지막 밤에서 정치적 노선에 대한 토론을 진행한다. 일본인 검도인은 오가는 곳마다 X 표식을 치면서 “노동은 자유를 만든다!” 윽박지른다. 감독의 장난으로 평범한 무협 영화는 혁명이 무엇인지 논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가득한 프로파간다 영화로 변신했다. (TMI지만 박정희 체제 때 벌어진 일이라 원작 영화의 제작자가 영문도 모른 채 심문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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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1972)는 한 홍 합작 영화로, 홍콩에서는 ‹당수태권도›로 개봉했다. ‹정도›의 감독은 강유신, 각본은 유일수이며, 홍콩 영화 ‹당수태권도›의 감독은 도광계와 예광으로 알려져 있다. 캐릭터는 모두 중국어를 하는데, 배경은 왜인지 경복궁인 이 이상한 영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1973)로 전용당하기 전 원본부터가 이상하다.

영화를 이렇게까지 바꾼 동인은 아까 잠시 언급한 전용(détournement)이다. 프랑스 철학자, 기 드보르Guy Debord가 제안한 개념인데, 그는 세상을 언어의 쟁탈전이라고 본 듯하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단어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주변만 봐도 힐링, 인문학 등 삶에 진정으로 필요한 단어가 그 희생양이 되지 않았던가. 돈벌이 수단이 된 단어를 탈환하라고 촉구한 드보르는 광고나 영화 등을 뒤집고 도둑질하는 것을 일상 속의 혁명이라고 보았다. 그를 추종하던 상황주의자가 ‹정도› 같은 장르 영화를 도둑질하고 인물의 제스처를 어거지로 해석한 방법은, 신기하게도 요즘 인터넷 밈이 창조되는 논리와 매우 비슷하다. 1970년대 소비주의 사회에 저항하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가 펑크록 등 후대 하위문화에 영향을 끼치며 실제 그 에너지가 인터넷 밈으로 이어졌기 때문일 테다. 다만 그 루트를 여기에 더 쓰면 머리가 복잡하니,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내가 인터넷 밈에 매혹당한 까닭은 이런 ‘어거지 부리기’에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매끈함은 인간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조금이나마 심기에 거슬리는 사람을 모두 차단하며 믿고 거른다고 당당히 말한다. 그에 비해, 인터넷 밈은 매끈함에 저항한다. 믿고 걸러진 것들이 펼치는 향연이 곧 인터넷 밈이다. 인터넷 밈을 제작하는 기법을 살피면 더욱더 명확해진다.

초기 인터넷 밈은 주로 누끼따기로 제작했다. 누끼는 다른 소스와 합성해도 원본에서 대상을 자른 흔적을 그대로 지닌다. 누더기를 기운 듯 완벽하지 않은 느낌이 도리어 정감을 준다. 더욱이 서로 다른 세계에서 잘려 나온 존재들이 동일한 배경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야말로 진정한 MCU(Meme Cinematic Universe)다. 유튜브에서 유행하는 영상도 마찬가지다. “내가 고자라니!”라는 장면에서 시작해 이제는 ‹야인시대›의 영상 전반을 광범위하게 합성 소스로 활용하는 인터넷 밈 ‘심영물’을 보라. 심영물 제작자는 ‹야인시대›에 나온 다른 대사의 음성을 음절 단위로 떼고 조잡하게 이어서 새로운 대사를 만든다. 실제 존재하지도 않는 말을 생성하는 걸 업계 용어로 ‘조교’라고 한다. 전문가의 힘을 빌리면 충분히 자연스럽게 이어 붙이며 최대한 매끈하게 만들 수 있지만, 인터넷 밈은 이를 거부한다. 조교를 통해 무엇을 짜깁기했는지 선명히 드러날수록 더욱더 큰 인기를 누리기 때문이다.

영상 속 세 고양이는 각자 출처가 다르다. 해피캣이 기쁨에 찬 상황에 등장하자, 이와 반대로 맨날 우는 바나나캣이 더해졌다. 이같은 방식으로 각자의 역할이 생기고 역할놀이가 시작된다. 각자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가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는 이 밈이야말로 타자와 공존하는 사회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어쩌다 보니 자꾸 심영물 타령을 하는데, 사실 이미 옛것이 됐다. 인터넷 밈은 늘상 진화한다. 지금은 푸바오를 중심으로 한 바오네 가족이 인기 계보를 이어가는 중이다. 바오네 가족은 송영관/강철원 사육사(조부모), 아이바오/러바오(부모), 푸바오, 후이바오, 루이바오로(손자)까지 3대에 걸친 가족 서사가 핵심이다. 활동적인 푸바오에게는 푸질머리(푸바오+성질머리), 푸쪽이(푸바오+금쪽이), 아이바오에게는 아여사, 러바오에게는 러부지, 러스타 등 여러 별명이 더해진다. 이렇게 캐릭터와 저마다의 역할이 생기면서 인터넷 밈은 끊임없이 풍성해진다. 여기에 유튜브 시리즈 ‹전지적 할부지 시점›에 올라오는 푸바오의 일상, 푸바오 팬이 용인에서 직접 공수한 푸바오 사진으로 유저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바오네 세계관을 계속 확장한다. 그럼으로써 공급자-생산자-소비자로 이어지는 대안적인 예술계가 생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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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바오가 인기를 얻게 된 계기가 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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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 모두가 제 나름대로 예술과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터넷 밈은 21세기판 역할극이다. 남극 곳곳을 탐험하는 조종사이자 세상 모든 어린이의 우상인 뽀로로 선생님(2003~)은 말씀하셨다. “노는 게 제일 좋아.” 인터넷 밈이 아니었다면 많은 이들이 이렇게 노는 법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인터넷 밈 특유의 독특하고 매혹적인 특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매끈해지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인터넷 밈의 미학은 매끈하지 않은 것을 차례대로 나열해 제작 과정을 공개적으로 노출하는 행위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약을 빨고 만들었는지, 얼마나 쓸데없는 노력을 가미했는지 여부가 작품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는 점에서 이 땅에서 진정 ‘노오력’이 인정받을 수 있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소셜미디어의 유머 계정처럼) 출처가 불분명한 남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가 보기 좋게 결합하는 광경은 솔직히 고깝다. 출처가 분명한 소스를 이질적으로 조합한 인터넷 밈이 훨씬 더 윤리적이고 미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무척 정치적이지 않은가. 단일하지 않은 수많은 정치적 목소리가 평등하게 존재하는 유토피아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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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게 제일… 좋아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단행본으로 나올 채비를 마치고 있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아티스트를 위한 새해맞이 꿀팁 10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Essay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후회도, 미련도 집어 던지고, 새로운 한 해를 기분 좋게 맞이하는 준비를 다들 하고 계시겠지요? ‘현대미술 설명서’를 연재하는 박재용 님 또한 이런 니즈에 부응해 예술 및 미술계에서 일하는 크리에이터를 위한 새해맞이 액티비티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셨답니다. 이름하여, 아티스트를 위한 새해맞이 꿀팁 10!!! 재용 님의 오랜 노하우와 위트를 촘촘히 엮은 아티스트 맞춤형 새해맞이 권장 꿀팁이 벌써 궁금하시다고요? 아티클에서 차근차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01,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02,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지난 1월 1일 오전 7시 26분. 새해 첫 일출과 함께 한국의 2024년 또한 드디어 개막했다. 물론 그전부터 소셜 미디어의 타임라인에는 2023년 한해를 회고하는 포스팅이 멈추지 않았으며, 1월 1일 신정 당일에는 휴일에 아랑곳하지 않고 새로운 해의 다짐을 선언하는 의지가 끊임없이 탄생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따뜻한 이불을 덮어쓰고 감귤류 과일을 까먹으며 다양한 플랫폼에 ‘좋아요’와 댓글을 남기고 있을 미술, 예술계의 여러분이 한 해의 시작을 좀 더 즐겁고 생산적으로 보낼 만한 몇 가지 꿀팁을 준비해 보았다. 무척이나 간단한 활동들이니 부디 가벼운 마음으로 시도해 보길 바란다. 일부는 초급, 중급, 고급 단계로 나누어 세심하게 제안했고, 심화 활동도 존재한다. 그럼, 올 한 해도 다이내믹한 성장을 기대하며,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

