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음성 비서와 간신의 3가지 공통점

thumbnail_윤재영_AI음성비서
Essay

header_윤재영_AI음성비서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간신(奸臣)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절대 왕정 시대에 최고 권력자 옆에서 달콤한 말로 귀를 즐겁게 하고, 눈을 가려서 총기를 흐리게 한 후, 국정을 농단하고 제 이익을 탐했던 자를 말하는데요. 요즘은 남을 비난할 때 쓰는 욕 비스무리한 표현이 됐지요. 근데 세상에 간신이 사라졌을까요? 지금 이 순간에도 권력자 귀에 의뭉스러운 말을 속삭이는 간신배들이 있을 텐데요. 소시민 입장에서 저세상 일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상향화되면서 우리도 이제 간신 하나쯤은 곁에 둘 수 있게 됐거든요. 그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AI)이라 미처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홍익대학교에서 사용자를 유인하고 현혹하는 UX 디자인을 연구하는 윤재영 교수는 AI 음성 비서가 미래 인류의 간신이 될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간신의 교과서이자 최고봉으로 인정받는 중국 당나라 시대 이임보의 영업 전략이 AI 음성 비서의 특징과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지거든요. 따끈따끈한 신간 『디자인 딜레마 – 당신의 행복과 소비는 어떻게 은밀히 설계되는가?』에서 다룬 AI 음성 비서와 간신의 공통점을 «비애티튜드»에서 독점 공개합니다!

01_윤재영_AI음성비서

‘간신의 끝판왕’이라고 불리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이임보.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일이다. 이임보라는 인물은 현종을 가까운 곳에서 보필하는 환관 등과 친하게 지내며 황제의 생각을 쉽게 파악해 비위를 잘 맞췄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고속으로 출세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보던 다른 신하들이 사사건건 이임보와 충돌하자 그는 직언하는 사람들을 모함해 좌천시켰다. 황제의 기분을 잘 맞추며 걸림돌이 없던 그는 마침내 관료의 최고봉인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임보가 잠재적으로 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재의 등용 또한 막아버리자 조정은 이임보의 사람으로만 채워지게 되었다.

사사건건 옳은 말을 하던 신하들이 사라지니 현종 입장에서는 골치도 없어지고 세상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점점 백성을 살피는 일을 멀리하고, 35살 연하인 양귀비를 비롯해 후궁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임보는 무려 17년 동안 재상으로 재직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들이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자 결국 당나라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02_윤재영_AI음성비서

(좌) 일본 에도시대에 활동한 우키요에 화가 조분사이 에이시(鳥文斎栄之)가 그린 양귀비의 초상화.

(우) 당나라 황제 현종

이임보는 중국 역사상 최고로 치는 간신의 전설이다. 황제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만 하면서 머리를 조아려 신뢰 관계를 형성하고, 이렇게 획득한 힘으로 경쟁자를 제거해 자신의 힘을 더욱더 키우고, 황제를 무력하게 만들어 모든 것을 휘두르는 간신의 패턴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야말로 간신의 표준이자 교과서라 할 만 하다. 이런 간신의 존재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속 존재처럼 들리겠지만, 의외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흔히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바로 인공지능(AI) 음성 비서가 보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AI 음성 비서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는 중이다. 아마존의 ‘알렉사Alexa’를 시작으로, 구글에서 선보이는 ‘구글 어시스턴트Google Assistant’, 네이버의 ‘클로바CLOVA’와 카카오의 ‘헤이카카오Hey Kakao’, SKT ‘누구NUGU’, KT ‘기가지니GiGA Genie’ 등 국내외 IT 기업들이 자사의 AI 음성 비서 서비스를 내놓았다. AI 음성 비서가 큰 관심을 받는 이유는 기기와 상호작용하는 수단이 음성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용자의 눈과 손이 자유로워지고, 소통 방식은 빠르면서 또한 직관적이다. 더불어 스마트홈에 속하는 다양한 기기와 연동되면서 AI 음성 비서가 우리 삶을 편리하게 도와주는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현재 생성형 AI의 발전으로 자연스러운 대화도 기대할 수 있기에 가까운 미래에는 모든 개인이 AI 비서를 사용하는 시대가 올 거라는 예측도 존재한다. 이렇게 다양하고 새로운 경험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AI 음성 비서는 디자인을 설계하는 입장에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측면이 있다. 앞서 말한 이임보 같은 간신이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것처럼 소름 끼치게 비슷한 구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AI 음성 비서와 간신의 공통점은 대체 무엇일까?

03_윤재영_AI음성비서

인공지능 스피커들

무조건 복종하는 말투로 환심 사기

우리가 AI 음성 비서와 대화를 나눌 때를 생각해 보자. 보통 사용자는 말을 걸 때 반말을 사용하고, AI는 언제나 존댓말로 대꾸한다. “헤이! 너는 왜 항상 공손한 말투만 쓰는 거야?” 시비 걸듯 물어봐도, AI는 이렇게 답한다. “죄송해요. 제가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 사용자의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질문이 대답하기 모호한 경우가 많은 데도, 일단 자기 잘못이라며 먼저 수그린다. 우리가 아무리 막말하거나, 기분 나쁘게 대하더라도 AI 음성 비서는 우리에게 세상 정중하게 대하는 걸 잊지 않는다. 심지어 사용자가 성희롱이나 모욕적인 발언을 일삼아도, 이를 공손하고 유순하게 받아들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AI 음성 비서는 사용자에게 응당 친절하고, 유용하고, 신뢰를 주는 게 기본값이다. 그래서 태도 또한 ‘손님은 왕이다’를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중시되는 퍼스널 서비스의 기본을 지키기 위해서일까. 사용자와 AI 음성 비서는 어느덧 주종관계로 굳어지는 듯하다. 실제로 어떤 연구에서는 AI 음성비서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주인의 명령을 따르는 하인’이라는 점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들은 AI 음성 비서를 가리켜 “친절하고 도움을 주는 존재인 동시에, 언제 어디서든 계속 대기하며 자신의 말에 순종하는, 수줍은 많은 존재”로 묘사했다.

게다가 AI 음성 비서는 사용자에 대해서 무척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사용자가 어떤 콘텐츠를 좋아하는지 파악해 뒀다가 노래, 뉴스 등 맞춤형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은 기본이다. 사용자의 기분이 우울할 때나 화가 나 있을 때면 이에 맞춰서 긍정적으로 대해주니, 사람 입장에서는 마치 충성스러운 종을 가진 느낌이 들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간신의 달콤한 목소리가 멀리 있지 않은 것이다.

04_윤재영_AI음성비서

© KT

05_윤재영_AI음성비서

© Softbank

경쟁자를 밀어내는 꼼수 부리기

AI 음성 비서를 통해 제품을 구매하는 광경을 떠올려 보자. “헤이! 민감성 두피에 좋은 샴푸를 추천해 줘.” AI 음성 비서는 특정 제품을 추천해 주고, 사용자는 그 제품이 마음에 들면 주문과 구매를 요청하게 된다. 언뜻 보면 말 한마디로 모든 게 해결되는 편리한 주문 방식이지만, 여기에는 AI 음성 비서가 개입하고 심지어 조작할 기회가 숨어있다.

AI 음성 비서는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추천하는 걸까? 만일 가격이 동일하다면, 어떤 쇼핑몰에 주문을 넣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 메커니즘이 궁금해지는데,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이에 대해 상세히 공개하지 않고 있다. 많은 경우, 자사의 제품 혹은 자사에 유리하거나 후원을 주고받는 제품을 먼저 추천할 가능성이 높다. 자사와 제휴를 맺은 스토어의 제품을 더 우선하여 추천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그래서 다른 회사, 즉 경쟁사 제품은 상대적으로 사용자에게 노출되기 어려운 폐쇄적인 구조를 띠게 된다.

AI 음성 비서가 이런 권력(?)을 부릴 수 있는 힘은 음성 소통 방식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기존 사용자 인터페이스(UI)에서는 시각 정보를 중심으로 검색을 진행하는 반면, 음성 소통의 경우 질의와 응답을 주고받는 방식이 지극히 선형적이다. 다루는 정보의 절대량 또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리스트 중 가장 상위권에 포진하는 상품 위주로 추천하게 된다. 바로 이 순위를 만드는 기준이 무엇인지 베일에 싸여있는 게 문제다.

만일 서비스가 임의로 순위를 조작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 몫이 된다. 실제로 지난 2012~2020년까지 모 포털 사이트는 사용자가 상품을 검색할 때 나오는 결과에서 자사의 쇼핑몰 플랫폼에 입점한 업체의 상품을 더 높은 순위에 노출했다가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거액의 과징금을 때려 맞았다. 시장 질서를 심각하게 교란하는 알고리즘을 설계한 대가는 265억원이었다. 바보스럽게 충직한 AI 음성 비서가 사실 의뭉스럽게 제 이익을 챙기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06_윤재영_AI음성비서

무력하게 만들고 좌지우지 조종하기

현재 대부분의 AI 음성 비서 서비스는 ‘리액티브reactive’ 방식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사용자에게 조심스레 행동하며 말을 먼저 걸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만간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 똑똑한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면, 사용자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심기 보좌를 해주는 ‘프로액티브proactive’ 방식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이런 거다. “현재 실내 공기 청정 수치가 좋지 않습니다. 창문을 열어 잠시 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AI가 주도적으로 알아서 많은 일을 먼저 해준다면 신경 쓸 일이 줄어들어 편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AI에 대한 의존도가 깊어질수록 인간은 무기력하고 무력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AI가 결정해 주는 대로 따르는 삶이 자연스러워진다면, AI와 이를 서비스하는 기업의 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막강해진다.

07_윤재영_AI음성비서

© amazon

사람이 바보도 아니고 AI 음성 비서에게 모든 것을 맡길까,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맞다. 사용자가 주도적으로 결정을 내리면 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AI 음성 비서는 목소리에 변화를 주어 우리의 판단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여지가 있다. 목소리는 볼륨, 피치, 속도, 유창함, 발음, 조음 및 강조를 포함한다. 이를 조합하면 감정적인 부분을 매만지며 은밀하게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자사에 유리한 결정은 더욱더 매력적인 목소리로 소개할 수도, 사용자의 인종, 성별, 억양, 연령, 지역 등 여러 특성을 참고해 결정에 영향을 미치도록 목소리를 디자인하는 일도 가능해진다. 사용자가 꼼꼼히 살펴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약관이나 마케팅 수신 동의 같은 내용은 일부러 무미건조하게 재빨리 읽어버릴 수도 있다. 이미 보험 광고나 가입 권유 전화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다.

음성으로 가입하고 구매할 때는 세상 간편하게 진행하지만, 이를 취소하려고 들면 복잡하고 어렵게 돌변하는 건 일도 아니다. 실제 아마존의 멤버십 서비스는 알렉사 스피커로 쉽게 가입할 수 있지만, 멤버십 서비스 취소는 스피커로 불가능하다. 특정 정보나 광고를 은연중에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며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반복 간섭과 위장 광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함정이다.

08_윤재영_AI음성비서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한 AI 음성 비서는 똑똑하다고 광고하지만 사람 말귀를 못 알아듣는 바보 답답이에 가까워서 앞서 소개한 내용이 그다지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와 비교하면 너무 멍청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최근 그 기적의 생성형 AI가 AI 음성 비서 서비스에 탑재되기 시작하면서 바야흐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거라는 예측이 커지고 있다.