✓ 꿀팁 1: 각종 기금에 선정된 예술인과 프로젝트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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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사이트에 접속해 보자. 주소는 www.arko.or.kr이다. 메뉴를 굳이 찾을 필요도 없이, 메인 화면에는 친절하게 배너가 떠 있다. ‘2024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지원심의 결과발표’를 확인해 보자. 본인이 활동하는 영역을 클릭해 어떤 사람과 프로젝트가 선정되었는지, 더불어 심사위원은 어떤 말을 남겼는지도 한 번 쭉 살펴보자. 2024년도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에는 총 7287건이 신청했고, 그 가운데 우리는 선정된 1006건에 대한 정보를 열람할 수 있다. ‘박*용’처럼 형식적으로 익명 처리된 이름을 살펴보며 선정자를 추측할 수도 있고, 사업명을 체크하며 어떤 내용의 프로젝트가 펼쳐질지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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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지원 관련 배너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웹사이트

한 해의 시작을 기금 선정 결과 열람과 함께 시작하게 된 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연말까지 정산을 마쳐야 하는 지원 사업 선정 결과가 겨울이 끝날 즈음에 발표되는 참극이 일어나기도 했으니.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대통령 시절의 ‘블랙리스트’ 논란이나 2021년 베네치아 비엔날레 국제미술전 한국관 예술감독 재심의 논란 등을 겪으면서 심사 결과 발표가 빨라졌을 뿐 아니라 이제는 심사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게 되었다. 물론, 서울문화재단 등 전국 각지에 산재한 100여 개의 기초지역문화재단 대부분은 2024년도 지원사업 발표를 아직 완료하지 않았다. (참고로 서울문화재단은 2023년도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과 청년예술지원사업 공모 내용을 당해 1월 13일 금요일에 발표했다.)

기금 선정 목록에서 혹시나 내가 아는 동료나 스치듯 이야기를 나누었던 프로젝트의 제목을 보게 된다면,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진행을 기원하는 응원의 메시지를 나누어 보도록 하자. 참고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기금 결과 발표 게시글은 모바일 접근성이 좋지 않으니 PC 앞에 정자세로 앉아 열람하도록 하자.

심화 활동.

만일 지원사업에서 낙방했다면, 선정된 예술인이나 프로젝트, 그들이 선정된 지원제도를 살펴보면서 앞으로 자신의 활동으로 지원금 신청에 성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궁리해 보자. 다만, 기금을 받았다고 무조건 ‘뛰어나다’라는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유의하도록 하자.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 웹사이트나 정책연구관리시스템(www.prism.go.kr)에서 ‘예술’이나 ‘문화’를 키워드로 각종 정부 용역 연구 보고서를 열람하면서 앞으로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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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용역 연구 보고서 중 ‘예술’ 키워드 검색 결과 © 정책연구관리시스템 웹사이트

✓ 꿀팁 2: 미술, 예술계의 아주 가까운 미래를 그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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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를 박차는 것조차 기가 빨리는 새해 초, 올 한 해 열릴 전시나 행사를 한 번 훑어보는 것도 좋다. 현대 문물의 발전에 힘입어 이제 누워서 휴대전화를 깔짝거리기만 해도 많은 게 가능해졌다.

초급

검색 엔진에 ‘2024년 전시’를 키워드로 넣고 돌려보자. 주요 미술관에서 배포한 보도자료를 취합해 만든 다양한 기사를 발견할 수 있다. 차분히 열람을 지속하다 보면 특정 기관과 갤러리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는 점을 알아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024년도 예정 전시 기사를 쓰려면 보도자료가 선행적으로 배포되어야 하고, 보도자료를 배포하려면 주최 측에서 2024년 일정을 확정해야 하고, 미리 일정을 확정하려면 아무리 늦어도 작년 후반에 계획이 나왔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자체적인 계획만큼이나 기금 선정 발표도 미리 이뤄져야 하니…

중급

국내를 넘어 해외로 관심을 넓혀보자. 미국의 «Artnet», 영국의 «The Art Newspaper», 홍콩의 «Art Asia Pacific»을 비롯해 다양한 국제 예술 매체에서 셀 수 없이 많은 ‘Exhibitions to see in 2024’를 살펴볼 수 있다. 이르게는 지난해 12월 초에 게재한 ‘2024년에 볼 만한 전시’ 기사를 통해서 매체별로 선정한 주요 전시와 함께 안테나를 세울 만한 작가 및 주제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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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IBITIONS TO SEE 검색 결과 © Art Asia Pacific 웹사이트

고급

매체들이 앞다투어 생산하는 ‘볼 만한 전시 목록’을 소비하는 대신, 평소 관심 있게 지켜보던 미술관이나 미술 공간에서 열리는 새로운 전시들을 직접 살펴보는 건 어떨까? 아쉽게도 한국의 많은 미술 관련 기관의 공식 웹사이트에서 가장 업데이트가 늦게 되는 메뉴가 바로 ‘예정 전시’ 부분이다. (2024년 1월 1일을 기준으로, 국립현대미술관 웹사이트의 ‘예정 전시’ 메뉴에 업데이트된 전시는 «한국 근대 자수(가제)» 하나 뿐이었다. 2024년도 신규 전시 목록을 언론에 발표한 1월 9일 이후에도 상황은 동일하다. 이 글이 발행됐을 때는 부디 다양한 전시로 꽉꽉 채워지길 기원한다.)

심화 활동.

의지와 열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관이 배포하는 보도자료 원본에 접근해 보자. 예를 들어 서울시립미술관은 웹사이트 첫 페이지 아래쪽 ‘뉴스와 공지’를 클릭하고 ‘보도자료’ 섹션에 들어가면 2023년 12월 15일에 게시된 ‘서울시립미술관 2024년 주요 전시 공개’ 포스팅을 열람할 수 있다. 상세한 내용은 게시글에 첨부된 [보도자료]_서울시립미술관_2024년_주요_전시_공개(수정).hwp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국내외 미술관 웹사이트를 오가는 과정에서 ‘비교체험 극과 극!’도 가능한데,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이나 영국 테이트 미술관 웹사이트의 ‘What’s On’ 메뉴를 클릭하면 2024년 열리는 모든 전시를 낱낱이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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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2024년 주요 전시 공개’ 포스팅 © 서울시립미술관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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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2024 전시 아카이브 페이지 © MoMA 웹사이트

✓ 꿀팁 3: 미래만 보지 말고, 과거도 살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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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이해 미래만 바라보는 대신 과거를 돌아보는 것도 좋은 활동이다. 때마침 한국 문화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과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장관을 하던 분이 재임 중이다. 그렇기에 과거 살펴보기는 올 한 해를 시작하기에 꽤나 적절한 활동이 아닐까 한다. 미술 분야에 한정해 이야기해 보면, 과거의 흔적을 차분하게 살필 수 있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 먼저 대학로 아르코 아트 센터에 자리하고 있는 ‘아르코아카이브’를 추천해 본다. 2009년부터 자료를 차곡차곡 축적 중인 이곳에 들러 10년 전인 2014년 1월을 기점으로 미술 관련 매체가 지금까지 어떤 내용을 특집으로 삼았는지 살펴보며 현재 상황과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국립현대미술관의 ‘디지털도서관’에 들러 과거를 풍미한 각종 전시 도록을 살피는 것도 좋다.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말에 약간이라도 진실이 담겨 있다면, 새해를 맞이해 돌아보는 과거 기록에서 눈앞에 놓인 미래에 대한 단서를 찾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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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도서와 아카이브’ 섹션에서 확인 가능한 컬렉션 중 일부 © 국립현대미술관 웹사이트

심화 활동.

2023년 평창동에 개관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는 한국 현대미술 작가와 연구자에 관한 소장 자료를 검색 및 열람할 수 있는 ‘컬렉션’으로 제공한다. 이곳에서 아카이빙한 소장품을 검색한 뒤 열람을 위해 직접 방문해 보자. 의지 몇 방울만 있다면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시간의 틈을 넘어 미래의 낯선 이와 연결되는 미술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전경 © 서울시립미술관 인스타그램

✓ 꿀팁 4: 미술이 놓인 세상을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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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가끔 예술이 세상의 전부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 너머에는 더욱더 거대한 현실 세계가 존재한다. 새해를 맞아, 우리 자신과 미술·예술을 둘러싼 이 세계의 쟁점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 보자. 스스로 추구하는 예술과 삶, 활동의 위치와 의미가 세상과 맺는 맥락을 파악해 보는 것은 자기 객관화에 큰 도움이 된다.

초급

검색 엔진에서 ‘2023년 사건·사고’ 검색하기. 검색 결과 상위 페이지에서는 나무위키의 ‘2023년/사건·사고’, KBS가 보도한 ‘사건·사고로 얼룩진 2023년’, 인스타그램에서 ‘좋아요’ 1만을 향해 달려가는 ‘‼한눈에 보는 2023년 월별 사건·사고 총정리!!’ 같은 콘텐츠를 볼 수 있다. 더불어 ‘2023년 주요 이슈’, ‘2023년 돌아보기’처럼 검색 키워드를 살짝만 바꿔도 좀 더 다양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중급

한국어 자료에서 외국어 자료로 범위를 넓혀 보자. 이때 유용한 키워드는 ‘Year in Review’다. 정말 여기저기서 자료가 튀어나온다. 특히 각종 이슈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하기로 유명한 «Vox»가 2023년 전 세계 주요 이슈를 7분 길이로 요약한 영상을 우선 추천해 본다.

«Vox» ‘2023, in 7 minutes

구글이 발표한 ‘2023년 전 세계 및 국가별 인기 검색어 통계’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선정한 ‘2023년 주요 사건’ 등도 유의미한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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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인기 검색어 중 일부 © Google

고급

온라인발 정보의 홍수에서 의미 있는 ‘신호’와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소음’을 분간하기란 쉽지 않다.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집 근처 도서관에 들러 여러 분야의 잡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2023년 마지막 호와 2024년 첫 호를 함께 펼치길 추천한다. 혹시 『트렌드 코리아』 2024년이나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에서 매년 발간하는 『세계대전망』 2024년 판 한 권만 사서 보는 게 훨씬 간편하다는 의문이 든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 그럴 경우, 2024년 판보다는 2022년 판이나 2023년 판을 사보는 게 어떨까? 세 번째 꿀팁, ‘미래만 보지 말고, 과거도 살펴보기’의 일환으로 말이다.

심화 활동.

나를 둘러싼 범위에서 일어난 일을 세상사와 함께 돌아보고, 기록으로 남겨보아도 좋겠다. 매년 조금씩 쌓는다면 꽤나 가치 있는 나만의 기록으로 남지 않을까?

✓ 꿀팁 5: 제목은 잘 알지만, 실제 읽거나 살펴보지 않은 책과 자료에 접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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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놓고 읽지 않아 깨끗하게 먼지만 쌓인 책, 이름만 듣고 자세히 보지 않았던 자료나 작품 살펴보기는 아직 바쁠 일이 그리 많지 않은 새해 초에 하기 딱 좋은 활동이다. 지난해 누군가의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나 전시 서문에서 계속 마주친 철학자의 이름이나 오며 가며 스치듯 들었던 이론서 따위가 있다면, 새해를 맞이해 한번 도전해 보자! 예컨대 애나 로웬하웁트 칭Anna Lowenhaupt Tsing이 쓰고 노고운이 번역한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현실문화연구, 2023)같은 책 말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나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서울국제실험영화페스티벌’, ‘네마프NeMaf’처럼 실험적인 성향의 영화제에 출품한 작품을 살펴봐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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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로웬하웁트 칭의『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응용 활동.

혹시 ‘무엇을 봐야 할지 잘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든다면, 출판인 42명이 선정한 2023년 ‘올해의 책’과 같은 자료를 참고해도 좋다. 누군가 추천했다고 해서 무조건 좋다는 생각은 위험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특정 작품과 책, 자료 등을 중요하다고 여기며 회자하는지 그 의미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의견을 형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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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IN의 ‘정부의 퇴행 속에서도 등불처럼 빛난 올해의 책들 [2023 행복한 책꽂이] 에서 소개된 책 중 일부.

✓ 꿀팁 6: 몸과 마음의 건강을 점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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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창작을 지속하는 힘은 건강한 몸과 마음에서 나온다. 따라서, 내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새해 시작을 맞이해 시도할 만한 여러 활동 중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모든 국민은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국민체력100’을 통해 비용 없이 체력을 측정할 수 있다. 전국 69개소에 있는 ‘건강생활지원센터’에서도 무료 건강 상담을 제공한다. 몸만큼 중요한 마음의 건강을 점검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예술인 복지카드가 있다면, 예술인복지재단에서 제공하는 ‘예술인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다. 심리상담은 예술인 복지재단 외에도 서울문화재단, 경기문화재단 등 지역 문화재단 차원에서도 진행하고 있으니, 본인의 주민등록상 주소지에 해당하는 문화재단 웹사이트를 꼼꼼히 확인해 보도록 하자. 더불어,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과 후천적으로 변하는 성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TCI검사도 추천한다. 대부분의 심리상담센터에서 진행하는데, 다만 비용이 조금 든다. 하지만, 검사 결과에 대한 전문가의 해석을 듣는 것은 무척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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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복지재단에서 제공하는 ‘예술인 심리상담’ 관련 내용 ©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웹사이트

✓ 꿀팁 7: 통장 잔고 및 재정 상황 점검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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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한 창작을 위한 준비는 건강한 신체만으로는 부족하다. 본인의 재정 상황 또한 굉장한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 당신에게 창작만을 통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다면, 나는 그것이 ‘가스라이팅’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삶 앞에 예술 없고, 생활 앞에 예술 없다. 창작의 에너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생각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게 만드는 첫걸음이다. 그런 점에서, 연금저축과 퇴직연금,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에 대해 알아보는 것으로 새해를 시작해 보아도 좋겠다. 창작 활동으로 경제적 성공을 거둘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60세가 되어 퇴직 연금을 수령할 때가 될 즈음 본인의 체력이 지금과 똑같지는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니까 말이다. 스무 살의 내가 한 달에 5만원씩 연금저축계좌로 모으며 쌓기 시작한 S&P500 추종 ETF가 60세를 맞이할 미래의 예술인(나)에게 가뭄의 단비와 같은 활동 자금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양한 사정으로 개인사업자등록증이 있는 창작자라면 중소기업중앙회가 운영하는 ‘노란우산공제’에 가입하는 것도 좋다. 이 공제금은 소상공인의 사회적 안전망 마련과 퇴직금 마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니, 창작자 역시 개인사업자등록증이 있다면 제도의 혜택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 꿀팁 8: 평소 궁금하던 잠재적 동료에게 연락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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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연락받을 때 생각보다 따뜻하게 반응한다. 새해를 맞아 평소 흥미롭게 지켜보던 잠재적 동료들에게 상냥한 안부 인사를 보내는 건 어떨까? 무턱대고 인사하라는 건 아니다. 적어도, ‘당신의 어떤 작업을 이렇게 봤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정도로 최소한의 정중함을 갖춘다면 잠재적 동료로서 충분히 연락할 만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선생님’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분들에게도 (지나치게 격의 없는 태도는 아니더라도) 겸손하지만 진솔하게 연락하는 용기를 내봐도 좋다. 나이와 인종, 국적, 분야를 떠나 우리는 모두 예술 혹은 미술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활동하는 잠재적 동료라는 점을 잊지 말자. 이메일을 쓰거나 메시지를 보낸다면, 이런 식으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OOO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OOO에 관심을 가지고 OOO 작업을 하는 OOO입니다. OOO (선생)님이 OOO에서 OOO한 작업 OOO을 본 후 계속 아른거리다가 새해맞이를 틈타 이렇게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 꿀팁 9: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기