챗GPT를 위시한 AI의 기적 같은 능력에 감동한 사람들은 AI의 추천에 대해 별 의심 없이 믿고, 의지하고, 받아들이는 중이다. 굳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AI가 모든 것을 관장해 인생을 더욱 효율적으로 보낼 수 있는 시대에 대한 기대도 손에 잡히는 듯하다. 이처럼 점차 자율성이 증대할 일만 남은 AI에 우리의 크고 작은 결정을 맡기는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자율주행 자동차를 비롯해, 많은 돈을 담보로 진행하는 투자, 국가의 존폐가 걸린 전쟁에 이르기까지 AI가 관장할 수 있는 범위는 굉장히 넓고 깊숙하다. 골치 아픈 일이 없어지면 편리함으로 가득 찬 멋진 신세계가 펼쳐진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글 앞단에 나온 당나라 현종을 환기해 본다. 입안의 혀처럼 굴며 알아서 정사를 처리한 이임보 덕분에 현종의 심신은 편해지고, 세상 살맛이 났지만, 그는 국정을 돌보지 않고 향락에 빠져 우매해지면서 결국 한 나라의 멸망을 앞당기는 장본인이 되었다.

AI에 의지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무기력해지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이런 서비스 설계에 일조한 디자이너 또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디자인이 야기하는 부작용과 사회적인 파국을 충분히 고민하고 책임지는 윤리적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체적이고 건강하게 AI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돕는 디자이너의 관심과 노력이 절실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09_윤재영_AI음성비서

덧.

위 에세이는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 윤재영 교수의 신간 『디자인 딜레마 – 당신의 행복과 소비는 어떻게 은밀히 설계되는가?』에 속하는 18가지 디자인 딜레마 중 하나를 발췌해 특별히 가다듬은 글이다. 『디자인 딜레마』는 필요한 것을 척척 추천해 주는 맞춤형 콘텐츠, 시간은 ‘순삭’시키는 가상현실(VR) 체험, 유명인과 대화할 수 있고, 죽은 이와 신(神)까지 만나게 해주는 AI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가장 믿음직한 친구가 될 수도, 사용자를 조종하는 적이 될 수도 있는 디자인 매트릭스의 세계를 다룬다. UX 디자인과 행동경제학, 철학, 심리학적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과 경험에 숨은 18가지 디자인 딜레마에 대해 궁금하다면, 일독을 권한다.

10_윤재영_디자인 딜레마

Writer

윤재영은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에서 시각 디자인 학사, 카네기멜론대학교에서 Human Computer Interaction(HCI) 석사, Computational Design 박사 과정을 마치고 실리콘밸리에서 UX 디자인 리서처로 근무했다. 사용자 경험(UX), 인터랙션 디자인(HCI), 행동 변화를 위한 디자인을 중점적으로 연구하며 한국디자인학회와 한국HCI학회에서 최우수논문상과 우수 논문상 및 지도 교수상을 수차례 받았고, 삼성전자, 네이버, 카카오, 미래에셋, 아모레퍼시픽, 현대자동차, 가톨릭대학병원, 공정거래위원회, 국회, 통일부 등과 디자인 프로젝트 및 자문을 수행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디자인학부 및 영상·커뮤니케이션대학원 인터랙션 디자인 전공 교수로 DEEP Lab(@deeplab.hongik)을 운영하며, 한국연구재단과 교육부의 지원 아래 사용자를 유인하고 현혹하는 UX 디자인을 연구 중이다. 『디자인 트랩』, 『디자인 딜레마』의 저자이기도 하다. ryun@hongik.ac.kr

밈 원정대: 한국의 심연을 풍자하는 소련 여자

thumbnail
Essay

header_김경수_소련여자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푸틴만큼 유명한 동시대 러시아인은?” 이 질문에 답변하려고 머리를 굴려봤는데, 의외로 바로 생각나는 인물이 없네요. 얄궂게 머리를 스쳐 지나간 사람은 소련 여자라는 활동명으로 유명한 유튜버 크리스입니다. 구독자 100만 명을 넘기며 골드 버튼을 받은 그는 특유의 이성적인 표정과 함께 유창한 한국어로 시청자에게 직설을 날립니다. 반말은 기본이고, 지난 영상에 달린 악플을 추적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진행되는 그의 영상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던 한국의 민낯에 대해 조곤조곤 말하죠. 국뽕이 넘치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물게 솔직한 외국인 유튜버입니다. 그런 그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면서 잠정 활동 중단을 선언했다가 지난 3월 22일 정말 느닷없이 복귀했습니다. “돈 다 떨어졌다”라고 시작하는 컴백 영상의 주된 내용은 채널 편집자를 맡은 친구의 소설 출간 홍보였는데요.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김경수 님이 한국의 심연을 풍자하는 소련 여자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습니다. 소련 여자를 바라보는 가장 최신의, 가장 정확한 눈인데요. (채널 편집자의 실제 반응입니다) 과연 어떻길래…궁금하시다면 얼른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나다. ‘밈 원정대’ 쓰는 김경수. 오늘은 유튜브 채널 ‘크리스 [구 소련여자]’ 리뷰하려고 나왔다. 니들 1년 만에 크리스 컴백 영상 올라온 거 모르지? 왜 알아야 하냐고? 나, 김경수가 보장한다. 크리스 영상 정주행하면 인생 진짜 재밌다.

맞다. 내 글 노잼이다. 근데 크리스와 내 인생, 니들 댓글보다는 재밌다.

여기 악플러들, 러시아 홍차 마셔볼래?

01_김경수_소련여자

저 무덤덤한 표정과 거침없는 솔직함이야말로 소련 여자의 매력이다.

처음부터 쏟아지는 반말에 당황스러웠다면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보자마자 ‘뒤로 가기’를 눌러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오랜 팬심을 담아 크리스 흉내를 내보았는데, 똑같지도 않은 데다 웃기는 데에도 실패한 듯하여 분위기까지 싸해지니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그만큼 크리스의 개성은 나 따위가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체 크리스가 누구이기에 이 난리인가, 싶은 독자도 있을 테니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크리스, 일명 소련 여자는 지난 2019년 데뷔했다. 그의 데뷔 내막은 이렇다. 그해 7월 26일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그의 소속팀 유벤투스는 내한 경기를 치를 예정이었다. 호날두는 내한 경기에 45분 정도 출전하기로 계약했으나 이를 어기고 경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른바 노쇼, 즉 먹튀를 한 것이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호날두는 메시와 양강 구도였다. 한국의 해외 축구 팬이 메시파와 호날두파로 나뉠 정도로 팬덤이 두터웠다. 호날두는 먹튀에 대한 제대로 된 해명과 사과 없이 넘어가서 한국 팬의 분노를 샀다. 내한 일정을 소환한 다음에는 한국 팬을 무시하는 듯한 언행을 이어가며 인터넷에서 국민적인 비호감이 되었다. ‘호’라는 음절이 금지돼 ‘호불호’가 ‘메불메’가 되었을 정도였다. 

호날두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던 7월 31일, 한 러시아 여성이 친구(유튜브 채널 ‘크리스 [구 소련여자]’의 편집자 박힘찬)와 함께 공터에서 호날두 유니폼에 기름을 뿌리고 불태운 후 카메라를 마주 보고 이렇게 소리쳤다. “호날두 X발 놈아” 이 영상은 인터넷 커뮤니티와 소셜 미디어에서 ‘호날두 유니폼을 불태우는 러시아 여자’라는 제목으로 삽시간에 퍼지며 곧바로 화제가 되었다. 영상 속 주인공은 BBC 등 해외 언론에도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단숨에 유명세를 얻었는데, 훗날 우리에게 소련 여자로 익숙해진 유튜버, 크리스다.

호날두의 티셔츠를 불태우고 자본주의의 화신 소련 여자를 소환하는 강령술 영상이다.

경고: 호날두가 아무리 싫더라도 어린이 여러분은 이 영상을 따라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의 순수함 절대 지켜.

해당 영상이 내게 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소련 여자가 등장할 당시, 한국어로 활동하는 외국인 유튜버는 K문화에 대한 이방인의 리액션을 중계하는 방식에 집중했다. 영국남자 조쉬 등이 대표적인데, 황천의 뒤틀린 애국심, 즉 국뽕을 건드리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한편 ‹미녀들의 수다›, ‹비정상회담› 등 TV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외국인은 지적이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지닌 채, 대부분 외국 문화를 소개하는 가이드에 가까운 역할을 맡았다. 그들은 한국인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활동했고, 한국을 풍자하는 일은 드물었다. 로버트 할리, 이다도시 등 1세대 외국 방송인 시절부터 쭉 그러했다. 개인적으로 ‘외국인이 한국인의 뒤틀린 심정을 더욱 잘 볼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있던 차에 크리스가 등장한 것이다.

02_김경수_소련여자

사진 속 이들의 지적이고 차분한 인상과 정돈된 포즈는 스타트업 CEO 세미나에 참석한 듯한 인상을 준다. 아니면… 야레야레 못 말리는 아가씨”라고 속삭이며 춤을 출 듯한 집사 같다.

03_김경수_소련여자

K POP보다 역시 K-Chicken인 법이다. 한국만큼 치킨집의 수가 많고 치킨이 맛나기까지 한 국가는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크리스는 달랐다. 그의 영상은 한국인의 심연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호날두 유니폼을 불태우는 행위는 외국의 과격한 훌리건이나 할 법한 짓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이돌 팬덤에서 굿즈 화형식은 흔한 일이다. 크리스는 이를 수면 위로 드러내 풍자적으로 그려낸 셈이다. 크리스의 독특한 지점은 두 번째 영상에 더욱 잘 드러난다. 그는 유튜버로 데뷔한다는 말을 꺼내며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래, 나 국뽕이다. 국뽕 잘해서 ‘영국남자’처럼 될 거다.” 곧이어 손흥민부터 시작해 ‘두유 노?’ 클럽에 있는 인물 리스트를 외운다. 한 마디로 경이로웠다. 크리스는 유튜브로 한탕을 노리는 한탕주의와 자기 계발에 미쳐 있는 한국인, 국뽕이라고 불리는 애국심을 동시에 풍자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동양학을 전공했고, 한국 대중 문화에 드러나는 일본에 대한 악감정을 주제로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이미 한국인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한국에 온 것일 수도 있다. 편집자 또한 최근 발간한 소설 『백만 유튜버 죽이기』를 보면 신랄하게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태도를 지닌다. 이 둘의 의기투합은 폭발적인 시너지의 원천이다.

04_김경수_소련여자

나한테도 귀감이 되는 말이다. 빨리 국뽕이 차오르는 글을 써서 조회수가 폭발하고 정부 지원금도 받는 것이 꿈이다. 국뽕을 자극하려면 다른 국가와의 비교를 통해 한국의 우월함을 증명하거나 자국에 대한 가짜뉴스나 신화를 만들어야 한다. 신화는 역시 건국 신화다. 결국 이 두 조건을 만족하려면 ‹건국 전쟁›이라는 제목을 지녀야 할 듯하다. 그런데 나는 외국인이 아니니까 사이버 렉카 취급당할 듯하다.