23, 박재용, 라이언-오슬링

개인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이번 글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알리며 ‘미술인이 새해에 따뜻한 방에서 뒹굴면서 할 만한 일’을 추천받는 도중 한 동료가 이런 답변을 남겼다. “방에서 뒹구는데 또 뭐를 해요. 멀티태스킹을 과감히 포기하고 ‘마인드풀 뒹굴기’를 제안합니다.” 사실 현재 시대에 활동하는 미술인, 예술인은 이미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 존재다. 누가 기금 선정되었는지도 봐야지, 올해 무슨 전시가 열릴지도 확인해야지, 사회적 현안에도 관심을 기울여야지, 어려운 레퍼런스도 살펴봐야지… 이 와중에 소셜미디어에는 왜 다들 고통스러운 창작 과정은 생략하고 멋들어진 결과물이나 전시 오프닝 소식만 뿅! 하고 올리는 건지…

새해를 맞이해 이 모든 자극에 대한 과도한 노출을 과감히 끊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또한 한 번쯤 도전해 볼 만한 일이다. 불 꺼진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휴대전화 화면을 무한 스크롤하는 건 휴식이 아니라 인지 자원과 감정을 소모하는 새로운 노동과 다를 바 없다. 굳이 마음챙김이나 명상처럼 심오한 행위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잠시만이라도 한 가지 활동에 집중해 내 시간을 싸보자. 휴대전화는 서랍에 집어넣은 채 종이책을 펼쳐 들고 30분 동안 읽어 본다든지, 디지털 기기 없이 한 시간 동안 산책을 해 볼 수도 있겠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이다.

✓ 꿀팁 10: 나의 2024년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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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뭐래도 새해를 맞이해 (누구나 매년 한 번쯤은 도전하는) 새해 계획을 하지 않고서 이번 글을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번 2024년 계획을 세울 때에는 조금 다르게 시도해 보자. 내가 ‘이루고 싶은’ 일, 말하자면 일종의 ‘꿈과 희망’을 쓰는 대신, 나에게 ‘일어날 법한 일’, 그러니까 ‘예측과 예상’에 가까운 것을 적어 내려가는 거다. 즉, ‘OO문화재단 OOOO 기금 선정’이나 ‘OOO에서 전시하기’ 같은 선언적 목표를 제외하자는 말이다. 앞서 제안한 다양한 활동에 대한 꿀팁 중 몇 가지를 간단히 실행하는 과정에서 2024년 한 해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어렴풋이 그려질 것이다. 그 흐름에 서 있는 자기 모습에 근거해 현재 예측하고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을 파악해 보자.

만일 어떤 흐름에 놓인 모습이 스스로 그려진다면 자세히 살펴보길 권하고 싶다. 미술 혹은 예술, 그리고 이를 둘러싼 세계에서 나는 어떤 모습과 꼴을 갖추고 서 있는가? 나의 2024년을 그려보는 일은 곧 나만의 언어로 이를 기록하는 행동과 연결된다. 마치 한 두 해 전 발간한 『세계대전망』이나 『트렌드 코리아』를 다시 꺼내어 읽어보듯, 스스로 그린 2024년을 2025년이나 2026년에 다시 살펴보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 된다고 확신한다. 모든 예상과 예측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추측과 희망으로 이뤄졌을 뿐이라는 점을 생각하며, 스스로 얼마나 자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혹은 그렇지 못했는지) 알아볼 기회가 되기도 할 테니까.

추신.

이번 ‘현대미술 설명서’ 아티클에 삽입한 일러스트레이션은 AI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라이언 오슬링(@ryan_ohsling) 님에게 글의 개요를 설명하고, 이미지 생성에 필요한 프롬프트에 힌트 혹은 영감이 될 만한 키워드와 상황에 대한 묘사를 제공한 결과물이다. 바쁜 연말 연초, 다소 촉박한 일정에도 작업을 흔쾌히 수락해 주신 라이언 오슬링 님께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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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현대미술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뉴오피스(@new0ffice)에서 일한다. 큐레이터이자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이며, 허영균과 함께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의 프론트맨을 맡고 있다.

Illustrator

라이언 오슬링(@ryan_ohsling)은 AI를 통해 이미지와 영상을 생성하고 공유하는 AI 크리에이터다. 그는 AI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탐구하고,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지향한다.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가능케 하고,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던 것을 완성하며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다양한 세계관을 만들어 대중과 교류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중이다.

영화관의 졸음을 사랑하는 법

김경수
Essay

김경수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전하는 «비애티튜드»의 에세이 코너. 2024년을 맞이해 새롭게 영입한 필자는 바로 인터넷 밈meme을 연구하는 김경수 님입니다. 작년 석사 논문으로 발표한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온라인에서 알음알음 굉장한 화제를 모았는데요. 그 기세를 몰아 올 2월에는 단행본으로 정식 출간될 예정이랍니다. 앞으로 매달 인터넷 밈과 엮어 우리 사회의 일면을 읽어줄 경수 님의 본업은 영화평론가예요. 짧디짧은 인터넷 밈과 최소 90분이 넘는 내러티브를 지닌 영화는 극과 극을 달리는 존재죠. 인터넷 밈이 선사하는 즉각적인 도파민에 길들다 보니 경수 님은 어느덧 영화관에서 졸음 마귀에게 시달리는 위기에 처했어요. 그런데 그는 이제 영화관의 졸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영화평론가가 대체 뭔 소리냐고요? 자세한 내막은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01_김경수

나는 ‘탕후루’와 ‘제로 콜라’를 동시에 비평하는 사람이다. 탕후루는 ‘인터넷 밈’이고 제로 콜라는 ‘영화’다. 탕후루와 제로 콜라가 동시에 유행하는 시대라니 다행이다. 아니, 오히려 좋다! 덕분에, 나 같은 혼종도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말이다.

02_김경수

인터넷 밈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등을 원본 삼아, 본체와 관련 없는 우스꽝스러운 제스처, 상황, 표정 따위를 추출한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특정한 상황이나 맥락에 적당한 제스처와 원초적인 감정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인터넷 밈을 사용한다. 이때 원본과 인터넷 밈은 이미 맥락에서 벗어나 서로 관련이 없어진다. 그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감정을 정리할 때 인터넷 밈 하나면 간단히 끝난다. 인터넷 밈은 재생 길이도 무척 짧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를 한가득 떠도는 밈을 보다 보면 시간이 훅 간다. 하나만 봐야지, 하다가 수십 개를 보고 결국엔 눈이 시려서 잠든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라는 표현이 딱 맞다. 무엇보다 극한에 가까운 쾌감과 웃음을 만들기 때문에 그 속성은 매우 자극적이다. 마치 탕후루처럼 말이다. 

깨물어 먹는 순간 금세 혈당을 치솟게 하는 ‘혈당 스파이크’ 탕후루처럼, 인터넷 밈은 누군가의 뇌에 도파민을 때린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석사 논문 주제로 인터넷 밈을 다루기로 마음먹은 후, 리서치를 위해 인터넷 밈을 수집하면서 내 뇌는 어느 순간부터 도파민에 절여졌다. 지금도 뱀술 속의 뱀처럼 도파민에 푹 담겨 있다. 그 부작용은 치명적이다. 나는 원래 제로 콜라, 즉 영화를 비평하기 때문이다.

03_김경수

영화는 곧바로 관객의 감정을 건드리는 매체가 아니다. 초반부터 감독이 설정한 빌드업을 성실히 따라가야 하이라이트에 이르러 마음 깊은 곳에서 카타르시스가 겨우 우러나온다. 게다가 빼어난 작품성도 필요하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들을 온전히 충족할 때 비로소 도파민은 샘솟을락 말락 기지개를 켠다. 즉 영화로 도파민을 느끼려면 이렇게 각고의 노력과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레 뇌는 상대적으로 수월하고 자극적인 인터넷 밈을 갈망하는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이제 영화에서 롱테이크 장면이 등장하거나 잔잔한 일상이 묘사되는 순간, 내 뇌에는 비상이 걸린다. 졸음신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든 상세히 보고 기억하며 맥락화해야만 하는 영화평론가에게 이는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존재다.

04_김경수

최근의 경험을 고백하고 싶다. 아트나인에서 데이비드 핀처David Fincher 감독의 ‹더 킬러The Killer›(2023)를 보다가 졸음 마귀가 찾아왔다. 킬러가 주인공이라는 말만 듣고 나는 곧장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만을 고대했다. 감독이 과거 내놓았던 스타일리시한 영화 ‹파이트 클럽Fight Club›(2001)을 생각한 내가 바보일까. 영화 속 킬러는 “운명은 플라시보 효과에 불과하다”, “공감은 금물이다. 공감은 나약함이다. 나약함은 약점이다” 등 그동안 쌓아온 나름의 철학을 중얼대며 20분 가까이 공유 사무실 위워크WeWork에서 표적을 기다린다. 그는 빅맥을 먹었고, 요가를 했고, 심박수도 체크했고…뭐…아, 졸면 안돼! 하필 이놈의 영화는 평론까지 청탁받은 귀한 몸이었다. 어느덧 영화관은 내 의지와 뇌가 정면으로 대결하는 콜로세움이 되었다.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을지언정, 보통 우리가 방문하는 영화관은 사실 졸음에 최적화된 곳이다. 적당히 따뜻하고, 의자도 부드럽다. 그만큼 졸음에 알맞게 어두컴컴한 공간도 드물다. 태생적으로 극장이란 공간은 관객이 오로지 영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곳이다. 그런 과정에서 관객의 불편을 줄이고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설계한 공간이기도 하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할 수도 없는 영화관은 그래서인지 따뜻하고… 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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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킬러The Killer›(2023)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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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킬러The Killer›(2023)

망했다. 족히 네 번은 기절한 듯하다. 영화 흐름은 대강 기억나지만 디테일을 놓쳐버렸다. 조각조각 흩어진 이미지가 머릿속을 부유하는데, 졸다가 꾼 꿈과 뒤섞이는 느낌까지 든다. ‘아아, 한 번 더 보아야 하나’ 좌절할 즈음, 혹시나 하고 유일한 희망인 다이어리를 펼치면 좌절은 두 배가 된다. ‘휴먼졸림체’로 쓴 글자 덩어리가 페이지마다 빼곡하다. 악필을 타고난 것도 억울한데, 쓰다가 말아서 알아볼 수 없는 글자 사이로 지렁이가 기어간다. 순간 나 따위가 영화 평론을 쓸 자격이 있는지 자문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은 어느덧 ‘내가 사람이기는 한가?’라는 실존적인 방향으로 퍼져나가며 나를 철학자로 만든다. 내가 이러려고 인터넷 밈을, 아니 영화 평론을 쓰기로 마음 먹었던가… 왜인지 자괴감이 들고 괴롭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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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했다. 게다가 나는 그 영화를 혼자 본 게 아니다. 나만큼, 어쩌면 나보다 더 영화를 사랑하는 여자친구와 함께 보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그녀는 한참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꼭 혀를 끌끌 차는 듯하다. 요즘 영화를 함께 보면, 여자친구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다. 나 같아도 속상할 테다. 꼭 봐야 하는 영화라기에 굳이 같이 왔더니, 정작 평론 쓴다는 인간은 졸고 있으니. 영화를 보는 동안 연인은 하나로 연결되는 마법을 겪는다. 영화관이 시내에서 진행되는 현대적 데이트의 성지인 이유다. 공적인 공간인 영화관은 어두컴컴한 분위기로 연인 간의 은밀함을 고조하는 사적인 공간으로 기능한다. 고로 영화를 보다가 조는 행위는 은밀함을 부순다는 점에서 일종의 실례나 마찬가지다. 더는 이를 반복하고 싶지 않던 나는 나름의 의지를 담아 각서를 썼다. ‘나, 김경수는 함께 영화를 보다가 세 번 이상 졸면 밥을 산다.’ 그리고 각서 쓴 다음 날 그녀에게 밥을 샀다. ‹더 킬러›를 본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다 인터넷 밈에 절인 탓이라고 체념하는 순간이다. 결국 나는 그 영화를 혼자 다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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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관에서 조는 게 꼭 나쁜 걸까? 이왕지사 이렇게 된 바에 영화관의 일부로 적응하는 나에게 찾아오는 졸음을 받아들이는 건 어떨까? 분명 이 말을 접한 사람들은 ‘영화평론가라는 이가 무슨 막말이냐’라고 분기탱천할 듯싶다. 생각을 바꿔보면, 졸음은 아이러니하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가속화된 시대를 살아간다. 모든 감정을 한시라도 빨리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인터넷 밈은 이런 세태를 잘 반영한다. 영화는 가속화에 저항하는 감각을 기르는 도구다. 우리가 평소에 스치듯 본 것을 더욱더 길게 보도록 만든다. 카메라가 어떤 대상을 롱테이크로 포착하면 왠지 모르게 전보다 심오하게 대하게 된다. 그런 시선을 통해 평범한 일상은 고유한 의의를 부여받는다. 만일 킬러 영화를 보자마자 살인이 펼쳐졌더라면, 우리는 킬러도 현대 사회의 노동자에 불과하며, 그의 업무가 한없이 지루하다는 점을 감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킬러의 일상을 이처럼 상세히 경험할 기회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영화는 현시대에 정면으로 거스르는 감각을 발명하고 있다. 동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지루하고 졸리다는 치명적인 결함은 오히려 내가 영화의 방법론을 더욱 사랑하도록 하는 핵심 요소다. 비록 네 번이나 졸았지만, 잠시나마 그런 영화를 보며 가속화된 나의 감각에 저항하는 일은 무척이나 뿌듯하다. 개인적인 견해로, 명작은 나를 창의적으로 졸게 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이렇게 관람객을 졸리게 할 수도 있구나’ 싶을 때 경탄을 느낀다. 졸지 않았다면 이토록 생경한 감각을 마주할 수 없다는 면에서, 졸음이야말로 도파민의 무한한 굴레에 갇힌 동시대인의 시선으로 영화를 보도록 돕는 일등 공신인 셈이다.