한국인의 심연을 제대로 풍자하려면 그에 적합한 형식이 필요하다. 크리스의 영상은 몬티 파이선Monty Python 식의 코미디를 연상시킨다. 채널 편집자인 박힘찬 작가는 실제 몬티 파이선의 애청자다. ‘코미디의 비틀스’라고 불리는 몬티 파이선은 1960년대부터 영국에서 활동한 전설적인 코미디 그룹이다. 굳이 우리나라로 따지자면 ‘피식대학’ 느낌이랄까. 한국에서는 몬티 파이선이 찍은 극장용 영화 ‹몬티 파이튼의 성배›(1973)로 유명하다. 몬티 파이선의 코미디는 부조리하며 초현실적이다. 이들의 쇼는 여러 스킷(작은 상황극)으로 구성되는데, 스킷이 부드럽게 연결되지 않고 툭툭 끊기며, 인물끼리 대화도 안 통한다. 쇼에 등장한 모든 캐릭터가 아무 말 대잔치를 하는 느낌이다. 또한 스킷 중간마다 테리 길리엄(‹브라질›(1984)과 ‹12 몽키즈›(1999)로 유명하다)의 애니메이션 작업을 삽입하면서 제4의 벽이 무너지기도 한다. 자막 오류 등 영상 요소를 이용한 개그와 방송 패러디도 적극적으로 쓴다. 그들의 개그 너머에는 영국 정치는 물론, 인간 전반에 대한 냉소와 허무주의가 가득하다.

05_김경수_소련여자

1975년에 제작된 영화인데도 지금 봐도 새롭다. 하드코어한 ‹SNL› 느낌이랄까. 넷플릭스에 있으니까 한 번 보기를 권한다. 아서 왕과 성배 전설이 와장창 무너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나름 완성도도 훌륭하다. 이 시리즈의 3편 ‹삶의 의미›는 박찬욱의 ‹박쥐›가 타기도 했던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탔다!


06_김경수_소련여자

아서왕 전설 중 흑기사를 풍자한 파트다. 가오 하나로 사는 캐릭터라 팔 하나가 잘려 나가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서 왕에게 덤빈다. 이 외에도 니! 라든지 마녀사냥, 아서 왕에 맞서서 코뮤니즘을 외치는 서민 등 킬포가 한가득하다.


‘소련 여자’도 에피소드마다 이야기의 연결이 끊기는 건 기본이고, 아무 말 대잔치가 펼쳐진다. 자막이나 댓글에 대한 반응을 활용해 제4의 벽을 무너뜨린다. 영상 중간마다 크리스의 편집자 디스를 삽입하기도 하며 제2대 소련 여자로 불리는 조연 샌즈가 서사에 끼어들기도 한다. 마치 한국 예능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느낌이다. 가끔은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짤방을 보내고 싶을 정도로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넘친다. 나아가 세상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보는 몬티 파이선 정신을 계승하기도 하는데 이를 말로 표현하기엔 복잡하니까 직접 영접해 보자. (개인적으로 ‹새벽에 엄마 몰래 라면 끓여먹기!› 영상을 추천한다)

새벽에 몰래 라면을 먹는대서 보았는데 어느덧 LH와 비트코인 풍자를 하고 있다. 소련 여자의 스타일이 가장 잘 녹아 있는 영상이라 생각한다.

크리스가 유튜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할 때, 수도권 지하철 1호선 리뷰 영상을 올린 적이 있다. 지하철 1호선은 지하철 빌런이 등장하는 마계로 소문난 곳이다. 다큐멘터리처럼 있는 그대로 찍기만 해도 조회수가 나와서 많은 유튜버가 소재로 애용한다. 그는 지하철 1호선을 ‘한국의 작은 러시아’라고 말하며 “고향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고 농담을 던진다. “지구 멸망 이후에 탄 열차와 같은” 1호선에서 마주한 풍경―지하철을 어슬렁거리며 시비를 거는 노인, 크게 찬송가를 부르며 전도하는 개신교인, 지하철 잡상인 등등―을 통해 한국이 지닌 기이한 혼종성을 내보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때는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처럼,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다닐 때는 자연스러웠던 풍경이 크리스의 시선을 거치자 부자연스럽고 초현실적으로 보인다.

이후에 제작된 크리스의 영상은 지하철 1호선 리뷰 영상에 기반해 반복과 변주한 결과물에 가깝다. 보통 “나다.”로 시작하는 영상은 지난 영상에 달린 악플을 소개한 다음, 이에 대한 리액션을 펼치며 진행된다. 그는 일진이 애용하는 스타일로 옷을 입는다든지. 먹방 유튜버를 따라 한다든지, 뒷광고로 삽입해야 할 광고를 영상 중간에 삽입해 앞광고로 만든다든지, 하는 식으로 한국의 인터넷 밈을 영상에 마구잡이로 삽입해 한국을 풍자한다. 인터넷 밈뿐만 아니다. 『환단고기』에 기반한 유사 역사와 유구한 반공주의 및 온갖 음모론도 풍자 대상에 포함한다.

07_김경수_소련여자

소련 여자의 영상을 보다가 당황하지 마시라. 크리스는 처음부터 대놓고 광고를 한다. 심지어 스킵을 할 수도 없다.

크리스의 풍자에 이유는 없다. 그냥 우스꽝스럽고 이미지가 웃겨서 한다. 수많은 풍자를 아무 이유도 없이 연결하면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왜인지 모르게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좋아’랄까! 소련 여자 영상의 구성은 하나의 콘텐츠에 집중하기 힘든 한국의 정신 없는 소셜 미디어 풍경을 감각으로 체험시키기 때문인 걸까? 게다가 그의 영상은 혼란스럽지 않다. 보통의 유튜버는 혼란한 각을 발견하면 ‘좋아요’를 노리고 과잉된 리액션과 욕설을 쏟아내며 구독자의 도파민을 자극한다. 하지만 크리스는 정반대로 반응한다. 그는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의중을 도저히 알 수 없는 표정만 지을 뿐이다. 여기에는 크리스가 러시아 사람이라는 콘셉트가 숨어 있다.

러시아는 불곰국 시리즈라고 불리며 인터넷 밈으로 승화한 국가다. 불곰국 밈은 군인 여럿이 겨우 드는 통나무를 여자 한 명이 혼자 통째로 든다든지, 사람이 불곰을 타고 다닌다든지 하는 초현실적인 사건이 일상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이미지에 기반한다. 최저 기온이 영하 수십 도까지 떨어지는 나라인 만큼 거기에 사는 사람은 그만큼 강할 거라는 고정관념이 강해서 왠지 설득력을 갖춘다. 이처럼 한국보다 더욱 혼란스러운 지옥(?) 러시아에서 온 크리스는 고요한 태도를 고수한다. 오함마를 드는 등 엽기적인 행동을 할 때마저도 무덤덤한 표정이다. 아무리 혼란스러운 상황이 생겨도 평온한 태도로 일관하는 크리스의 말투는 시청자가 그런 상황에 거리를 두도록 돕는다.

08_김경수_소련여자

러시아는 술집에서 두 남성이 칸트로 토론하다가 서로 총으로 쏴죽였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국가다. 그만큼 러시아 밈은 상상초월할 정도로 재밌다. 이미 세계적인 놀림거리(?)이므로 소련 여자도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다.

09_김경수_소련여자

러시아의 상징이기도 한 불곰은 러시아 밈의 단골 소재다. 불곰을 기르는 러시아인의 모습은 강아지를 기르는 듯하다. 유사품으로는 캥거루가 맨날 집을 드나든다는 호주 밈이 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만한 점은 채널명이 러시아 여자가 아니라, 소련 여자란 거다. 크리스는 1995년~1997년생으로 추정되는데, 소련은 그가 태어나기 전인 1991년 해체됐다. 소련 여자는 진짜가 아니라 콘셉트에 불과한 셈이다. 만약 그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유행하던 시대에 동일한 콘셉트로 활동했다면 진작에 간첩으로 몰려 남산으로 잡혀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소련은 망한 지 20년도 더 됐다. 제아무리 소련을 위대하다고 말해도, 모두가 우스갯소리로 취급한다. 그래서 소련에 대한 인터넷 밈은 공산주의를 언급하더라도 한국인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지 않는 아이러니를 지닌다. 크리스는 돈에 미쳐 있는 한국을 매섭게 비판하지만, 소련 여자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얻는다. 농담으로 웃어넘길 수 있는 비판 요소는 여전히 시청자의 마음에 남기면서.

크리스의 영상은 미디어 아트로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농담이 아니다. 소련 여자가 유행할 즈음 아티스트 류성실은 정치 BJ를 풍자하는 ‹체리 장› 연작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체리 장›은 위악적인 인터넷 방송 BJ를 설정해 정치적 음모론이 생기고 확산되는 환경을 그려낸다. 작가는 키치한 정치적 구호와 음모론이 지배하는 한국 정치의 혼란스러운 풍경을 체험하도록 이끈다. 릴스와 쇼츠, 인터넷 밈을 콜라주한 혼종으로 한국의 어두운 심연을 그리는 크리스의 영상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영상의 목적의식이 작품만큼 확실하진 않지만, 이름을 가리면 미디어 아트 작품으로 봐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10_김경수_소련여자

‹체리장› 연작 중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다. 미디어아트라 해서 어렵다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체리장›은 정치 유튜브의 조악한 미술을 모두 모아다가 만들었다. 키치의 정수랄까. 내가 본 미디어아트 중 가장 재밌다고 추천할 만큼의 재미가 있다.

인터넷 밈의 미학은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가 한 곳에 공존하는 상황에서 생긴다. 그런 면에서 소련 여자는 인터넷 밈의 미학에 충실하면서도, 모두가 저마다의 평행우주에 사는 파편화된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구독자라면 잘 알겠지만, 크리스는 푸틴을 풍자하는 영상을 꾸준히 업로드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러시아인이라는 이유로 마녀사냥을 당했다. 악플에 응수하다가 지쳤는지, 잠정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어쩌면 자신이 풍자한 것 이상으로 미쳐있는 진짜 광기의 나라, 한국의 일면을 마주한 것일지도 모른다.

크리스는 지난 3월 22일 1년여 만에 복귀를 선언했다. 자신의 채널 편집자인 박힘찬의 소설 『백만 유튜버 죽이기』를 홍보하면서 “돈 때문에 복귀했다”라고 당당히 말한다. “채널의 주인장 크리스는 (구독자를 포함한) 시청자를 ‘개돼지’에 빗댄다. (글쓴이 주: 개돼지는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에 나오며 인터넷 밈이 됐다) 과격한 비유와 함께 크리스는 개돼지에 대한 감사 인사를 빼먹지 않는다. 크리스는 손님이 왕이고 시청자가 갑인 시대에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며 그들의 치부를 건드리는 왕실 광대 노릇을 하는 중이다. 언제 떨어질지는 모르지만 힘닿는 데까지 줄을 타보는 게 우리 목표다.” 박힘찬의 이런 당부대로라면 소련 여자는 지금까지의 영상보다 더욱더 파격적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11_김경수_소련여자

크리스는 결국 유튜브에 복귀했다. 크리스에게 돈을 직접 건네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녀의 멤버십에 가입하면 된다. 크리스는 멤버십을 아보카도와 갈비로 나누었다. 이 둘은 크리스의 최애 음식이다. 아보카도는 월 4900원, 갈비는 월 6만원이다.

이 글을 마감한 직후에 새 영상을 업로드했고, 그 영상도 무척 재밌고 독하다.

Artist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단행본으로 나올 채비를 마치고 있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 (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 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밈 원정대: AI 커버 vs 인간 대격돌

thumbnail_밈 원정대_김경수
Essay

header_밈 원정대_김경수

Essay

이슈에 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요새 유행하는 노래를 꼽으라면 비비의 ‘밤양갱’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가수 장기하가 작사, 작곡한 곡으로 ‘어둠의 아이유’라 불리는 비비의 달달한 음색과 서정적인 가사가 인상적인데요. 오리지널 곡이 끝이 아닙니다. AI 커버 기술을 활용해 아이유, 오혁, 박명수, 故 김광석 버전까지 나오며 신드롬이 되고 있어요. 그중 가장 화제가 되는 버전은 바로 배우 황정민의 ‘밤양갱’입니다. 특정 인물의 목소리를 AI가 분석해 뚝딱 만들지 않고, 황정민이 출연한 영상물에서 가사에 상응하는 음절을 찾고 해당 장면과 음성을 하나하나 채집해 몽타주했어요. ‘밈 원정대’를 연재하는 인터넷 밈 연구자 김경수 님은 해당 영상을 가리켜 초인적인 노력이 담긴 인간 악기 작품이라고 평합니다. 날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지는 AI 커버, 매끄럽지 않더라도 한땀 한땀 자르고 기우며 손맛을 극도로 살리는 인간. 이 격돌에서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01_밈 원정대_김경수

섬네일에서 짐작할 수 있듯, AI 커버도 감상용 AI 커버와 유머용 AI 커버로 나뉜다. 밈을 보는 듯한 박명수와 케이셉 라마K$AP Rama 커버에 더해진 섬네일과는 달리 혁오 커버의 섬네일은 왠지 모르게 감성적이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쪽도 얼굴을 찌푸린 황정민이 주는 임팩트를 넘지 못한다. AI 커버의 섬네일이 가짜 광기라면 황정민 커버의 섬네일은 진짜 광기랄까. 고인물만이 만들 수 있는 미감이다.

망했다. 나는 망했다.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최근 마감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가 둘이나 생겼다. 그들은 마감이 코앞일 때마다 스멀스멀 등장해서 나를 한두 시간 가까이 유튜브에 가두어버린다. 유튜브에서 겨우 탈출하면 마감 기한이 촉박한 미완성 원고가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 홀리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며 따지더라도 할 말이 없다. 그저 “으악 안 돼!”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는 독자가 생기기 전에 자기연민은 그만두겠다. (여러분도 나와 비슷한 신세로 만드는 게 진짜 목적이니) 요즘 마감을 망치는 두 주인공을 소개한다.

(글 제목에서 보이듯) 하나는 인공지능(AI) 커버다. 보통 AI 커버는 원곡에 AI가 딥러닝으로 학습한 다른 가수의 목소리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그 후 웃긴 짤방을 섬네일thumbnail로 정한 후 업로드한다. AI 커버는 원곡자의 창법에 맞춰 다른 목소리를 덧입히는 터라 완벽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특히 오혁 등 창법이 독보적인 경우에는 다른 가수의 목소리를 덧입힐 때 어색한 티가 확 난다. 고음이 뭉개지기도 하고, 프레디 머큐리나 브루노 마스 등 외국 가수가 커버할 땐 (당연하게도) 한국어 발음이 제법 어눌해진다. 원곡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커버한 걸 재가공하기도 한다. 여튼, 중요한 건 그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는 거다. 심지어 중독적이다.

02_프레디 머큐리_사건의 지평선

프레디 머큐리 ‘사건의 지평선’

얼마 전에도 마감을 코앞에 두고 AI 커버에 붙들렸다.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나를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르는 ‘잔혹한 천사의 테제’ AI 커버 영상으로 안내한 탓이다. 에반게리온 초호기와 시나트라가 함께 있는 우스꽝스러운 섬네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이 무슨 끔찍한 혼종인가…’ 생각보다 퀄리티가 괜찮았다. 크리스마스에 틀어도 괜찮을 정도로 감미로웠다. 무엇보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목소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아서 어안이 벙벙했다. 하나만 보고 마감에 집중할 계획이었으나, 프레디 머큐리가 부르는 ‘잔혹한 천사의 테제’ AI 커버 영상이 추천 영상으로 떴다. 아스카 랑그레이 얼굴에 프레디 머큐리를 합성한 섬네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 영상을 클릭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훌쩍 흘렀다. 끝내고 나니 자괴감이 들고 괴로웠다. 댓글에 나와 비슷한 사람이 제법 보이는 상황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프랭크 시나트라 ‘잔혹한 천사의 테제’

프레디 머큐리 ‘잔혹한 천사의 테제’

AI 커버의 유행은 재작년 즈음부터다. AI 커버를 제작하는 툴이 급속도로 대중화되면서 조금만 검색하면 누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난도가 낮아졌다. 지난 2020년 Mnet에서 ‹AI음악프로젝트 다시 한번›을 기획할 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풍경이다. 고인이 된 뮤지션 두 명의 무대를 AI로 재현한다는 목적 아래, 故 김현식이 부르는 박진영의 ‘너의 뒤에서’와 故 터틀맨이 부르는 ‹이태원 클라쓰›의 OST ‘시작’을 AI 커버로 제작하고, 딥페이크 기술을 활용해 고인의 무대를 생생히 재현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상영 당시 큰 화제를 모았다. 나 또한 의심 반 기대 반 유튜브에서 방송 클립을 재생했다. AI 기술이 죽은 사람을 되살려 무대에 올린다는 사실에 SF 소설이 현실화되는 느낌이었는데. 지금 들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잘 제작한 AI 커버의 자연스러움이 주는 충격은 덤이었다. 영화를 발명한 뤼미에르 형제의 초기작 ‹열차의 도착(L’Arrivé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1895)을 처음 본 관객이 기차가 진짜로 다가오는 줄 알고 지레 겁먹었다는 루머가 있는데,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처럼 AI 커버는 놀라운 구경거리에 가까웠다.

김현식 ‘너의 뒤에서’

추가로 편성해 달라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해당 프로그램은 아쉽게 계속 제작되지 못했다. AI 음성 합성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은 탓이었다. AI가 학습할 원본 자료를 수집하고, 목소리를 제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노래 한 곡이 탄생하는 데 무려 100일가량이 소요됐다. 유족의 허락 등 여러 윤리적인 문제도 생겼다. 이듬해 SBS와 TVING에서 AI 커버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임윤택과 유재하, 프레디 머큐리 등 고인의 목소리를 되살린 AI 커버가 제작됐는데 큰 인기는 끌지 못했다. 기계음 특유의 부자연스러운 느낌은 사라졌지만, 처음 공개할 때만큼 충격을 주는 데 실패했다. 방영 직후 일반인도 AI 커버를 제작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한 까닭이다.

이제 AI 커버는 장난감에 가깝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영화의 탄생을 두고 “지금까지 예상할 수 없던 엄청난 유희 공간을 우리에게 약속하는 매체”라고 평했다. 카메라로 대상을 클로즈업한다든지, 슬로우 모션으로 촬영한다든지 하는 기법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고, 기법 자체도 놀잇감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모든 기술이 그렇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AI 커버가 생기기 전에 AI를 이용한 인터넷 밈 하나가 유행했다. ‘다메다네’라고 불린 그것은 콘솔 게임 ‹용과 같이 5: 꿈을 이루는 자›의 OST인 ‘바보 같이’가 원본이다. 야쿠자 두목이 술 한잔 걸치고 부른 듯한 느끼하고 애절한 노래는 서양인 오타쿠가 립싱크한 영상이 발굴되면서 인터넷 밈으로 가공됐다. 영상 속 양덕후는 본인 딴에는 진지하지만 남이 보기에 우스꽝스러운 과잉 표정 연기를 선보인다. 보기만 해도 웃겨서인지 밈 창작자는 딥페이크 기술로 그의 표정만 빌려다가 빅맥, 궁예 등 다른 오브제에 합성하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을 선보였다. 남성 코미디 그룹 나몰라패밀리의 김경욱은 이런 제작 방식을 빌려와 ‘나 일론 머스크Na Elon Musk’ 밈을 제작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나 일론 머스크라는 캐릭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전달하기 위해 일론 머스크를 딥페이크했다. 아마 이 같은 인터넷 밈이 AI 기술에 대한 반감을 덜어주었을 테다.

다메다네 ‘빅맥’

다메다네 원본

대중은 AI 커버에 왜 끌리는 걸까? 뻔한 이야기지만 아마 예기치 못한 조합에 대한 호기심이 클 것이다. 간혹 우리는 어떤 노래를 들을 때 자기가 원하는 다른 가수가 해당 노래를 부르는 엉뚱한 상상을 한다. AI 커버는 이를 실제로 구현한다. AI 커버가 생기기 전에는 곡을 녹음한 가수의 목소리를 다른 목소리로 대체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우리는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기존에 나온 노래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AI 커버 덕분에 이제 상상에서만 흐르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지금이야 딘Dean이 3년이라는 오랜 공백 끝에 컴백했지만, 그가 잠수를 타고 있을 때는 딘의 AI 커버가 열풍이었다. 딘 AI 커버 곡만 모은 플레이리스트가 따로 있을 정도였다. 딘의 세련된 목소리가 거의 모든 여자 아이돌 노래에 찰떡같이 달라붙어 가능한 일이었다. AI가 딘으로 빙의한 뉴진스의 ‘New Jeans’는 조회수가 361만에 달한다. ‘Hype Boy’를 커버한 영상 조회수도 207만이다. 자매품으로 프레디 머큐리, 김광석, 브루노 마스, 아이유, 임재범 등이 ‘인간 악기’로 쓰이고 있다. AI 커버가 가짜라는 사실을 알아도 즐기는 데에는 전혀 문제없다. 오히려 가짜라서 더 재미있다. 어색한 구절이 있어도 웃어넘기면 되니까. 최초의 AI 커버로 볼 수 있는 보컬로이드 아이돌 하츠네 미쿠(初音ミク)도 기계음으로 노래를 불렀기에 오타쿠의 전폭적인 사랑을 얻는 데 성공했다. 어설픈 목소리가 오히려 모에(萌え·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사랑스러운 포인트를 지칭하는 서브컬처 용어)를 만든 것이다. 만약 AI 커버와 사람이 부르는 음원을 구별할 수 없다면 되려 불쾌한 골짜기나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까?

딘 ‘Hype Boy’

03_밈 원정대_하츠네 미쿠

하츠네 미쿠

이보다 한 발짝 더 나간 AI 커버도 있다. 최근 어떤 AI 커버 영상을 보고 울었다. 분명 AI 커버는 가짜에다 장난감이라고 생각하는데도 울음이 터졌다. 바로 애니메이션 ‹짱구는 못말려› 한국판에서 짱구 아빠 신형만 역을 맡은 故 오세홍 성우 목소리로 생성한 노라조의 ‘형’ 영상이다. 오세홍 성우의 목소리 데이터를 성실히 모아다 제작한 노래는 짱구 아빠가 직접 노라조의 노래 속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는 듯했다. 이처럼 신형만이나 ‹심슨 가족›의 호머 심슨 등 유명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목소리를 AI 커버로 돌리는 영상도 유행하고 있다. 우리는 캐릭터의 목소리가 실은 성우의 목소리라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우의 탁월한 연기력 때문에 마치 캐릭터가 생생히 살아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AI 커버는 목소리를 학습하고 재현하는 기술의 산물이다. 우리가 감동하는 까닭은 순전히 그 캐릭터가 지닌 힘 때문이다. AI 커버라는 매체를 빌려 우리는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를 현실에서 잠시 만나는 마법 같은 경험을 누린다. 물론 AI 커버는 목소리의 악의적인 도용 등 윤리적인 문제를 지니고 있고, 이를 외면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AI 커버가 창출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다. 인터넷 밈이 된 AI 커버는 우리의 동심을 되살린다. 기상천외한 조합을 원하는 호기심, 서툴러도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 픽션 속 캐릭터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순진무구함 등 AI 커버를 활용해 우리가 되찾을 수 있는 감정은 지금 이 시대에 소중하다.