지난 2023년 내가 본 최고의 영화 중 하나는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감독의 ‹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2023)였다. 작년 5월에 본 후, 최근 다시 보았을 정도로 좋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무려 네 번이나 관람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졸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 뜨고 제대로 보지도 못한 영화를 최고의 영화라고 꼽을 자격이 있나 싶지만, 그래도 내게는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나른하고 졸리다. 감독의 그간 작품과 비교해 보아도 그러하다. 내레이터가 계속 쏟아내는 대사의 힘이 크다. 톤이 일정해 마치 자장가처럼 들린다. 게다가 인물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말한다. 잠시 졸았다가 깨어난 다음에도 여전히 나른하게 전개되는 터라, 혹여 내가 여전히 꿈속에서 헤매는 건 아닐까 착각을 줄 정도다. 이런 나른함이야말로 우리가 평소 느끼기 힘든 감정이다. 영화 속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우리에게 휴가지에 머무는 듯한 감흥을 준다. 감독은 플롯에 상관없이 관람객이 유유자적하게 영화 속을 유영하길 바라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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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터로이드 시티Asteroid City›(2023) 스틸 이미지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우리의 졸음을 반긴다. 연극의 리허설 장면으로 끝나는 엔딩을 보자. 느닷없이 한 캐릭터가 일어나 급작스레 외친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모두가 최면에 걸린 듯 이 대사를 되풀이하며 영화는 끝난다. 이는 내게 던지는 한 마디 위로였다. 아니,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영화관에서라도 도파민에서 해방되어 잠드는 경험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말을 하려고 105분을 달린 느낌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보면서 푹 자고, 꿈꾸는 듯한 감흥에서 헤매다 결말만 보아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인터넷 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위한 감독의 배려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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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스터로이드 시티›에는 무척 기묘하고도 흥미로운 장면이 있다. 엔딩의 연극 리허설이 등장하기 직전의 일이다. 주인공과 그의 아들이 대화하는 뒤편으로는 창문이 하나 있는데, 멀리 원자폭탄이 터지는 광경이 펼쳐진다. 둘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멍하니 쳐다본다. 방사능 낙진은 전혀 다가오지 않고 그 어떤 위기감도 없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한 부분으로 보일 정도다. 나는 원자폭탄 터지는 모습을 태연하게 바라보는 그 순간을 사랑한다. 우리는 창문의 이름을 딴 신비한 세계가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바로 컴퓨터의 ‘윈도Window’다. 윈도는 원자폭탄이 일상적으로 터지는 세계다. 그리고 영화는 그와 별개의 세계다. 감독은 마치 영화관이란 공간이 인터넷에서 반복되는 전쟁의 영향에서 벗어난 세계인 듯 그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아날로그 영화관이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휴가지인 양 거기서 마음껏 졸음에 빠지고 저만의 꿈을 꾸라고 속삭인다. 진정한 ‘꿈의 공장(Dream factory)’이 알고 보니 여기에 있었다.

덧붙이는 말.

영화와 졸음의 상관관계를 극적으로 느끼고 싶다면 태국 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의 ‹메모리아Memoria›(2022) 관람을 추천한다. 영화 속 캐릭터가 15분 가까이 잠드는 장면을 길게 촬영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영화 속 캐릭터도 자는데, 너는 안 잘 거니?’라고 물어보는 듯하다. 이는 한 여성이 어디선가 ‘쿵’ 하며 울려 퍼지는 미지의 소리를 접하는 영화의 플롯과도 맞물린다. 우리는 그가 접하는 소리의 실체를 예측하기 힘들다. 실상 우리의 삶은 백색 소음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독은 여성이 느끼는 소리의 충격을 관객과 공유하려 한다. 그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관람객을 졸음의 세계로 유도하는 일이다. 영화를 보다가 비몽사몽하며 온몸의 긴장이 나른해지는 무방비 상태가 펼쳐질 때, 우리는 비로소 영화 속 캐릭터가 느끼는 미지의 소리에 진정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10분에 한 번 들리는 ‘쿵’ 소리는 우리의 몸 전체에 기이한 충격을 가한다. 영화 속으로 녹아들어 체험이 체화되는 순간이다.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단행본으로 기획될 만큼 큰 화제를 모았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마돈나는 역사다

김도훈, 마돈나는 역사다
Essay

김도훈, 마돈나는 역사다

Essay

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미국의 팝스타, 마돈나Madonna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1980년대부터 40년에 걸쳐 ‘팝의 여왕(Queen of Pop)’으로 군림한 마돈나는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여성 아티스트입니다. 앨범을 낼 때마다 서구 사회에 엄청난 이슈를 몰고 다니며 하나의 사회적인 현상이 되었죠. 요즘에는 어쩐지 연하남 킬러에다 성형 괴인이라는 키워드로 더 알려지는 것 같지만요. 올여름 자신의 마지막 월드 투어가 될지도 모르는 공연을 준비하다 세균 감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며 사람들을 놀래키기도 했는데요. «비애티튜드»의 귀한 필자인 김도훈 님은 “음악적 차도르를 둘러쓰고 있던 여성 가수가 주체적인 성적 표현의 자유를 누릴 기회를 홀로 연 역사적인 아티스트”라고 말하며 요즘 마돈나의 혁신적인 면모가 잊히는 것을 아쉬워하고 있어요. 그래서 도훈 님이 몸소 워드를 켰습니다. 미친 꼰대력으로 가득한 시대에 혁명을 일으킨 마돈나의 세계가 궁금하다면 이번 아티클을 놓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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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a Don’t Preach› 커버

내가 처음 들었던 마돈나Madonna의 노래는 ‘Papa Don’t Preach’였다. 초등학생 시절 처음으로 구입한 카세트테이프 중 하나가 마돈나의 3집 ‹True Blue›였다. 여러모로 팝의 역사를 바꿨다고 찬사받는 명반이다. 물론 그 시절에는 이게 명반이 될 지 몰랐다. 1집 ‹Madonna›가 나온 게 1983년, 2집 ‹Like A Virgin›은 이듬해인 1984년에 나왔다. ‹Like A Virgin›이 지나칠 정도로 성공을 거두며 한국에서도 그의 치렁치렁한 80년대 패션이 유행하긴 했지만, 마돈나는 여전히 의심을 받던 가수였다. 당대 라이벌로 손꼽히던 신디 로퍼Cyndi Lauper가 더 오래갈 거라는 예측은 모든 음악 잡지에서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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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집 ‹Madonna› 앨범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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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집 ‹Like A Virgin› 앨범 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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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집 ‹True Blue› 앨범 커버

팝이라는 게 그렇다. 지금에야 아바ABBA가 역사적인 뮤지션으로 평가받지만 1980년대 초중반에는 그렇지 않았다. 달콤한 멜로디 팝을 만드는 스웨덴 그룹 정도로나 여겨졌다. 1970년대 후반 디스코 열풍을 불러일으킨 도나 서머Donna Summer는 어떤가. 지금 ‘I Feel Love’는 시대를 뛰어넘은 미래의 사운드로 평가받지만 그 시절에 누가 그를 위대한 가수라고 했던가. 나는 아바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에 필적하는 그룹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그렇게 말하는 게 불가능했다. 지금도 세상은 꼰대스럽지만 그 시절 음악 좀 듣는 사람들의 팝에 대한 꼰대력은 정말이지 대단했다.

하여간 ‹True Blue› 앨범을 사게 된 이유는 AFKN으로 본 ‘Papa Don’t Preach’ 뮤직비디오 덕분이었다. 아, 여기서 또 중늙은이 같은 소리를 해야겠다. 1980년대에는 김광한이 진행하던 ‹쇼 비디오자키› 외에는 한국에서 해외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를 볼 기회가 없었다. (그것도 사실 1980년대 후반부터다.) 다행히 주한미군 방송 AFKN이 MTV의 뮤직비디오를 종종 묶어서 방영했다. 나는 바깥에서 뛰어놀아야 ‘내 자식이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건강한 자유대한민국 아이로 잘 크고 있구나’라며 부모님을 편안하게 만들 나이에 집에 틀어박혀서 라디오를 듣거나 AFKN을 보곤 했다.