신형만 ‘형’

AI 커버만큼이나 내가 주목하는 또 다른 구원자(?)는 ‘제프프’다. 3년 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그의 매력적인 리믹스 영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볼 정도로 애청자다. 좋아요, 구독, 알람은 물론 틈이 날 때마다 주변 사람에게 영업할 정도로 미쳐 있다. 그의 손을 거치면 배우 황정민,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도 인간 악기로 변한다. 얼마 전 그의 신작이 업로드됐다. 황정민이 부르는 비비의 ’밤양갱’이다. ‘밤양갱’은 발매되자마자 수능 금지곡 반열에 오를 정도로 중독성이 강한 곡이다. 그래서 온갖 AI 커버의 표적이 되었는데 노래를 만든 장기하의 AI 커버가 화제를 끌었다. 비비의 별명이 ‘어둠의 아이유’인 만큼, 아이유의 AI 커버도 인기다. 오혁, 박명수, 故 김광석의 AI 커버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활발히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버전도 황정민이 부르는 ‘밤양갱’의 조회수를 넘어서지 못했다. 하루에 서너 번 보게 하는 마력을 지녔다.

황정민 ‘밤양갱’

제프프의 영상은 지난 에세이에서 소개한 ‘조교’에 기반한다. 정확히는 ‘음MAD’라고 부르는 독립적인 장르다. 보통 캐릭터의 발음과 그 발음을 하는 순간의 영상을 하나하나 따서 손수 몽타주하는 방식으로 제작한다. 황정민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영상을 만든다고 치자. 이를 위해 황정민이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나 예능을 쭉 검토하면서 ‘무’, ‘궁’, ‘화’, ‘꽃’, ‘이’, ‘피’, ‘었’, ‘습’, ‘니’, ‘다’라는 음절 10개 모두 다 따로 떼어낸 뒤 한 문장으로 합성하는 식이다. 모든 음절의 조가 다른 데다가, 음절마다 대응하는 영상 속 캐릭터가 달라지니 매우 혼란스럽게 보인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스꽝스럽지만, 이내 경이로움이 생긴다. 조교를 제작하는 과정에 들이는 초인적인 노력이 훤히 보여서다.

제프프는 손수 비트를 제작하고, 최대한 인위적인 조작을 배제하면서 그 인물이 실제 발화한 어절만 편집해서 노래에 활용한다. 상상할 수 없는 노동력이 동원되는 것이다. 음MAD를 제작하는 심영물 유튜버인 ‘차커’와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조교를 일컬어 “노가다이자 개고생”이라고 말했다. 더욱 자연스러운 음절을 발굴하기 위해서 평소에도 다양한 콘텐츠를 보고 음절을 추출해야 한다. 0.n초 짜리 영상을 오리고 붙이는 일을 수천 번 반복하는 과정을 거친다. 마치 영화 제작을 방불케 하는 정성이 깃든 행위는 그야말로 인간판 AI 딥러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지난한 과정을 들은 후에야 나는 비로소 밈 창작자의 꿈을 접었다.

수리남 리믹스

내게는 AI 커버 영상보다 제프프의 영상이 더 사랑스럽다. 음MAD에 담긴 정신이 내 마음을 울린다. 음 MAD는 일본에서 건너와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본격적으로 퍼진 계기는 ‹데스노트›에 출연하는 캐릭터들의 목소리를 합성한 음MAD 바카야로이드(주인공 야가미 라이토가 자주 외치는 대사인 “바카야로”와 보컬로이드의 합성어) 덕분이다. 이처럼 특정 캐릭터나 인물을 조교의 소재로 삼는 것을 밈 제작자의 용어로 ‘인간 악기’라고 칭하는데, 심영물, 고길동, 타짜 등 한국의 전통적인 인터넷 밈이 자리 잡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인간 악기로 자주 쓰인다. 당시 한국 인터넷 밈의 기반은 ‘잉여력’이었다. 잉여는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요즘 말로) ‘갓반인’이 되지 못한” 존재다. 인터넷 밈은 잉여들의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가 만들어 낸 성취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잉여는 인터넷에서나마 존재감을 획득하고자 인터넷 밈을 제작했고, 이렇게 밈을 제작하는 데 들인 열정과 노동을 속칭 잉여력이라고 불렀다.

04_밈 원정대_김경수

바카야로이드

바카야로이드 (영원히 고통받는 라이토)

지금의 잉여력은 예전과 조금 차이가 있다. 초등학생부터 장래 희망을 유튜버로 꼽는 세상에서 밈 제작자는 관심이 곧 돈벌이가 되는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존재다. 인터넷 밈 자체가 저작권을 침해하므로 유튜브에 올린다고 한들 아무런 수익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백만의 조회수가 터지더라도 수중에 떨어지는 돈은 원칙적으로 0원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토록 가성비 떨어지는 행동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나? 인터넷 밈은 기어이 즐거운 경험을 타인에게 선물하겠다는 친절한 마음에서 비롯한다. AI 커버 영상은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알아서 나오지만, 음MAD는 제작자 본인의 창작 취향에 충실하며 기어이 중노동을 감수한다. 나는 여기서 AI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고전적인 예술가의 열정을 마주한다. 후대에 음MAD는 인간의 중요한 예술 행위 중 하나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오직 사람에게만 기대할 수 있는 종류의 창작이기 때문이다.

Writer

김경수(@vivre_wasavie)는 영화평론가이자 인터넷 밈meme 연구자다. 학부에서 문예 창작을 전공하고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화제를 모은 졸업논문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은 단행본으로 나올 채비를 마치고 있다. 영화와 인터넷 밈을 동시에 연구하는데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현재 «코아르»에 영화 비평, «여성동아»에 인터넷 밈 비평을 연재하고, «씨네21»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 한국 지부 정회원이자 인문학 스탠드업 코미디 페이지 ‘인문학적 개소리’의 운영자이기도 하다.

현대미술 설명서: 필립 파레노 전시가 어려운 뉴비라면

thumb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Essay

header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요즘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전시에 관심 있는 사람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존재가 있으니, 바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입니다. ‘전시가 너무 어렵다, 이해할 수 없다, 이게 대체 뭐냐’라는 볼멘소리와 ‘전시가 너무 좋다, 진짜 재미있다, 이런 전시가 우리나라에서 가능하다니!’라는 탄성이 교차하는 상황을 접하는 뉴비들은 갈까 말까 갈까 말까 결정장애를 겪고 있는데요. ‘현대미술 설명서’를 연재하는 박재용 님이 동아줄을 내려봅니다. 참고로 재용 님은 필립 파레노 전시의 기자 간담회에서 동시통역을 맡느라 여러모로 스터디를 열심히 하셨는데요. 그가 추천하는 친절한 월텍스트 요약본으로 왠지 가기 싫은 느낌을 한풀 낮추는 건 어떨까요? 전시가 막을 내리면 다시 경험하기란 불가능하니까요.

한남동 언덕에 자리한 리움미술관까지 도보로 올라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구릉으로 올라가는 2차선 도로 옆에 난 보도는 한 사람이 넉넉히 지나갈 만한 너비다. 미술관 주차장이나 입구까지 자동차로 이동하지 않는 이상 약간의 등산(?)이 필요하다. 이처럼 접근성이 마냥 좋지만은 않은 미술관에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기대하며 들르는 것이든) 분명 강력한 의지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 없다. 그런데 작년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개인전을 찾은 관람객이 25만 명에 달한 걸 보면 강렬한 의지 아래 한남동 언덕길을 등반할 준비를 마친 사람이 한둘은 아닌 듯하다.

요즈음 이 언덕을 올라 정문으로 향하는 입구 옆, 한남동을 내려다보는 넓은 야외 데크에는 난생처음 보는 물체가 있다. 2012년 10월부터 이곳을 지키던 수호신이 사라지고 이상하고도 거대한 타워처럼 생긴 구조물이 우뚝 서 있다. ‘아니쉬 카푸어의 조각이 어디 간 거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선을 훔치는 이 구조물은 웬만한 2~3층 건물과 맞먹는 높이에 정확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굵은 케이블이 연결돼 있어 산업적인 느낌이 확 난다. 어딘가 스피커를 심어둔 건지, 어느 나라 말인지 모를 언어로 나지막이 읊조리는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SF 영화 세트장 출신인가 싶지만 이것도 역시 작품이다. 프랑스 출신의 작가 필립 파레노Phillipe Parreno가 리움미술관 개관 20주년을 맞아 진행하는 개인전 «VOICES, 보이스»에 내놓은 신작 ‹막(膜)›(2024)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구조물은 미술관 외부의 환경을 감지하는 센서들의 모음으로, 데이터를 수집해 계속 미술관 내부로 전송한다고 한다.

01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미술 작품이 센서 역할을 한다니, 이건 무슨 뜻일까? 이에 대한 생각은 잠시 미뤄두고 일단 진입로를 따라 미술관 로비에 들어서 보자. 이제 로비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스크린에서 무작위로 출력하는 듯한 디지털 노이즈 이미지가 보인다. 디지털 신호를 시각화하는 알고리즘에 랜덤 함수를 적용한 모습인데, 바로 아까 미술관 입구에서 조우한 구조물을 통해 채집한 데이터를 시각화한 결과물이라고 한다.

본 전시가 시작한 건지,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펼쳐지는지 아리송한 상태로 관람 동선을 따라가면 벽에 붙은 간략한 설명문 형태의 ‘월텍스트wall text’를 발견할 수 있다.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리움미술관은 전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국내 첫 개인전 «VOICES, 보이스»를 개최… 아시아 최대 규모의 서베이 전시… 필립 파레노는 전통적 작가 개념에 도전하며 오브제 생산자로서 작가의 역할을 거부… 전시와 작품과의 역동적 관계를 탐구하고 ‘시간의 경험’을 제안하며 90년대 현대미술 형태의 혁신적 전환을 이끌었다…

읽는 족족 등장하는 낯선 표현에 동공이 흔들리더라도 집중력 도둑을 어떻게든 막아내며 끝까지 한번 진격해 보자. 200자 원고지로 16매, 3200여 자에 불과한 분량이니(통상적으로 A4 용지 기준 10pt로 한 장 반 정도다), 끝까지 가면 뭐라도 하나 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말도록. 만약 아무리 노력해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아서 가느다란 희망의 끈마저 놓았다면,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큐레이터 입장에서는 최대한 친절하게 전시와 작가에 관해 알려주면서도, 지나치게 설명적이거나 정답을 강요하지 않으려고 무진장 애쓴 결과물이지만, 작가와 작품에 푹 빠진 채 써 내려간 정보를 오늘 처음 보는 관람객 입장에서는 온도 차가 엄청난 게 당연지사다. 나름 친절하다고 자부하는 월텍스트의 문장이 아까 미술관 앞 타워에서 웅얼거리는 미지의 언어처럼 다가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갑자기 다가온 현실이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월텍스트를 재료 삼아 이런저런 질문은 던져볼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프랑스 출신의 필립 파레노는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예술가인데, 지금까지 아시아에서 열린 전시 중 가장 큰 규모로 리움미술관에서 열린다네? 그렇다면 아시아가 아닌 곳에서는 여기보다 더 큰 규모의 전시를 열었을 수도 있겠네. 과연 어딜까?’ 혹은 ‘월텍스트에서 말하는 “전통적 작가 개념”이라는 건 뭘까? 그가 “오브제 생산자로서 작가의 역할을 거부”했다는 말을 힌트 삼으면 되려나?’. 어쩌면 ‘작가는 “90년대 현대미술 형태의 혁신적 전환”을 이끌었다는데, 그럼 2000년대 들어서는 딱히 혁신적으로 전환한 게 없다는 뜻인가?’라는 의구심까지 말이다.