1981년 MTV가 시작된 이후, 음악의 중심은 라디오에서 TV로 슬그머니 옮겨갔다. 그러자 모든 뮤지션이 뮤직비디오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Thriller’ 뮤직비디오는 당대의 어떤 문화적 현상이 됐다. 한국 가수들이 LG 트윈스 유광 잠바 같은 빨간 재킷을 입고 촌스러운 무대에서 마이클 잭슨의 춤을 흉내 내곤 했다. 1980년대 한국 TV에서 가수나 코미디언이 흉내 내는 대상이라면, 이미 전 세계적인 가수가 됐다는 이야기다. 그 시절 TV에서 한국 연예인이 따라 하던 가수는 마이클 잭슨, 마돈나, 그리고 보이 조지Boy George였다. 모두 MTV 시대를 열어젖힌 가수들이다.

마돈나의 ‘Papa Don’t Preach’ 뮤직비디오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살고 싶은 소녀가 아빠와 갈등을 겪다가 화해한다는, 꽤 건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음반을 구입한 시절의 내가 나름 혼자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노래의 가사를 입수해 하나하나 번역하기 시작했다. 자, 여기에 그 가사가 있다.

Papa don’t preach, I’m in trouble deep

Papa don’t preach, I’ve been losing sleep

But I made up my mind, I’m keeping my baby, oh

I’m gonna keep my baby, mmm

아빠 설교하지 마세요, 저는 곤경에 빠졌어요

아빠 설교하지 마세요, 저는 잠도 못 자요

하지만 마음을 정했어요, 아이를 지킬 거예요

전 아이를 낳을 거예요, 음음음

맙소사, ‘Papa Don’t Preach’는 혼전 임신을 한 어린 소녀가 절대 임신 중절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아 남자 친구와 가족을 이뤄 잘 살고 싶다고 아빠에게 부르짖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이 가사는 지금의 젊은 독자에게는 그다지 파격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다. 내 생각에 당신이 잘파Zalpha 세대라도 이 가사를 이해하는 순간, 노골적으로 솔직한 메시지에 어안이 벙벙해질 것이다. 1980년대 중반 학교에는 성교육이란 게 없었다. 나는 사춘기가 오지도 않은 초등학생 상태로 이 노래의 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골똘히 연구했고, 마침내 납득했다. 임신이 무엇인지, 임신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됐다. 노래 하나가 태평양 건너 한 남자아이의 세계관을 확장시킨 것이다.

이 노래는 당대 미국에서도 엄청난 스캔들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대 미국은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이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시기였다. 미국 역사상 정치적으로, 그리고 윤리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시대였다. 이 노래는 분명 성적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10대의 자기 결정권에 대한 다층적인 이야기를 다루지만, 학부모를 비롯한 미국 사회는 마돈나의 노래가 10대의 문란한 성생활을 조장한다고 지엽적으로 해석하며 적극적으로 비난해 댔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그 시절 한국 뉴스에서도 ‘Papa Don’t Preach’가 부른 미국 내 논쟁을 보도할 정도였다. 사실 그건 앞으로 마돈나가 당대 미국 사회에 던질 수많은 논란과 논쟁의 출발점일 뿐이었다. 같은 앨범에 있는, 역시 빌보드 1위 곡 ‘Open Your Heart’ 뮤직비디오도 난리가 났다. 스트립 클럽 댄서로 분한 마돈나가 어린 소년과 키스하는 장면 때문이었다. 아이유IU 노래 가사에서도 페도파일pedophile 혐의를 찾아낼 만큼 지나치게 부지런한 분들은 이 뮤직비디오를 보면 화가 나겠지만, 뭐,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는 법이다.

‹True Blue› 앨범이 대성공을 거두자 마돈나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가 됐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의심했다. 음악성 없이 이미지로만 승부하는 가수가 오래갈 리 없다고들 했다. 음악성이라니 맙소사. ‹True Blue›는 음악적으로도 1980년대를 대표하는 명반 중 하나다. 테일러 스위프트Taylor Swift가 노래했듯 ‘까들은 뭘 해도 깐다(Haters gonna hate)’라는 명제는 여전하다. 어쨌든 다음 음반은 마돈나에게 중요했다. 상업적으로, 비평적으로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1990년대를 1년 앞둔 1989년, 마돈나의 새 앨범이 발매됐다. 첫 싱글은 앨범 제목과 같은 ‘Like A Prayer’였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흑인 성가대 코러스를 삽입한 이 노래는 마돈나 안티들의 입을 단숨에 닫게 만들 정도로 기승전결이 완벽하다 못해 듣는 순간 눈앞에 드라마가 펼쳐지는 명곡이었다. 요즘 음악 매체들이 마돈나의 명곡 순위를 꼽을 때 (누구나 아는 마돈나 노래인) ‘Vogue’와 함께 1위를 다투는 노래다.

김도훈, 마돈나는 역사다

‹Like A Prayer› 앨범 커버

김도훈, 마돈나는 역사다

‹Vogue› 앨범 커버

그런데 세상은 좀 다른 방식으로도 뒤집어졌다. 마돈나는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에서 몸 파는 뒷골목 여자로 등장한다. 그리고 뮤직비디오 마지막에 가서 그는 흑인 예수 그리스도와 키스한다. 다시 말하지만, 1980년대였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백인 배우와 흑인 배우가 키스하는 장면이 나와도 스캔들이 되던 시절이었다. 감히 딴따라 하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흑인으로 묘사하고 성적인 키스까지 한다고? 보수주의자가 마돈나를 향해 포화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당시 마돈나가 광고 모델을 맡은 펩시가 후일 광고로 활용하기 위해 제작 지원을 했는데, 막상 뮤직비디오가 방영되자 교황이 있는 바티칸시국마저 신성모독이라며 항의를 해댔다. 결국 펩시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광고 모델 계약을 취소했다. 심지어 월드 투어 후원도 취소해 버렸다. 이 광고는 올해 34년 만에 펩시에 의해 다시 공개됐다. 마돈나는 이를 기뻐하며 “이 광고를 통해 예술적 진실성과 타협을 거부하는 예술가로서 내 경력이 시작됐다. 마침내 나의 천재성을 깨닫게 해 준 펩시에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김도훈, 마돈나는 역사다

© Rhino Records

1990년대에도 마돈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Like A Prayer› 앨범의 성공에 이어, 음악 역사에 길이 남을 명곡 ‘Vogue’를 발표했다. 직접 작곡한 노래였다. (당신은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역사상 최고의 공연 중 하나로 꼽히는 ‘Vogue’ 무대를 꼭 보아야만 할 의무가 있다). 이어서 발매한 ‹Erotica›(1992)와 ‹Bedtime Stories›(1994) 앨범은 싱어송라이터로서 마돈나의 능력을 멋지게 펼쳐낸 음반들이었지만 1980년대와 90년대 초의 맹렬한 인기는 조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8년 그는 영국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과 작업한 명반 ‹Ray of Light›로 다시 정점에 올랐다. 마돈나는 당시 유행하는 조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완벽하게 새로운 이미지의 노래로 내놓는 놀라운 재능이 있다. 별명이 ‘재창조의 여왕(Queen of reinvention)’인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물론 2010년대 이후 마돈나 앨범은 오랜 팬인 나로서도 나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을 따름이지만, 어쩌겠는가. 한 아티스트가 영원히 전성기만을 누리며 살 수는 없다. 재능은 발화된 순간부터 10년까지 가장 아름답게 불타오르는 법이다.

아니다. 나는 이 글에서 마돈나의 전 생애를 읊을 생각은 없다. 그랬다가는 절대 끝이 나지 않는, 쓸데없이 긴 글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글을 왜 이렇게 열정적으로 쓰고 있는 걸까. 레이디 가가Lady GaGa와 비욘세Beyoncé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세대가 마돈나를 가리키며 전성기가 지났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책맞은 성형중독 기인 정도로 치부하는 것이 몹시 슬프기 때문이다. 또한 잠실종합운동장을 재개발하며 서울이 대규모 해외 공연을 유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돈나가 지금 전 세계를 돌며 지난 히트곡들을 다시 부르고 있는, 어쩌면 그의 마지막 투어가 될지도 모르는 ‘더 셀레브레이션 투어The Celebration Tour’를 볼 수 없다는 게 몹시 애석하기 때문이다.