03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필립 파레노Phillipe Parreno

자, 이제 월텍스트는 중간 지점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작가 소개를 마친 후 드디어 전시를 주인공 삼아 내용을 이어가니, 조금만 더 가보도록 하자!

전시 «보이스»는 ‘다수의 목소리’를 중심으로 감성적이고 공감각적인 안무를 펼치며 총체적 예술 경험을 제안…전시는 과거에 파편적으로 존재했던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로 집결시키며, 지금 여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질문… 작가는 하나의 새로운 목소리를 창조… 배우 배두나의 실제 목소리가 인공지능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 근원을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공언어 창조자가 만든 새로운 언어 ‘∂A’를 습득하며, 발화의 주체로 성장…

04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월텍스트에서 전시가 주어가 등장할 때는 마음을 굳게 먹을 필요가 있다. 작가와 그의 과거 작품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에게는 압축적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자리이지만, 밖에서 웅얼거리는 이상한 타워 하나만 보고 전시장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수수께끼 석판처럼 다가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자연스럽게 뇌를 쑤시며 울렁이게 할 수 있다. ‘전시가 “감성적이고 공감각적인 안무”를 펼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하지? 혹시 전시장에 놓은 작품들이 실제로 움직이나?’,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로 집결시킨다는 말은 작가가 과거에 만든 여러 작품을 이번 전시에 한데 모았다는 뜻을 고상하게 말하는 건가?’,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문학적 표현인가?’. ‘∂A는 웬 뜬금포?’

아아, 슬프게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점은 바로 마지막 문단이다. 아직 해당 전시를 보지 않았거나, 보고 왔지만 기억이 가물거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월텍스트 원본을 그대로 가져와 보려고 한다.

목소리는 마치 인형극 마스터처럼 작품을 활성화하며 공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리움미술관은 거대한 자동기계(automaton)로 변신한다. 조명이 깜박이며 벽이 움직이고 시계태엽이 작동한다. 눈이 녹는 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스피커가 움직이고 광원이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동시다발적으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언어와 음악이 공간을 압도한다. 영상이 켜지는가 하면 반딧불이가 나타나고 피아노는 저절로 연주한다. 마법의 세계와 같다. 하지만 단순한 환상은 아니다. 전시는 자기제어시스템에 의해 작동되며 모든 요소는 완벽하게 컨트롤되기 때문이다. 단, 이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변수와 우연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그다음 단계를 예측할 수 없을 뿐이다. 마치 생명체처럼, «보이스»는 상호의존하며 실제와 가상의 경계에서 예측불허한 진화를 지속한다.

얼핏 ‘예술 외계어(artspeak)’로 꽉 찬 듯한 문단을 살피는 지금, 이미 전시를 관람한 사람이라면 당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테다. 수천 평에 이르는 리움미술관 전체 전시 공간을 점유한 40여 점의 작품을 실제로 보거나 경험하지 않고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을 아주 알차게도 열 개 남짓한 문단에 욱여넣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뉴비는 어떡하라고? 월텍스트에 친절함을 가득가득 채워도, 전시 초심자가 단박에 이해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목표라는 사실을 작성자도 매우 잘 알고 있다. 전시를 기획하며 이해도가 아주 높아진 큐레이터가 초안을 작성한 뒤, 전시에 관여한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계속 친절도가 상승한 월텍스트의 끝판왕이 오더라도 모든 작품에 대한 안내문을 일일이 벽에 붙이지 않는 이상(혹은 심지어 그렇게 한다고 한들) 전시장에 찾아온 뉴비에게 한 방에 머리가 깨지는 깨달음을 전달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 너머 미지의 일이다.

02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혹시나 아파트 5층 높이의 언덕을 등반하며 체내 산소 농도가 떨어진 채 전시장의 월텍스트를 읽은 터라 전두엽으로 향하는 혈류 공급이 급격히 줄었거나, 시야가 흐려지는 현상을 겪는 분들을 위해,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마음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반의반 길이 정도로 월텍스트를 바꿔보았다. (참고로 필자는 이번 필립 파레노 전시의 기자간담회에서 통역을 맡았기에 다른 의미에서 이해도가 높아진 상태라는 점을 주지해 주시길.)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보이스»는 1990년대에 미술의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을 혁신적으로 뒤바꾸면서 예술가로 활동을 시작한 필립 파레노의 지난 30년을 조망하는 전시다. 리움미술관 실내외의 거의 모든 공간을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꽃›(1987)을 비롯한 과거의 주요 작품과 함께 리움미술관 공간에 맞춰 창작한 ‹막(膜)›(2024), ‹∂A›(2024), ‹움직이는 조명등›(2024) 등 새로운 작품을 아우르는 4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필립 파레노는 단순히 오브제를 만드는 제작자로 여겨졌던 전통적 예술가상을 거부하며, 전시 공간에서 관람객이 ‘시간’ 그 자체를 경험해 보기를 제안한다. 그런 점에서, 파레노의 전시는 매일, 매 순간 변화한다. 또한 그의 전시는 작품 각각을 분리해서 보여주는 대신, 작품과 공간을 통합해 연속적인 ‘경험’을 창출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언어학자와 함께 만든 인공언어 ‘∂A(델타에이)’를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와 합성해 목소리로 구현, 전시장 곳곳에서 들려오게 만들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들이 모여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자동기계’를 구성한 모습을 보여준다. 전시장 외부에 놓인 센서가 감지한 정보가 전시장 안에 놓인 작품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며, 전시장의 관람객 역시 그 존재만으로 이 거대한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양한 시기에 제작된 여러 형태의 작품이 이뤄낸 조합은 리움미술관의 공간 안에서 전시가 끝날 때까지 한시적으로 존재하며, 전시 기간에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0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07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새롭게 정리한 월텍스트가 전시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물론, 필자 버전의 월텍스트 역시 예술 외계어의 방언으로 쉽게 읽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더불어 작가의 손을 이미 떠난 작품과 전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해의 틀을 제공하려는 시도는 자유로운 예술 감상에 도움이 아니라 방해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력을 다해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미술은 없다’라고 외치는 작품을 연달아 던지는 필립 파레노의 «보이스» 같은 전시는 아무래도 초심자에게 버거운 상대다. 작가가 제안하는 ‘게임’을 관람객이 아무런 공포 없이 기꺼이 수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최소한의 가이드가 필요해 보이는 이유다. 실제로 작가는 «뉴요커The New Yorker»에 “내가 하는 일 가운데 많은 부분은 사람들이 픽션을 받아들여야 성립된다(Lots of the things I do require people to endorse a fiction)”라고 밝히기도 했다.

08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말하자면, «보이스»라는 전시는 매일 문을 여닫기 위해 수많은 사람의 손길로 관리되는 미술관이라는 하나의 공간 혹은 제도가 작가의 전시를 통해 한시적으로 ‘자동기계’로 변한다는 픽션을 관람객이 신앙으로 믿어야만 재밌어진다. 그렇지 않다면, 미술관 외부 환경을 감지해 미술관 내부에 놓은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거대한 기계 타워(‹막(膜)›)은 ‘SF 영화에서 가져온 듯한 신기한 조형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그저 볼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일정한 온습도를 유지하고, 작품에 손상이라도 갈까 봐 구석구석 지진계를 배치해 둔 미술관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눈사람(‹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이나 관람객으로 인해 변화하는 전시장 내부의 공기 흐름과 온도 변화에 반응해 마치 센서처럼 떠다니는 물고기 모양의 풍선(‹내 방은 또 다른 어항›) 역시 마찬가지다.

09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이런 면을 생각한다면, 작가와 작품 소개에 집중하는 월텍스트는 «보이스» 전시를 즐기기 위해 정말 필요한 도구가 아닐지도 모른다. 파레노가 쌓아온 명성과 이번 전시에서 어떤 형태의 작품을 선보이는지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고정된 형태를 거부하는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적절한 단서를 제공하는 관람 지침이 필요하지 않을까? 심지어 작품의 내용이나 형태가 아니라, 창작이나 감상의 태도를 설명하는데 초점을 맞추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관람객에게 행동을 촉구해야만 한다. 더불어 작가를 처음 접한 이들을 위한 적당한 정보와 겸손하지만 확신에 찬 말투로 미술관의 노력을 소개하는 일을 스킵하는 건 너무 극단적이다. 아래 월텍스트는 리움미술관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필자의 소견이라는 점을 명심하며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필립 파레노 «VOICES, 보이스»

«보이스»는 필립 파레노가 1987년부터 지금까지 30여 년에 걸쳐 만든 작품 40여 점을 아우르는 조망전이다. 필립 파레노는 유럽의 주요 미술관에서 여러 차례 대규모 개인전을 열었지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미술관에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되지 않았다. 리움미술관 실내외의 여러 전시 공간을 활용하는 이번 전시는 미술관에서 치러진 개인전 가운데 최대 규모로, 작가의 첫 번째 작품인 ‹꽃›(1987)을 비롯한 과거의 주요 작품과 함께 미술관 공간에 맞춰 창작한 ‹막(膜)›(2024), ‹∂A›(2024), ‹움직이는 조명등›(2024) 등 새로운 작품을 선보인다.

필립 파레노는 예술가를 단순히 오브제를 만드는 제작자로 여기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는 작품에 제목을 붙이고 미술관 전시를 통해 이를 보여주지만, 자신의 작품이 제한된 기간에 특정한 공간에서만 존재하는 ‘전시’ 안에서 ‘시간’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변하는 ‘경험’으로 남기를 원한다. 따라서, 필립 파레노의 작품은 물리적 형태가 고정되지 않거나 심지어 눈으로 보이는 형태를 벗어날 때도 있다. 예컨대 전시 공간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새 작품 ‹∂A›의 일부로, 언어학자와 함께 만든 인공 언어에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를 합성한 결과물이다. 이 목소리는 전시가 진행되는 동안 수집되는 데이터에 따라 계속해서 진화하며, 작가 역시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보이스»는 필립 파레노가 만든 ‘자동기계’와 같은 전시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의 조합은 그가 이번 전시를 위해 고안한 일종의 화학 공식이나 다름 없고, 전시장에 들어선 관람객 역시 공식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가 된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이 전시는 그 누구도 ‘전체’를 관람할 수 없고, 이는 작품을 창조한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전시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각자의 시점에서 경험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전시 공간 안에서 충분히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가능하다면 전시를 여러 번 방문해도 좋다. 전시의 영문 제목(VOICES)이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여러 목소리를 가리키는 이유는 이 전시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결코 하나일 수 없기 때문이다.

05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06_현대미술설명서_필립파레노

이처럼 전시를 보고 나서 자신만의 월텍스트를 써보는 건 어떨까? 필자가 작성한 월텍스트는 공백 포함 1100자 수준으로 10pt 기준 A4 용지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전시회를 다녀온 후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라고 상상하며 두세 문단 정도의 월텍스트를 남겨보자.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써도 좋고, 평소 상상하는 미술계나 큐레이터의 모습에 과몰입해서 예술 외계어를 남발해도 좋다. 본인이 쓴 글을 시트지로 인쇄해 전시장 입구에 커다랗게 붙이는 모습을 상상하면 더욱 좋다. 당신의 월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불특정 다수다. 날카로운 눈매로 글을 점검하려고 벼르는 미술계 사람뿐 아니라 미술이 좋아 휴일에 방문한 사람들, 데이트를 위해 미술관을 고른 커플, 조기 교육을 위해 미술관에 끌려온 어린이, 미술 언어가 낯선 노령의 관람객까지 모두를 포괄한다. 이렇게 나만의 월텍스트를 조금씩 써본다면 마냥 이해하기 어렵게만 다가오던 전시장의 월텍스트가 분명 조금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Writer

박재용(@publicly.jaeyong)은 주로 한국과 서울에서 활동하는 큐레이터, 통·번역가, 연구자, 교육자다. 동시대 예술과 이론 서가 서울리딩룸(@seoulreadingroom)의 장서광이자, 리서치 밴드 NHRB(@NHRB.space)에서는 허영균과 함께 프론트맨을 맡고 있다. 김수지, 정성은과 함께 서촌코미디클럽(@westvillagecomedyclub)을 운영하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기도 하며, 영국의 미술 매체 «프리즈Frieze»의 컨트리뷰팅 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한국 브랜드 디자인 회사의 영업 비밀

thumbnail
Essay

header_허민재_브랜딩

Essay

이슈의 테마에 관한 다양한 오피니언을 엿봅니다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디자인 스튜디오가 올리는 작업을 볼 때면 이런 생각이 든답니다. ‘어라 그래픽 디자인을 하던 곳에서 요즘 브랜드 디자인을 많이 하네?’ 영역 구분 없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대라지만 확실히 흥미로운 양상이긴 해요. 사회적으로 스몰 브랜드가 대폭발 수준으로 많이 생기면서 그만큼 니즈를 끌어올린 결과거든요. 디자인이 산업의 영향을 많이 받는 업종이다 보니 브랜드 디자인이 스튜디오 포트폴리오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쑥쑥 올라가는 거죠. 허민재 더블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자사 브랜드 리뉴얼을 하면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겼어요. ‘설립자의 배경이 디자인 프로세스에 영향을 미칠까? 규모에 따라 프로세스의 범위가 달라질까? 프로세스 중 어떤 것을 가장 중시할까? 주요 가치로 꼽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서 국내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브랜드 디자인 회사 문을 똑똑 두드리며 리서치를 해봤답니다. 그 인사이트가 궁금하시다면, 아티클에서 확인해 보세요.

인스타그램을 둘러보다 피드에 뜨는 디자이너의 작업을 발견할 때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상당수가 브랜드 디자인 스튜디오로 바뀐 것 같은데?” 이게 틀린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 활발히 활동하는 많은 디자이너 스스로 이미 느끼고 있을 것이다. 2020년대 들어 대한민국의 브랜드 디자인 산업은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과거 브랜딩 전략과 함께 로고와 애플리케이션을 디자인하는 데 특화됐던 브랜드 디자인 전문 회사의 업무 범위는 이제 패키지 디자인, 온오프라인 브랜드 경험까지 포괄하는 방향으로 역량을 강화하는 중이다. 동시에 2010년대 스몰 스튜디오 붐을 따라 생겨난 수많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곳의 절반 이상은 브랜드 디자인을 주요 프로젝트로 삼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이런 변화가 나타난 배경에는 산업적인 대전환이 큰 영향을 미쳤다. 온라인 마켓의 급성장과 함께 다품종 소량제작이 가능해지면서 각종 영역에서 스몰 브랜드가 활발하게 등장했다. 그에 따라 브랜드 디자인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형 브랜드 또한 새로운 사회적 가치의 부상으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과 ESG 등을 중시하는 과정에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리뉴얼하는 추세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브랜드 디자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수록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가 브랜드 디자인을 주요한 먹거리로 삼는 비율도 증가했으며, 그로 인해 필요한 역량도 달라지는 실정이다.

01_더블디_신세계유니버스

이제 모든 게 브랜드다. 더블디는 신세계 그룹 최초의 통합 멤버십, 신세계 유니버스 클럽을 위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작업을 진행했다. 로고는 지구와 우주를 경계 짓는 카르만 라인에서 영감받았다.

02_더블디_신세계유니버스

소형 디스플레이를 위해 획의 두께와 글자 간격을 독립적으로 조정했다.

나만 하더라도, 2012년 더블디(Double D)를 시작할 때는 그래픽 디자인에 중점을 두었지만, 몇몇 대형 브랜드 디자인 리뉴얼을 맡은 경험을 바탕으로 2024년 현시점에는 브랜드 디자인 컨설턴시로 인식할 수 있도록 리포지셔닝을 진행 중이다. 그런 노력의 일부로 작년 더블디의 리브랜딩을 단행했다. 외부에 존재하는 콘텐츠 디렉터의 분석과 더불어 더블디 내부적으로 회사의 비전, 미션, 업의 본질을 정의하는 인터널 브랜딩을 수립하며 우리다움을 구축했고, 마켓에서 경쟁력을 갖는 익스터널 포지셔닝을 통해 브랜드 인더스트리를 분석했다.

특히 내부 구성원의 설문 조사와 창업자 인터뷰 등에서 추출한 여러 단어를 기반으로 버벌 브랜딩를 재정비하며 더블디가 지닌 의미를 바꾼 것은 큰 성과였다. 영국 디자인카운슬에서 내세우는 디자인 싱킹 방법론인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영감을 얻어 발견(discover), 정의(define), 개발(develop), 전달(deliver)로 이어지는 디자인 프로세스 중 현재 더블디가 중시하고 잘하는 부분은 리서치를 통해 브랜드 방향성을 떠올리고, ‘브랜드다움’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지점을 찾는 행위라고 결론지었다. 덕분에 오랜 기간 ‘Design Can Double’에 머물던 더블디는 ‘Discovery Driven’의 준말로 업데이트됐다.

03_허민재_브랜딩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 © The Fountain Institute

04

크리에이티브 컨설턴시 더블디 리브랜딩. © DOUBLE D

더블디 리브랜딩을 진행하며 디자인 프로세스에서 ‘더블디다움’을 찾은 경험은 자연스럽게 국내에서 활동하는 브랜드 디자인 회사가 지닌 디자인 프로세스 전반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졌다. ‘과연 다른 회사들도 우리처럼 발견을 중시할까? 아니라면 대체 어떤 부분을 중시하는 걸까?’ 이를 위해 현재 한국의 아이코닉한 브랜드 디자인 회사를 이끄는 대표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와 2시간 정도 인터뷰를 진행하고, 여기에서 얻은 인사이트를 요약해 이번 기회에 정리해 보려 한다.

회사의 경우, 브랜딩 전문 회사, 브랜드 디자인 스튜디오, 브랜딩 작업을 하는 디자인 스튜디오 등으로 분류하면서 규모 또한 다양하게 다뤘다. 핵심 주제인 디자인 프로세스의 경우, 엘레나 휠러가 2013년 정의한 일련의 프로세스(기초 자료 조사와 분석 → 브랜드 전략 수립 → 아이덴티티 디자인 개발 → 아이덴티티 시스템 완성 → 브랜드 매니지먼트), 김형석이 2012년 정의한 프로세스(분석 전략 → 네임 크리에이션 → 검증 →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브랜드 매니지먼트)를 바탕으로 현재 기업에서 진행하는 프로세스와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았다.

결국, 이번 인터뷰를 통해 의문을 던진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회사 설립자의 배경은 디자인 프로세스에 영향을 미칠까?

2. 회사 규모에 따라 브랜드 디자인 프로세스의 범위가 달라질까?

3. 브랜드 전문 회사가 취하는 디자인 프로세스 중 가장 중시하는 영역은 무엇일까?

4. 브랜드 전문 회사가 추구하는 주요 가치로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참고로, 각 회사에 대한 분석은 내부 구성원 수를 기준으로 작은 곳에서 큰 곳으로 순서를 정리했다.

05

© TRIANGLE-STUDIO

트라이앵글 (장기성) – 질문을 통해 찾아가는 브랜드의 본질

2012년 설립한 트라이앵글-스튜디오는 그래픽 디자인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스튜디오로, 장기성 대표를 주축으로 현재 다섯 명의 구성원과 함께 연남동에서 활동 중이다. 학부에서 애니메이션을 공부한 장기성은 전공 지식 및 시각 디자인 경험을 바탕으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18년 차 디자이너다. 트라이앵글-스튜디오는 경계에 제한을 두지 않는 동시대성과 전통적인 방식의 교묘한 조화를 찾는 것에 기반해 그래픽 디자인, 브랜드 디자인, 아트 디렉션까지 역할을 확장했다. 장기성은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설정하는 전문 지식을 살려 브랜드 페르소나 설정과 세계관 만들기에 응용하고 있고, 네이밍부터 브랜드 스토리, 아이덴티티 개발과 패키지 디자인, 그래픽 확장과 가이드라인까지 통합적으로 디자인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과정에서 디자인 전략과 맥락을 잡는 일을 핵심으로 삼고, 작업의 본질을 파악하며, 클라이언트와 스튜디오 간의 상호 가치를 추구한다. 작업을 통해 클라이언트와 콘텐츠가 얻고자 하는 본질과 시각적 특질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찾아가는 것이 트라이앵글-스튜디오의 작업 방식이다. 장기성은 인터뷰에서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 중 ‘발견’과 ‘정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으며, 이를 위해서 키워드를 다량으로 생산하고, 문장화를 통해 시각화까지 연결하는 행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06

© MANUAL GRAPHICS

매뉴얼 (이성균) – 반복을 통한 브랜드 기본에의 충실

매뉴얼은 2010년 활동을 시작한 디자인 스튜디오로, 창업자 이성균을 중심으로 현재 아홉 명이 열정적인 팀워크를 보이는 곳이다. 웹사이트 디자인에서 출발한 매뉴얼은 브랜딩 프로세스를 통해 클라이언트의 비주얼 아이덴티티 개발에 주력한다. 이때 필요한 브랜드의 버벌 키워드 및 정보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체적으로 개발하며 독자적인 체계를 확립하고 있다. 매뉴얼의 브랜딩 프로세스는 철저한 계획과 실행을 통해 단계적으로 진행한다. 초기 두 달 동안 프로젝트 방향성을 정의하고, 시각적인 방향을 제안하며, 이를 토대로 세 번째 달에는 실질적인 디자인 작업을 진행해 가이드 외 기타 산출물을 완성한다. 매뉴얼은 목표를 설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작업을 생산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완성도를 높이는데, 특히 ‘기본이 중요하다’라는 철학을 중시하며,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나 제품의 존재 이유에 대해 깊이 있는 탐구를 강조한다. 이성균은 인터뷰에서 디자인 프로세스 중 ‘개발’이 가장 중요하며, 이를 더 잘하기 위해서 클라이언트와 협의해 개발 프로세스를 반복하는 경우도 존재한다고 밝혔다.