김도훈, 마돈나는 역사다

© MADONNA

김도훈, 마돈나는 역사다

1984년과 1989년 사이의 마돈나를 겪지 않은 세대라면 이 글을 읽으며 ‘그래서? 이 여자가 한 건 그냥 섹스를 노래로, 뮤직비디오로 부르짖은 것뿐이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섹슈얼한 함의가 있는 모든 문화적 행위를 성적 대상화라는 협소한 단어에 밀어 넣고 있는 2020년대의 트렌드에도 딱히 어울리는 글은 아닐 것 같다. 하지만 한 세대는 전 세대가 극복한 것을 이어받고, 그것을 다시 극복하며 새로운 시대를 연다. 전 세대의 마돈나는 한 마디로 음악적 차도르를 둘러쓰고 있던 여성 가수가 주체적인 성적 표현의 자유를 누릴 기회를 열었다. 정말이지 홀로 열었다. 그가 닦아놓은 길 위에서 비욘세와 리한나Rihanna와 레이디 가가와, 심지어 카디 비Cardi B가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마돈나는 지난 2016년 ‘빌보드 위민 인 뮤직Billboard Women In Music’에서 ‘올해의 여성(Woman of the Year)’에 선정되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호구로서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아, 내 말은, 여성 연예인이라는 말입니다. 노골적인 성차별과 여성 혐오, 끊임없는 학대에 맞서 지난 34년간 경력을 이어올 수 있었던 제 능력을 인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유명한 페미니스트 작가가 제가 스스로를 성적인 존재로 만든다고 지적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대답했죠. 그럼, 당신이 페미니스트라면 성적이면 안 된다는 것인가요? 그건 개 같은 소리네요. 저는 다른 종류의 페미니스트입니다. 나쁜 페미니스트입니다.”

자, 마지막으로 당신이 보아야 할 무대는 1984년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의 한 장면이다. 전년도인 1983년 데뷔 음반을 발표한 마돈나가 논쟁적인 첫 메가 히트곡 ‘Like A Virgin’를 부르고 있다. 그는 거대한 웨딩케이크에서 웨딩드레스를 입고 걸어 나온 뒤 백댄서도 없이 홀로 무대에서 격렬하게 바닥을 구르며 “날 처녀처럼 느끼게 해달라”고 노래한다. 이전의 여성 팝가수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거침없는 태도로 열망을 표현한다. 이후 세상의 모든 여성 팝가수가 보이지 않는 차도르를 벗어 던지게 만든, 역사적인 순간이다. 1984년 보수적이기 그지없던 팝계의 스타들과 관중이 열정적으로 기립박수를 보내는 순간, 비로소 마돈나는 탄생했다. 팝의 역사는 바뀌었다. 그렇다. Bitch! 그녀는 마돈나다.

Writer

김도훈(@closer21)은 작가, 칼럼니스트, 영화평론가다. 영화주간지 «씨네21» 기자, 남성지 «GEEK» 피처 디렉터,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으로 일했다. 현재 프리랜스 글쟁이로 오만 가지 글을 쓰면서 유튜브 영화 채널 ‹무비건조›에 출연 중이다. 낯설고 비범한 스물 여섯 명을 탐구한 『낯선 사람』(2023)과 에세이집 『우리 이제 낭만을 이야기합시다』(2019)를 썼다.

현대미술 설명서: 만약 히딩크가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된다면?

Ess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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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미술관의 수장은 단연 관장입니다. 관장은 미술관의 모든 것을 살피고 책임집니다. 단순히 전시뿐만이 아니죠. 거대 기관을 운영하는 일부터 외부와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미술관의 입지를 높이고, 미술관에 필요한 기금을 조성하는 일까지 관장의 역량은 미술관의 흥망을 결정짓거든요. 해외에도 관장 역할을 잘하는 사람은 여러 미술관의 러브콜을 받으며 관장이 곧 직업인 경우가 흔할 정도니까요. 그만큼 관장 일을 잘하는 게 힘들다는 뜻이겠죠. 현대미술 설명서를 연재하는 박재용 님은 우리나라 현대 미술의 중심인 국립현대미술관을 이끄는 관장으로 거스 히딩크 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선임되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 이유도 꽤나 구체적인데요. 자세한 까닭에 대해 아티클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참! 미드저니를 활용해 만든 흥미로운 이미지도 놓치지 마세요. 무려 30달러를 쓰셨다고…

미술관에 들를 때 우리가 종종 깜빡하거나, 굳이 생각하지 않는 이슈가 있다. 미술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벌어질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다. 눈 앞에 펼쳐진 전시를 만드는 사람이 누군지, 건물이 적절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며 쾌적하게 운영되도록 힘쓰는 사람은 누군지 등의 사안을 망각하는 게 다반사다. 특히 하나의 작품이나 전시를 떠나, 미술관 전체를 대표해 큰 방향성을 결정하고, 미술관을 대변하는 사람이 대체 누군지,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주인공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미술관을 이끄는 수장인 관장(director)이다.

여기서 돌발 퀴즈 하나.

Q. 지금 여러분이 사는 도시에 있는 대표적인 미술관의 관장이 누구인지, 숫자 셋을 외칠 동안 떠올릴 수 있나요? 가령 이렇게 말이죠. “OOO 미술관 OOO 관장!”

만약 누구든 곧장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필자에게 연락해 주기 바란다. 프랜차이즈 카페 커피 쿠폰이 생길지도 모른다. 내가 이렇게까지 도박(?)을 하는 이유는 매우 높은 확률로 미술관장 이름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서울에 살고 있다면, 검색창에 ‘서울시립미술관 신임 관장’을, 대전에 산다면 ‘대전시립미술관 신임 관장’을, 혹은 그저 ‘미술관 신임 관장’을 검색해 보라. 당신이 미술인이라면,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것 같은데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싶은 이름들을 보게 될 거다. 이미지 검색을 한다면, 성별은 대체로 여성보다는 남성이 좀 더 많고 나이대는 적어도 50대 이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이미지 생성형 AI 프로그램 미드저니를 이용해 만든 가상 이미지. 프롬프트는 다음과 같다: 역동적인 대화 중 인터뷰 스틸. 한국인 현대미술관 관장이 말하고 있다. 자신감 있는 모습. 짧은 머리에 안경을 쓰고 화려한 색상의 꼼데가르송 의상. 50대 중반.

국립현대미술관에 새로운 관장이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서울, 부산 등 주요 도시의 시립미술관에서도 새로운 관장들이 임기를 시작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미술관장 소식에 특화된 메신저 그룹이 있다면 채용 공고가 활발하게 공유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누가 어느 미술관의 관장인들, 그게 (미술인 혹은 관객인) 나랑 무슨 상관일까?”

그렇다면 이번엔 ‘미술관 관장’, ‘논란’을 검색창에 넣어보자. 미술관이 단지 작품과 전시를 감상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면, 검색 결과에 나오는 무시무시한 단어들이 꽤나 당황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이런 단어들이다. 알박기, 갑질, 성희롱, 코드 인사, 이력 논란, 공모 백지화, 정치 검열, 관장 전용 화장실, 전문성 논란, 특정 학교 출신 등… 이 단어들만 놓고 보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한국에서) 미술관 관장은 경력이 충분하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서로 정치적 암투를 벌이는 한국식 권력 투쟁의 경기장 같은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 검색 결과만 놓고 보면 미술관 관장을 둘러싼 논란은 안타깝게도 한국 정치인을 둘러싼 일부 논란과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