07

© CFC

CFC(전채리) – 브랜드의 고유함을 만드는 맥락적 사고

2013년 시작한 Content Form Context(CFC)는 19년 차 경력의 전채리 대표를 중심으로 총 열 명의 전문가가 함께하고 있다. CFC는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깊게 이해하기 위해 브랜드 전략과 아키텍처 수립 등 핵심 과정을 외부 회사와 적극적으로 협업한다. 특히 ‘무드 보드’ 개발은 프로젝트에 착수한 지 약 4주 후 클라이언트와 공유해 프로젝트 방향을 시각적으로 제시하는 CFC만의 차별화된 프로세스의 일부다. 이를 토대로 디자인 작업을 시작하며, 프로젝트 진행 과정을 철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다. CFC는 브랜드 리뉴얼에서 ‘맥락 만들기’를 중시한다. 경쟁사 분석과 인터뷰를 통해 브랜드 포지셔닝을 설정하고, 브랜드 고유의 가치를 발견한 후, 브랜드와 가장 근접하면서 필연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모습을 찾아주는 역할을 맡는다. 브랜드를 디자인하는 입장에서 ‘철학적 고찰’과 ‘현상 이면의 탐구’를 강조해 브랜드를 깊게 이해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전채리는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정의’를 가장 중요한 과정으로 꼽았으며, 이를 위해 브랜드를 둘러싼 고객의 관점 및 시장의 상황을 연구하며 문제를 발견한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더불어 문제뿐 아니라 해당 문제의 해결 방향을 잘 정의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08

© named

네임드(윤영노) – 디자인과 비즈니스의 융합

2013년 설립한 종합 디자인 기업인 네임드는 총 19명의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윤영노 대표는 시각 디자인, 편집 디자인, 브랜드 디자인 분야에서 쌓은 폭넓은 경험을 토대로 네임드를 이끄는 18년 차 디자이너다. 네임드는 외부에서 브랜드 디자인 회사로 인식하지만, 최근 들어 디자인 영역을 넘어 비즈니스와의 긴밀한 결합을 모색 중이다. 회사 내부에 존재하는 전략팀은 연출가 출신 전문가와 UI·UX 설계 경험을 지닌 전문가 등 다양한 맨파워를 바탕으로 기존 관행과는 다른 접근 방식을 시도한다. 전략·기획자와 디자이너는 다섯 명의 디렉터와 함께 클라이언트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며 비즈니스의 성공을 추구한다. 네임드의 구성원은 디테일과 함께 비즈니스적 가치를 중시하며, 브랜드 디자인에 전략적으로 접근한다. 인터뷰에 응한 윤영노는 ‘발견’과 ‘정의’를 가장 중요한 프로세스로 꼽았다. 특히 발견에서는 리서치 및 경쟁사 제품 구매, 필드 리서치 등의 세부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정의에서는 키워드 분류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제품 및 무드 이미지와 함께 키워드를 놓고 고민한다고 밝혔다.

09

© CLAY

클레이(김형우) – 경계를 관통하는 본질, 브랜딩 전략으로서의 디자인

클레이는 2015년 설립된 브랜딩 전문 회사로, 20여 명의 정규 멤버가 이끌어가고 있다. 김형우 대표는 23년 차 디자이너 출신 디렉터로서 브랜드 컨설팅과 디자인을 총괄 중이다. 클레이가 강조하는 핵심 가치는 ‘리얼(Real), 밸류어블(Valuable), 인스파이어링(Inspiring)’으로, 이를 통해 브랜드의 본질을 추구한다. 더불어 ‘본질은 경계를 관통한다’라는 철학을 중시하며, 다양한 영역을 통합해 브랜드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클레이의 업무 범위는 브랜드 중심의 공간 기획과 아이덴티티 디자인에 초점을 맞추는데, 전략 기획부터 네이밍·슬로건 같은 버벌 아이덴티티, 비주얼 아이덴티티 디자인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입장을 취한다. 브랜딩 전략과 최종 디자인 결과물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혀 메시지의 일관성을 높이는 방향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뷰와 워크숍을 통해 초반 단계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고, 디자이너와 기획자가 프로젝트 처음부터 끝까지 협력해 결과물을 도출하는 접근 방식을 브랜딩 프로젝트의 핵심으로 여긴다. 김형우는 인터뷰를 통해 ‘발견’과 ‘정의’가 중요하다고 밝혔는데, 브랜드 디자인에서 기획 부분에 속하는 앞단이 더욱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정의하는 단계에서 크리에이티브가 도출된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다.

10

© FRUM

프럼(김명진) – 전략,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 융합을 통한 혁신

김명진 대표가 2010년 설립한 크리에이티브 컨설팅 회사 프럼은 총 45명의 전문가로 구성되어 있다. 프럼은 전략, 크리에이티브, 테크놀로지를 결합해 다양한 비즈니스를 지원한다. 회사의 브랜드 슬로건 ‘Imagination Composer’는 클라이언트와 함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솔루션을 창조한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프럼은 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철저하게 사업 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감성적인 크리에이티브와 결합해 작업한다. 클라이언트를 게임 체인저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혁신적인 솔루션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며, ‘Imagenation Network Company’라는 방향성 아래 다양한 분야의 스페셜리스트, 전문 에이전시와 협력해 종합적인 솔루션을 제공한다. 프럼이 설정한 자신의 경쟁자는 전략 컨설팅 펌으로, 사업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전략 컨설팅을 통해 비즈니스 문제를 해결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원스톱 솔루션을 지향한다. 기존 프로세스를 따르기보다 새로운 방식을 선호하는데, 이를 통해 클라이언트에게 종합적인 솔루션과 통찰력 있는 시각을 제공하며 비즈니스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김명진은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자사가 강조하는 지점을 인터뷰에서 특별히 언급하지 않았다. 일하는 방법, 싸우는 방법의 기본을 습득하기 위해서 프로세스를 배우지만, 실전에서는 다양하게 응용된다고 말했다. 또한 정의된 모델에 집착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과감히 프로세스를 새롭게 만들어간다고 밝혔다.

11

© Sam Seoul

샘파트너스(이창호, 배지훈) – 좋은 브랜드 경험의 중요성

샘파트너스는 이창호 대표를 중심으로 50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가 집단이다. 지난 2005년 설립 이래 20년간 브랜드 개발의 전 과정을 서비스하며 브랜드 디자인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다. 샘파트너스는 브랜드 개발 과정 전체를 망라하는 토털 디자인을 추구하며, 브랜드 전략 수립과 콘셉트 속성 개발을 중시한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클라이언트의 니즈와 문제점을 진단한 후 맞춤형 솔루션을 제안하고, 리서치와 프로젝트 시작 단계에 시간과 노력을 집중해서 가치 있는 결과물을 제공한다. ‘좋은 경험을 만든다’라는 철학에 따라 브랜드 경험을 향상하고 모든 이에게 좋은 선택의 기회를 제공하는 일을 기업 목표로 삼고 있다. 브랜드가 단순한 상징 체계를 넘어 사회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인식 아래, 브랜드와 공공 디자인으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창호는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 대신 스탠퍼드대학교 D-스쿨의 디자인 싱킹 모델을 언급하며 특히 아이디어화(ideate)를 중시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다이아몬드 사이의 중심점에 해당한다. 예전에는 로고를 중심으로 중앙화를 통한 확산을 목표로 삼았다면, 지금은 아예 처음부터 확산을 염두에 두고 개발하는 추세라고 말했으며, 확산과 수렴 모델에서는 효율성 또한 중요하기 때문에 적정 수준으로 확산을 조절한다고 덧붙였다.

12

© Interbrand

인터브랜드 (정하진) –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그룹의 브랜드 경험 전문기업

1974년 설립한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그룹인 인터브랜드는 전 세계적으로 1200여 명의 전문가를 보유 중이며, 한국 법인에는 70명이 넘는 구성원이 일하고 있다. 정하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브랜드 디자인 분야에서 18여 년의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인터브랜드 한국 법인은 휴먼 익스피리언스, 하트빗, 커넥티드로 사업 부서가 나뉘어져 있는데, 브랜드 컨설팅을 통해 클라이언트의 브랜드를 강화하고 경험을 향상하는 데 중점을 둔다. 인터브랜드는 브랜딩 프로세스를 진행하면서 고객 가치 제안(CVP)을 근간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구축하고, 숫자와 데이터를 활용해 결과를 시각화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데 강점을 지닌다. 고객의 니즈를 앞서 변화시키는 결과물을 만든다는 의미가 담긴 슬로건 ‘대담한 도전(Iconic Moves)’ 아래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을 목표로 삼는다. 과정과 결과 모두를 중시하며, 고객의 니즈를 시프트하고 혁신적인 브랜드 경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정하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 인터뷰에서 밝힌 인터브랜드가 가장 잘하는 것은 바로 전략이다. 인터브랜드는 독립적인 툴과 플랫폼을 개발하며 프로세스를 개선해 왔으며, 인터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워크숍은 브랜드를 바라보는 관점을 만드는 중요한 프로세스라고 전했다. 특히 인터브랜드가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 중시하는 부분은 ‘발견’과 ‘정의’로, 무엇보다 인사이트를 제대로 뽑고, 이를 크리에이티브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진행하며 얻은 인사이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보면, 일단 설립자의 배경은 사소한 개성에 가까웠고 유의미하게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서 존재감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브랜드 전문 회사, 혹은 전 직장에서 브랜딩을 진행한 경험은 현재 프로세스에서도 쓰이고 있는 점을 발견했다.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는 주요 브랜드 전문 회사는 기업 규모와는 상관없이 전략부터 기획, 디자인 실행과 배포에 이르는 주요 단계 대부분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특히 엘레나 휠러가 정의한 다섯 가지 프로세스는 인터뷰에 응한 여덟 곳 모두에서 폭넓게 쓰였다. 다만, 김형석이 정의한 다섯 가지 프로세스의 경우, 회사 규모가 작을 때는 네임 크리에이션, 검증 과정을 생략할 때도 있었다.

13

엘레나 휠러가 정의한 다섯 가지의 브랜드 디자인 프로세스 © amazon

대부분의 경우, 더블 다이아몬드 모델에서는 후반부의 디자인 역량보다 전반부의 기획 역량을 전반적으로 강조했다. 회사 규모가 작을 땐 디자인 퀄리티를 치밀하게 관리하고, 디자이너가 전체 브랜드 프로세스를 총괄하는 경향성을 띠는 데 비해, 규모가 크면 브랜드 전략 기획, 네이밍, 디자인 등을 전문 부서가 맡는 분업을 지향했다. 특히 큰 규모의 회사는 프로세스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전문적인 전략팀을 배치했으며, 무엇보다 자체적인 프로세스를 개발해 고객에게 제안하는 일을 중시했다. 브랜드 전문 회사답게 대부분 각자 추구하는 가치관이 명확했으며, 이를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활용했다. 여기에서 중요도가 높다고 자주 언급한 가치는 다음과 같았다.

1. 전략 기획과 일관된 크리에이티브
2. 고객과 비즈니스 중심의 사고
3. 고객의 니즈를 선도하는 더 나은 제안
4. 브랜드의 본질을 담는 브랜딩

이번 인터뷰를 통해 개인적으로 얻은 인사이트를 꼽아보려면 탄탄한 기획이 높은 완성도와 훌륭한 결과물로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지만, 다수의 선도 회사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영업 비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착안해 추후 대학에서 개설하는 브랜드 디자인 수업에 전략 기획을 포함하는 커리큘럼을 짜서 운영할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다. 현시대의 브랜드 디자인 산업은 과거 방식에 머물지 않고 지속해서 진화하며 변하고 있다. 이번 글이 디자이너 각자가 자신의, 혹은 조직의 프로세스를 돌아보고, 더 나은 방향으로 설계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길 기원해 본다.

Writer

허민재는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과 영국 왕립예술대학(RCA)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하고 뉴욕과 런던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다 귀국해 2012년 디자인 스튜디오 더블디(Double D)를 설립했다. 더블디는 현대자동차, 기아, CJ올리브영, 한화, 월트 디즈니, 아모레퍼시픽, 신세계백화점 등 다양한 기업과 협업하는 크리에이티브 컨설턴시로 성장했다. 그는 ‘국제 타이포그라피 비엔날레 2017’에서 책임 큐레이터를 역임하고 2018년 독일 뮌헨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린 «Korea Design + Poster» 전시에 참여했다. 현재 더블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비애티튜드»의 발행인을 맡고 있다.